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10장, 대륙으로 (2)
긴 탁자 옆으로 원장들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상석이라 할 수 있는 자리는 가장 어린 한지호의 차지였다.
그가 위치 욕심을 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원장들이 그에게 상석을 권했고, 모임이 있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정착이 됐다.
다름 아닌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원장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한지호는 좌우에 각각 두 명씩 앉은 원장들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협진 프로젝트를 1차적으로 성공시킨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모임 분위기가 훈훈했다.
“한 원장님, 김금순 환자는 계속 좋은 컨디션을 보이고 있겠죠?”
“네. 얼마 전에 Y대 암센터에서 검사를 한 번 더 받으셨습니다. 꾸준히 수치가 개선되고 있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환자 본인이 체감하는 컨디션도 아주 좋습니다.”
“역시……. 협진 프로젝트의 성과가 발표되고 저희 한의원의 매출이 눈에 띄게 올랐습니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 소속이라는 것만으로도 환자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찾아온 것 같습니다.”
김 원장이 간증을 하는 것처럼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이에 질세라 최 원장도 증언을 거들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요. 협진 프로젝트가 시작된 주간, 그리고 김금순 환자가 퇴원하며 보도자료가 뿌려진 주간에 처음 내원하는 환자들이 엄청 늘었지.”
나머지 두 명인 박 원장과 이 원장도 비슷한 효과를 체감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지호는 더없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설립한 네트워크가 소속 한의원들에 도움이 되고 있으니 기분이 좋은 게 당연했다.
믿을 수 있는 한의원이 연합해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내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설립 목적이었다.
설립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원화 정의 네트워크는 환자들의 신뢰를 받는 브랜드로 성장하는 중이다.
물론 그 중심에는 국민적인 관심을 받으며 한의학계의 지평을 넓혀가는 한지호가 있었다.
한지호의 활약에 의해 덕을 많이 보니까 다른 원장들이 그를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한지호도 자신이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리더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다른 네 명의 원장들, 하다못해 부원장들까지 모두 한지호보다 선배지만 계급장이 무의미해진지 오래였다.
당연히 한지호가 리더라고 해서 우쭐대거나 거만하게 행동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네트워크에 소속된 한의원과 한의사들이 잘 되도록 책임감을 느끼는 측면이 더 크다.
그때 최 원장이 입을 열고 질문을 했다.
“우리 문 부원장은 잘 하고 있는지 궁금하네. 한 원장님에게 도움이 되어야 할 텐데 말이야.”
“이제 문재영 부원장님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습니다. 문 부원장님만 찾는 환자들도 생겼으니까요.”
“그게 정말인가? VIP만 받는 원화 한의원에서 문 부원장만 찾는 환자들이 생겼다고?”
“네. 실력이야 원래 좋았고, 제가 봐도 놀랄 정도로 환자들을 대하는 센스가 성장했습니다.”
“이거 배가 아프네, 배가 아파. 한편으로는 내 밑에 있을 때보다 잘 되는 것 같아서 좋기도 하고 말이야.”
“최 원장님께는 제가 매번 크게 쏴야죠. 문 부원장님을 보내주셨으니, 하하.”
한지호가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그는 최 원장을 볼 때마다, 아니 원화 정의 네트워크 원장 모임을 할 때마다 크게 한 턱 내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가끔씩 네트워크 소속 한의원에 특진을 나가서 홍보 효과를 증폭시켜줬다.
국민 한의사로 불리는 한지호가 직접 방문해 진료를 해준다.
그것만으로도 네트워크 소속 한의원들은 돈으로 따지기 힘든 홍보 효과를 누린 셈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계산을 떠나서 문재영 부원장을 흔쾌히 보내준 최 원장에게 고마운 건 진심이었다.
처음에는 단기 연수를 받는 부원장이었지만, 지금의 문재영은 원화 한의원을 받치는 기둥 중 하나가 됐다.
그가 없었으면 한의원을 비우고 홍콩에 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한지호는 사람을 키우는 것의 중요성을 문재영을 통해 배웠다.
안 그래도 부원장들을 더 뽑고, 연수를 활발히 시키는 논의를 하려던 참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우리가 동시에 새로운 인력을 선발해서 충원하고, 각 한의원에서 돌아가며 연수를 받게 하는 건 어떨까요. 최종 정착은 연수 과정에서 궁합이 잘 맞는 쪽을 찾으면 될 것 같습니다.”
“마치 대기업의 신입사원 선발 시스템처럼 들립니다.”
한지호의 아이디어에 박 원장이 관심을 보였다.
총 다섯 명의 네트워크 소속 원장 중에서 가장 말수가 적은 사람이 박 원장이다.
그가 말을 한 것 자체가 반가운 듯 한지호는 밝게 웃으며 설명을 계속했다.
“맞습니다. 여러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들도 직원 채용 방법이 천차만별입니다만, 그룹 차원에서 인사를 전담하는 곳도 있죠.”
“그룹 차원…….”
“그룹이 공통으로 신입 사원이나 인턴을 뽑고, 추후 알맞은 계열사에 배치시키는 방법입니다. 대학으로 치면 자유 전공제가 이와 비슷한 시스템이기도 합니다.”
다들 한지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는 표정이었다.
워낙 똑똑한 사람들이니 설명을 여러 번 할 필요가 없었다.
한의사 딱지만 달았지 둔한 사람들이었다면 한지호가 이 멤버로 원화 정의 네트워크를 만들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괜찮은 생각 같네. 우리가 다 같이 인재를 선발하고, 함께 훈련시켜서 가장 알맞은 곳에 배치하면 그보다 더 효율적일 수 없겠지.”
가장 연장자인 최 원장이 먼저 동의 의사를 밝혔다.
관심을 보였던 박 원장도 반대할 기색이 아니었다.
김 원장과 이 원장도 한지호가 제안한 색다른 인재 선발 방식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런 식으로 한의사를 뽑는 건 처음 들어봤지만, 나쁠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전국에 수십 개 지점을 가진 위천 한방병원도 시도하지 않은 일을 우리가 할 수도 있겠네요.”
한지호는 위천 한방병원이 언급되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위천은 폭발적으로 지점을 늘리며 전국적인 체인망을 갖추는데 집중했었습니다. 그 결과, 가장 유명한 한의원 프렌차이즈가 되면서 급성장했죠. 하지만 성장한 다음이 문제입니다. 위천 한방병원의 지점들이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내는 걸 보셨습니까? 그저 간판만 같이 달고 홍보만 하는 겁니다. 사업을 총괄하는 이사장과 원장만 떼돈을 벌고 있을 뿐, 그들은 소속 한의원의 발전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한지호는 지방에 내려간 조기운으로부터 지속적인 보고를 받으며 위천 한방병원을 분석했다.
아직 결정적인 약점을 찾아내진 못했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사장 조준혁이 위천을 기업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는 전국에 흩어진 지점들과 여러 한의사들의 성장에 관심이 없었다.
매출이 유지만 된다면 지점 운영에 관여하지 않았고, 빠른 확장으로 프렌차이즈 비용을 높이는데 집중했다.
물론 조준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유능한 사업가다.
하지만 병원이나 한의원 같은 의료기관은 비즈니스 마인드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
한지호는 조준혁이 놓치고 있는 빈틈을 치고들어갈 계획이었다.
뼛속까지 사업가인 조준혁은 알 수 없는 부분.
사람을 키우는데 투자하고, 병원을 병원답게 만들어가며 환자와의 진심어린 소통에 집중하는 네트워크.
원화 정의 네트워크가 그런 브랜드로 성장하면 규모는 작아도 골리앗인 위천 한방병원을 쓰러트리는 다윗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최 원장님도 그렇고, 다들 새로운 인력이 필요하던 차였습니다. 한 원장님도 문재영 부원장으로는 일손을 나누기 힘을 테니 이참에 실험을 해보는 것도 좋겠군요.”
박 원장이 그답지 않게 말을 오래했다.
한지호는 좌우에 앉은 네 명의 얼굴을 천천히 돌아봤다.
모두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그럼 공동으로 면접을 진행하고 연수를 하는 방안을 구체화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박 사무장님이 연락을 주시는 겁니까?”
“네.”
원화 한의원의 사무장 박우식은 네트워크의 총괄 이사를 겸하고 있다.
원장 모임에서 의논한 사안을 그가 구체적으로 검토해 문서로 작성한다.
무척 중요한 역할이고, 박우식 개인적으로는 완전히 부활한 셈이다.
사업이 망하고 영영 끝나는 줄 알았는데 황만금의 소개를 받아 사무장이 되는 기회를 잡았고,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네트워크의 총괄 이사까지 됐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자기 사업을 할 때보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이처럼 한지호는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사는데 집중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주위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
천사원 아이들은 말 할 필요도 없고, 조기운과 원화 한의원 지원들, 그리고 네트워크에 소속된 한의원까지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키우고 있었다.
혼자만 잘 나가는 보스가 아니라 같이 잘 나가는 리더가 되자는 게 한지호의 신념이다.
삼국지 시대를 수놓은 뛰어난 영웅들 중에서 극소수에게만 허락된 재능, 바로 군주지재(君主之才)를 갖춘 셈이다.
“이 이야기는 결정이 났고, 그럼 홍콩 이야기를 안 할 수 없겠군요.”
한지호가 화제를 바꿨다.
홍콩이라는 말이 나오자 네 명의 원장들이 일제히 눈을 부릅떴다.
안 그래도 오늘 모임에 참석하기 전부터 가장 궁금하던 안건이기 때문이다.
전화로 대충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듣는 것과 비교할 순 없다.
한지호는 수십 명의 기자들 앞에서 중국 대륙 진출을 선언했고, 협진 프로젝트의 성공에 이은 폭탄 발언으로 연일 뉴스를 장악하고 있었다.
한의학으로 중국에 진출할 거라니,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외국에서 동양 의학을 바라볼 때는 언제나 중의학을 원조로 취급한다.
한지호 역시 화타와 규호의 의술을 계승했기에 한(韓)이 아닌 한(漢)의학, 즉 중의학의 뿌리를 익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의 전통의학이 마냥 중의학의 아류인 건 절대 아니었다.
한지호는 기존에 배웠던 한의학과 전생을 각성하며 알게 된 의술을 두루두루 돌아보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
삼국지 이전 한(漢)나라 시대의 의술이 뿌리인 건 분명하지만, 한반도의 조상들은 독자적인 처방으로 새로운 학파를 만들었다.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안다는 동의보감의 허준 역시 한반도에서 의술로 창조와 혁신을 일으킨 장본인 중 한 명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한지호도 분명 한국인이다.
고대 중국에서 살았던 화타와 규호에게 빚을 졌지만, 그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한지호라는 그릇 안에서 잘 버무려진 한(漢)과 한(韓)의 의술은 대한만국의 유산이다.
그는 중국 대륙을 의술로 정복할 자신이 있었다.
확신이 없었다면 모두가 무모한 도전이라고 말릴 짓에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들이 만만치는 않다.
네트워크 소속의 다른 원장들도 그 부분을 염려하는 눈치였다.
“한 원장님의 실력이야 더 거론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분명 중국인들도 깜짝 놀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국, 특히 홍콩은 워낙 텃세가 심한 곳이지 않습니까?”
“콧대 높은 중국인들이 성형수술을 받기 위해 서울로 러쉬를 해오고 있습니다. 이런 말이 민망하지만, 한국에서 최고로 핫한 한의사인 제가 홍콩으로 진출하면 충분히 관심을 끌지 않을까요.”
“성형외과와는 조건이 다릅니다. 플라스틱 서저리, 코스메틱 파트는 현대 의학에 속합니다. 중국인들이 현대 의학에 자부심을 느끼지는 않습니다만, 그들은 전통의 것에 엄청나게 집착하는 민족입니다. 우리보다 더 심합니다. 중의학이 동양 의학의 원조라고 생각하는 중국 사람들이 한의원을 곱게 바라보겠습니까? 홍콩에서 실패하게 되면…… 한 원장님께서 그동안 쌓아왔던 좋은 이미지까지 실추될 수 있습니다.”
아마 오늘은 원화 정의 네트워크가 설립된 이후 박 원장이 가장 말을 많이 하는 날 같았다.
그의 지적은 타당했다.
전통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는 중국인들이 선뜻 한의원에 방문할 리 없다.
게다가 홍콩에서의 도전이 실패로 끝나면 연쇄 폭발이 일어날 것이다.
한지호가 한국에서 누리는 인기, 원화 정의 네트워크가 만들어온 신뢰가 휘청휘청 흔들릴지 모른다.
한국의 언론과 여론은 외국에서의 성과를 지나치게 중시하는 풍토가 있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박 원장의 충고를 가볍게 듣지 않았다.
이미 여러 번 머릿속으로 검토한 문제지만, 계속 듣고 또 들어서 마음에 단단히 새겨 놓아야 할 이야기다.
그러나 굳은 결심이 바뀔 리는 없었다.
한지호는 박 원장의 눈을 쳐다봤다.
이어서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최 원장과 김 원장, 이 원장과도 아이 컨택을 했다.
그는 눈빛에 자신을 향한, 아울러 원화 정의 네트워크를 향한 믿음을 담았다.
“중국 진출은 위천을 제압하는 비책입니다.”
“네?”
“한국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높은 성을 쌓은 위천을 무너트리기 힘듭니다. 따라잡는 게 최선이겠죠. 하지만 원화 한의원이 중국에서 성공해 돌아오면 위천이라는 성벽을 부술 공성병기를 얻는 셈입니다. 외국, 특히 중국에서의 실패가 위험한 만큼 성공은 절대적인 힘이 되지 않겠습니까? 한국에만 있어서는 얻을 수 없는 공성병기, 제가 대륙에 원화의 깃발을 꽂고 가져오겠습니다.”
그 옛날, 삼국지 시대에는 천하이분지계와 천하삼분지계가 있었다.
한지호는 중국 진출을 통해 한국에서까지 최고가 되겠다는 야망을 드러냈다.
막연한 꿈에 불과했던 한지호의 천하통일지계(天下統一之計)가 선포 된 것이다.
- 7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