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47화 (147/255)

# 147

1장, 숙명적(宿命敵) (1)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사람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마치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인 것처럼 분위기에 휩쓸려 중심을 잃는 것이다.

유명세에 도취된 수많은 스타들이 망가진 이유가 바로 이와 같다.

하지만 한지호는 잠깐 반짝했다가 사라진 스타들의 전철을 밟지 않았다.

그는 협진 프로젝트의 성공과 중국 진출 발표로 대한민국을 뒤흔들었지만,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정돈 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예전에 이미 전국적인 관심의 주인공이 되어 봤기에 내성이 생긴 건지도 모른다.

사람은 잘 될 때도, 안 될 때도 있지만 언제나 자기중심을 지키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진리를 30살에 불과한 한지호는 몸으로 터득한지 오래였다.

“네, 이틀 뒤에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도 티케팅 해놓으셨죠?”

한지호는 신사동 오피스텔 아파트에서 강남 전경을 내려다보며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사무장 박우식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그는 흡족한 얼굴이었다.

박우식은 원화 정의 네트워크에서 공동으로 신입 한의사를 채용하고 훈련시키는 방안을 서류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홍콩 출장 준비까지 완벽하게 마쳐 놓은 상태였다.

“고생하셨습니다. 푹 쉬시고 내일 뵙죠.”

전화를 끊은 한지호는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중국 진출을 시도하기 위한 완벽한 타이밍이 주어졌으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양한방 협진으로 항암 효과를 보이자 한국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 미국에서도 협진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였다.

만약 돈을 들여 이만큼 홍보를 하려면 엄청난 거액을 써야 했을 것이다.

협진 프로젝트는 그에게 중국으로 가는 레드 카펫을 깔아준 셈이었다.

칭화 그룹의 수석 비서 재키 마와도 이야기가 잘 됐다.

한지호는 박우식과 함께 홍콩에 가서 재키를 만나 실무를 조율할 계획이었다.

칭화 그룹 회장 웨이 림의 이복 형인 림커창을 치료해준 대가를 받을 때가 왔다.

웨이 림은 홍콩의 요지에 한의원을 열 수 있게 도와주고, 무려 10년의 임대료를 대신 납부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사실 웨이 림의 약속만 믿고 홍콩에 한의원을 열었어도 됐다.

그러나 한지호는 완벽한 때가 오기를 기다렸고, 협진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며 자기 손으로 베스트 타이밍을 만들었다.

암을 극복한 한의사, 한국을 대표하는 한의사, 연예인보다 인기 많은 훈남 한의사 등 그를 설명하는 다양한 수식어가 중국 언론을 통해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옛말에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했다.

스스로 물꼬를 튼 한지호는 중국 대륙을 향해 노를 저을 일만 남았다.

장벽이 높기로 유명한 홍콩 의료계에서 자리를 잡는 게 쉽지 않겠지만,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슬슬 나가볼까.”

혼잣말을 읊조린 한지호가 옷방으로 걸어갔다.

휴일이지만 지난주와 달리 카페에서 편히 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옷방에는 다양한 브랜드의 제품이 종류별로 걸려 있었다.

TV에 종종 나오는 연예인의 옷방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한때는 옷 한 벌을 질리도록 교복처럼 입고 다녔던 한지호지만 이제는 명품 정장을 색깔별로 맞추는 처지가 됐다.

방송에 출연할 때도 협찬이 아닌 자기 옷을 입다보니 패션에 관심이 많아졌다.

그는 한 벌에 수백만 원이 넘는 이탈리아 브랜드의 셔츠와 가디건을 선택했다.

캐주얼하면서도 적당히 격식을 갖춘 세련된 스타일이었다.

한지호는 마치 소개팅이라도 나갈 것처럼 신경을 썼다.

물론 진짜로 여자를 만나기 위해 옷을 차려입은 건 아니었다.

그는 금쪽같은 휴일 하루를 소개팅보다 훨씬 중요한 자리에 쓸 것이다.

협진 프로젝트를 하며 인연을 맺게 된 Y대 암센터의 센터장 최규열이 주최한 모임에 초대를 받았다.

최규열은 한국 의료계에서 손꼽히는 거목이다.

보건복지부 장관이 선출 될 때마다 하마평에 오르내리는 인물이니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런 최규열이 협진 프로젝트를 총괄하며 한지호를 눈여겨 본 모양이었다.

따지고 보면 한지호가 유방 교수는 물론이고 최규열의 행보에도 힘을 실어줬다.

양한방 협진의 성공으로 최규열은 Y대 암센터에 굵직한 족적을 남기게 됐다.

센터장 직위를 이어가는데도, 혹은 더 좋은 자리로 이동하는데도 여러모로 도움이 될 업적이었다.

이처럼 만만찮은 업적을 쌓게 해준 장본인이 한지호인 셈이니 좋게 볼 수밖에 없었다.

한지호 역시 최규열과 계속 좋은 관계를 맺어서 나쁠 게 없다.

현대 의학과 한의학은 서로 다른 분야지만 의료계라는 거대한 틀 안에 묶인다.

사실 사회적으로 의사와 한의사는 견원지간(犬猿之間)이라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지호가 전례를 따를 필요는 없다.

최규열의 신뢰를 받으면 앞으로도 협진 프로젝트와 같은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이 높다.

의사에게도 믿음을 주는 한의사.

한지호는 한국에서 오직 그만이 얻을 수 있는 독보적인 타이틀을 욕심내고 있었다.

신경 써서 옷을 차려입은 그가 집을 나와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최규열이 또 어떤 사람들을 소개시켜 줄지 기대 됐다.

요즘 한지호에게는 마치 온 세상이 기회로 가득 찬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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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장소는 신도림에 위치한 쉐라톤 디큐브 호텔이었다.

호텔 41층의 로비 라운지는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명소다.

서울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명당이지만 이용객이 많지 않다.

조용하게 분위기를 내며 모임을 진행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1층에 내린 한지호는 깔끔한 인테리어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비교적 발전이 더딘 서울 서부 지역에 이렇게 멋진 호텔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분위기도 차분하고 좋은데? 자주 이용해야겠어.”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화려하지만 번잡한 강남의 최고급 호텔에 비해 조용하고 정돈 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곧이어 넓은 로비 라운지에 도착한 그는 한눈에 최규열이 앉아있는 자리를 찾아냈다.

창가 쪽 끝자리의 기다란 소파에 최규열과 다른 손님들이 앉아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한지호가 약속 시간에 늦은 게 아니다.

최규열이 일찍 도착해 먼저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것뿐이다.

“센터장님.”

성큼성큼 걸어간 한지호가 최규열을 불렀다.

고개를 돌려 한지호를 본 최규열은 주저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한 원장!”

그는 다소 과할 정도로 반갑게 한지호를 맞이해줬다.

Y대 암센터 안에서 보여주던 과묵한 태도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사적인 모임 자리이고, 이미 와인 몇 잔을 마셔서인지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먼저 소개를 하지. 다들 알다시피 여기는 원화 한의원의 한지호 원장이네.”

최규열과 함께 앉아있던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지호는 아직 누구인지 모르는 손님들에게 정중히 인사하며 명함을 건넸다.

모르긴 해도 Y대 암센터장과 동석할 정도면 사회 지도층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진 최규열의 설명은 한지호의 예상대로였다.

“한 원장, 여기 이 두 명은 우리 동기 중에서 제일 잘 나가는 친구들이야. 이쪽은 보건복지부에서 장관 하고 있는 양성문, 여기는 동성 건설 회장인 선운열이네.”

웬만한 VIP 앞에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한지호지만, 약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보건복지부 장관과 동성 건설 회장이라니.

한 명은 대한민국 의료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장관이고, 또 한 사람은 호남 지역을 꽉 잡고 있는 건설 회사의 주인이다.

이래서 다들 학연이 중요하다고 하는 모양이었다.

한지호는 최규열을 포함한 Y대 황금라인의 정점을 만나게 된 셈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원화 한의원의 한지호입니다.”

“TV보다 실물이 더 낫네? 일단 앉아. 앉아서 편하게 이야기 하자고.”

선운열이 걸걸한 목소리와 손짓으로 한지호를 앉혔다.

건설 회사의 오너답게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호탕한 것 같았다.

한지호가 자리에 앉자 양성문이 와인을 따라줬다.

“양한방 협진, 수고가 많았어요. 우리도 아주 주의 깊게 지켜봤습니다.”

그는 한참 어린 한지호에게 말을 놓지 않았다.

무려 보건복지부 장관이 따라주는 와인을 받은 한지호는 담담하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감사합니다, 장관님. 암센터에서 많이 도와주신 덕분에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최 센터장이 칭찬이 자자합디다. 내 살면서 저 친구가 한의사 칭찬을 하는 걸 보게 될 줄이야. 아무튼 만나서 반가워요.”

양성문이 잔을 들었다.

자연스럽게 최규열과 선운열, 한지호도 와인 잔을 들고 가볍게 건배를 했다.

“우리 의료계의 발전을 위하여.”

“참 건배사도 자네답구만, 자네다워!”

양성문의 말에 선운열이 툴툴거렸다.

편하게 농담을 주고받는 걸 보니 영락없는 오랜 친구 사이다.

어쨌거나 한지호를 포함한 네 명은 의료계의 발전을 위한다는 거창한 건배사와 함께 잔을 부딪쳤다.

인사를 나누고 건배를 했으니 나머지는 일사천리였다.

양성문과 선운열은 한지호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최규열이 보증하는 인물이고, 워낙 유명한 한의학계의 스타이기도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한지호의 태도 때문이다.

한지호는 다양한 성향의 VIP들을 만나며 어떤 태도를 갖춰야 하는지 익혔다.

지나치게 굽신거리며 아부해도 안 되고, 너무 거만하게 목을 뻣뻣이 세워도 안 된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되 부드러움과 여유를 겸비해야 한다.

차가움과 따뜻함을 동시에 내보여야 된다는 뜻이다.

말은 쉽다.

하지만 당당하면서 겸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한지호는 나이에 비해 다양한 경험을 쌓았고, 산전수전을 겪었던 규호의 기억까지 얻게 되면서 자연스레 선을 지키는 법을 터득하게 됐다.

20대, 30대에 그와 같은 태도를 보이는 사람은 거의 찾을 수 없다.

그렇기에 사회에서 잘 나가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어른들이 한지호를 직접 만나면 더욱 예뻐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한지호는 최규열이 만들어준 기회를 원래 자신의 것처럼 받아 먹고 있었다.

마치 오래 알던 사이처럼 양성문, 선운열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암센터에서 업무적인 이야기만 나눴던 최규열과도 한층 가까워졌다.

대화 주제는 무궁무진했다.

박학다식하기로 유명한 보건복지부 장관 양성문도 한지호의 입담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의료계 전반에 대한 이야기, 비즈니스와 투자에 대한 이야기를 거쳐 삼국지 이야기가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남자들이 여럿 모이면 거의 무조건 삼국지 이야기를 한 번은 하게 돼 있다.

연령대가 높은 남자들일 수록 확률은 더 높아진다.

최규열과 양성문, 선운열은 그 나이의 사람들이 다 그렇듯 학창시절 삼국지를 수없이 읽었다.

그러나 한지호가 해주는 흥미진진한 삼국지 이야기는 차원이 달랐다.

실제로 그 시대를 살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 재밌는 게 당연했다.

“한 원장, 역사에도 이리 해박할 줄 몰랐네.”

“그러게 말이야. 젊은 친구가 정말 대단하구만, 대단해.”

관도대전에 대한 색다른 해석을 들은 최규열과 선운열이 입을 떡 벌렸다.

둘은 의술만 뛰어난 줄 알았던 한지호라는 인물의 매력에 빨려드는 중이었다.

잠자코 있던 양성문은 더 놀라운 말을 꺼냈다.

“한 원장, 좀 갑작스럽지만 제안할 것이 있는데 말이에요.”

“아, 그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최규열은 미리 들은 말이 있는 듯 아는 척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진 양성문의 제안은 한지호의 눈동자를 커지게 만들었다.

“보건복지부의 정책 자문위원이 되어 줬으면 해서요. 지금은 의사와 약사들 위주고, 한의학 분야에서는 위천 한방병원의 유우선 병원장님과 조준혁 이사장님밖에 없는데……. 이 기회에 한 원장이 이름을 올리면 서로에게 좋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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