소설리스트

강남화타-148화 (148/255)

# 148

1장, 숙명적(宿命敵) (2)

놀라운 제의였다.

보건복지부의 정책 자문위원.

소정의 활동 경비를 지급 받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다.

정부의 의료와 보건 정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자리이고, 전문성을 확실하게 인정받은 사람들만 이름을 올릴 수 있는 명예직이다.

양성문 장관이 말한 것처럼 대부분의 정책 위원은 의사와 약사들로 구성 돼 있다.

한의학계에서는 위천 한방병원의 병원장과 이사장, 두 명만 이름을 올렸다.

한지호가 제의를 수락하면 세 번째 인물이 된다.

원화 한의원와 네트워크가 위천의 뒤를 바짝 쫓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걸 정부에서 증명해주는 셈이다.

거절할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제게는 과분한 자리이지만 장관님께 도움이 된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도움이 되다마다요. 한의사들의 현대 의료 기기 사용 문제부터 시작해서 첨예한 갈등 사안들이 많잖아요. 그렇기에 믿을 만한 한의사 출신 자문위원들의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어요. 바쁠 텐데 정책 자문위원이 되어 줘서 고마워요, 한 원장.”

“아닙니다. 영광입니다.”

“안 그래도 정책위 회의가 다음 주에 있으니 부서에서 연락이 갈 거에요. 바로 한 원장 이름을 올리도록 할게요.”

장관이 직접 선택한 것이니 일 처리 속도도 남다른 게 당연했다.

한지호는 대한민국 한의학계에서 세 번째로 보건복지부 정책 자문위원이 됐다.

이러한 사실은 대중들이 관심을 가지는 주제는 아니다.

대신 한의학계나 의료계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많은 말이 돌 것이다.

한지호는 협진 프로젝트를 통해 의학적인 성과를 뚜렷하게 남겼기에 대단한 영예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방송에서의 인기와 이슈만으로는 보건복지부의 인정을 받기 힘들다.

요즘도 널리고 널린 게 인기 많은 쇼닥터 아니던가.

역시 결국에는 의술이 가장 중요하다는 게 또 한 번 증명 됐다.

한지호는 양성문의 제의를 받으며 유명세를 쫓기 보다는 의학적인 성과를 내는데 집중해야겠다는 초심을 되새겼다.

그때 최규열이 끼어들었다.

“내 덕에 좋은 정책 자문위원을 얻었으니 오늘은 양 장관이 사야겠네.”

“동기끼리 이러긴가?”

“동기니까 이럴 수 있는 것이지, 허허허허!”

분위기가 더 없이 밝아졌다.

호탕한 웃음소리가 인상적인 선운열이 지지 않겠다는 듯 최종 정리를 해버렸다.

“돈도 별로 못 버는 의사랑 장관이 무슨 술을 산다고. 내가 살 테니 자네들은 마음껏 마시기나 하게. 한 원장도 오늘 단단히 취할 각오를 하고!”

선운열의 농담에 한지호도 박장대소를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Y대 암센터장과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돈도 별로 못 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하지만 호남 지역 최고의 건설회사를 가진 선운열은 그럴 자격이 있다.

선운열의 호방한 농담이 분위기를 달구었다.

한지호와 Y대의 황금라인 원로 삼인방이 함께하는 밤, 쉐라톤에서 시작 된 회동은 아주 뜨겁게 이어져 해가 뜰 때까지 계속될 것 같았다.

+++

준비할 게 많았다.

그만큼 시간은 빨리 흐른다.

한지호는 매일 통원 치료를 받는 김금순 환자를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경과가 좋지만 마무리가 나쁘면 공든 탑이 무너지는 꼴이다.

요즘 그의 일과는 김금순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고 치료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오전과 오후에는 오래 기다린 환자들의 진료를 본다.

협진 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전부터 원화 한의원의 예약은 언제나 가득 차 있었다.

그나마 문재영 부원장이 자기 역할을 톡톡히 해주면서 조금 부담을 덜게 됐다.

평상시에도 부원장 진료를 받는 환자들이 늘어났고, 급할 때는 문재영이 한지호의 환자들을 대신 진료하는 관행이 제법 잘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건강백서, 진짜! 가짜!>의 촬영이 있는 수요일은 휴진을 했지만, 부원장이 진료하는 날로 오픈을 해도 될 것 같았다.

신규 코디와 간호사들도 충원이 됐기에 수요일을 부원장 진료일로 정해도 무리가 없다.

그렇게 되면 원화 정의 네트워크에서 함께 뽑아 훈련시킬 신입 한의사들도 일선에서 진료 할 기회를 빨리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한지호의 일상은 빈틈없이 빽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홍콩에 한의원을 내는 일도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박우식과 함께 잠시 홍콩 출장을 다녀온 그는 칭화 그룹의 수석 비서 재키 마와 실무 조율을 마쳤다.

최종적으로 한의원을 열 입지만 선정하면 된다.

한지호와 재키는 몇 곳의 후보지를 추렸고, 칭화 그룹에서 해당 후보지의 세입자와 건물주를 접촉해 결과를 알려주기로 했다.

홍콩에 한의원을 열게 되면 지금보다 더 바빠지게 될 것이 자명하다.

그런데 한지호는 또 하나의 직책을 더 맡았다.

보건복지부 정책 자문위원으로 위촉 받으며 활동을 하게 됐다.

그나마 평상시에 많은 일을 해야 하는 직책은 아니라서 부담이 크진 않았다.

보건복지부에서 도움을 필요로 할 때마다 자문을 해주는 명예직에 가깝다.

그래도 위촉을 받은 후 첫 정기 모임에는 참석하는 게 예의다.

전체 자문위원의 수는 20명 안팎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 한의학계를 대표하는 위원은 세 명에 불과하니 약간의 책임감도 느껴졌다.

한지호는 오전 진료를 문재영에게 맡기고 여의도로 향했다.

보건복지부는 세종시에 있지만 정책 자문위원들의 소재지를 고려해 국회 회의실에서 정기 모임이 열리기 때문이다.

“국회는 또 처음이네.”

의원회관 지하 주차장에 벤틀리를 세우고 나온 한지호가 소감을 중얼거렸다.

차를 몰고 지나다니면서 봤던 국회의사당의 위용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건축물이 웅장하고 멋있을 뿐 아니라 국회 경내에 감도는 분위기도 인상적이었다.

경찰과 경호원들이 곳곳에 서있었고, 의사당과 의원회관을 비롯한 각 건물 앞에는 국회의원을 모시는 차량들이 대기하고 있다.

사람들은 입만 열면 국회의원을 욕하기 바쁘지만, 막상 국회 경내에 들어오면 뭔가 다른 분위기에 압도당할 확률이 높다.

한지호도 관광객처럼 좌우를 이리저리 둘러보다 걸음을 옮겼다.

모임은 의원회관이 아닌 의사당에서 열린다.

의사당은 국회 하면 떠오르는 초록색 원형 지붕을 덮은 건물이다.

1층 입구로 들어서자 안내데스크 옆으로 검색대가 설치 돼 있는 게 보였다.

마치 공항 출입국 검색대를 연상시켰다.

“보건복지부 정책 자문위 모임에 참석하러 왔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한지호입니다.”

“잠시만요……. 네, 여기 서명 부탁드릴게요.”

안내데스크의 여직원이 리스트에서 한지호의 이름을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명을 하고, 검색대를 통과한 한지호는 곧장 회의실로 올라갔다.

의사당 내부는 상상 이상으로 넓지만, 보건복지위원회 회의실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한지호는 망설이지 않고 회의실 문을 열었다.

어엿한 정책 자문위원으로서 첫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다.

긴장이 될 법도 했지만 이상하게 침착했다.

끼이익-

문이 열리자 먼저 도착해 앉아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한지호를 쳐다봤다.

회의실 안에는 다섯 명밖에 없었다.

20명에 달하는 정책 자문위원들이 모든 모임에 참석하기는 힘들다.

모임이 있을 때마다 다섯 명 내외가 모인다고 했으니 올 사람은 거의 다 온 모양이다.

참석자 중에는 눈에 익은 사람도 있었다.

아니, 눈에 익은 정도가 아니라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조준혁.

위천 한방병원의 이사장인 그가 강렬한 눈빛으로 한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위원들도 한지호의 얼굴을 알아봤다.

최근 한의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인데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러나 한지호는 가볍게 목례만 하고 조준혁 쪽으로 걸어갔다.

“오랜만입니다.”

일부러 조준혁의 옆자리에 앉은 한지호가 입을 열었다.

피할 이유가 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조준혁도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지 않고 대답을 했다.

“오랜만인데 오랜만인 것 같지 않습니다. 워낙 여기저기에서 한 원장님 이야기가 많이 들리니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저는 제 이야기에 관심이 없어서.”

“양한방 협진으로 항암 치료에 새로운 장을 열고, 중국 진출의 출사표까지 던졌으며 서른 살의 나이에 보건복지부 정책 자문위원이 됐다. 이러니 다들 원화가 위천을 따라잡는 게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 수밖에 없겠습니다.”

조준혁은 묘하게 한지호의 신경을 긁었다.

블랙문 카지노에서의 내기 이후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다.

어쩌면 조준혁이 이번 모임에 참석한 것도 한지호를 보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위천 출신이 아닌 최초의 한의학계 정책 자문위원을 견제하려면 그가 직접 나서야 한다.

“이사장님, 원화는 위천을 따라잡을 생각이 없습니다. 전국에 방대한 지점을 두고 있는 위천을 어떻게 따라잡겠습니까. 우리 네트워크가 프랜차이즈 식당처럼 가맹점 늘리는데 혈안이 돼 있는 곳도 아니고.”

겸손을 가장한 날선 비판이다.

한지호는 위천 한방병원을 프랜차이즈 식당에 비유했다.

돈은 많이 벌겠지만 의료기관으로서 철학이 없다는 걸 비판한 것이다.

그야말로 정곡을 찌른 셈이었다.

하지만 조준혁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미 숱하게 비슷한 비판을 받아왔던 터라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이다.

“프랜차이즈 식당 같은 위천에게 잡아먹히게 되면 한 원장님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집니다.”

“두고 보죠. 누가 누굴 잡아먹게 되는지.”

서로를 쳐다보는 둘의 눈빛이 얽히며 불꽃이 튀었다.

진짜 불꽃이 튄 건 아니지만, 회의실 안의 다른 위원들이 입을 열기 힘들 정도로 팽팽한 긴장감이 생성됐다.

다들 의료계에서 한가락 하는 의사와 약사지만 한지호와 조준혁의 대화에 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고작 서른 살에 국민 한의사로 불리게 된 한지호, 그리고 믿기 힘든 사업 수완으로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한방 병원을 일궈낸 조준혁.

두 사람은 단순한 커리어만 대단한 게 아니었다.

온몸으로 내뿜는 존재감의 기세도 차원이 달랐다.

끼이이익-

그때 다시 회의실 문이 열리며 양성문 장관이 들어왔다.

넓은 원탁에 떨어져 앉아있던 자문위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국장급 직원과 함께 들어온 양성문은 온화한 얼굴로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바쁘신데 이렇게들 모여 주셔서 감사를 아니 드릴 수 없네요. 오늘은 특히 새로운 정책 자문위원이신 한지호 원장님께서 처음으로 참석하셨습니다. 대한민국 의료계를 이끌어 가시는 여러분들이 자문위를 통해 교류하며 좋은 관계를 맺으시길 바랍니다.”

양성문의 덕담으로 모임이 시작됐다.

보건복지부 소속 국장은 몇 가지 안건을 제시했고, 자문위원들이 돌아가며 자기 의견을 말했다.

특별히 딱딱하거나 어려운 모임은 아니었다.

자문위원들도 크게 준비를 해온 것 같진 않았다.

그저 보건복지부에서 추진하려는 정책에 대해 생각을 말하면 될 뿐이다.

한지호도 부담 없이 의견을 이야기했고, 의사와 약사출신 자문위원들의 말을 들으며 사고의 지평을 넓혔다.

그렇게 물 흐르듯 모임이 끝날 것 같았다.

한지호는 한의학계를 대표해서 국가 정책에 자문을 했다.

자부심을 느끼기 충분한 일이다.

매번 모임에 참석할 수는 없겠지만, 가능한 자주 나와서 책임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아주 많은 도움을 얻고 있어요.”

양성문이 모임을 끝내려는 듯 정리하는 멘트를 했다.

원래 장관이 자문위 모임에 참석하는 경우도 흔치 않다.

오늘은 직접 위촉한 한지호 때문에 특별히 시간을 내서 앉아있었던 것 같았다.

양성문은 자문위원들에게 각각 안부를 전하며 다음 모임에도 참석을 부탁한다는 말을 했다.

“조 이사장님도 오늘 와주셨네요. 늘 감사드리고 있는 것 아시지요?”

“네, 장관님. 이제 한의학계를 대표하는 자문위원으로 한 원장님이 들어왔으니 저와 우리 유우선 병원장님의 부담이 덜어진 듯 합니다.”

“그래도 위천 한방병원의 두 분께서 계속 많은 도움을 주셔야 합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당분간 자문위 모임에 참석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한동안 중국에 머무를 예정입니다.”

조준혁의 말에 한지호가 고개를 돌렸다.

양성문도 다소 놀란 표정으로 질문을 이어갔다.

“이사장님이 중국에 머무른다니요?”

“위천 한방병원의 새로운 지점이 홍콩에 들어서게 됐습니다. 해서 자문위 활동이 다소 어려워지는 점 미리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장관님.”

한지호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난데없이 위천 한방병원의 중국 진출이라니.

그것도 베이징이나 상하이가 아닌 홍콩이다.

누가 봐도 원화 한의원의 홍콩 진출을 저격하기 위한 노림수다.

한지호는 오뚝하게 솟은 조준혁의 콧날을 노려보며 탁자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위천과의 진짜 승부가 예상보다 빠른 타이밍에 시작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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