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
10장, 대륙으로 (1)
Y대 암센터에서 발송 된 보도자료가 각종 언론사 데스크를 흥분시켰다.
공식 보도자료이기에 특종으로서의 가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신문사와 방송사에서 보도자료를 주요 뉴스로 다루었다.
국민적인 화제를 몰고 왔던 협진 프로젝트의 1차 성과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대서특필을 했고, 아나운서는 큰 목소리로 힘주어 뉴스를 전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수많은 국민들은 환호했다.
한동안 일체의 보도자료나 내부 정보가 나오지 않았기에 살짝 김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한지호와 Y대 암센터는 결과로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했다.
치료 과정에서 지나친 관심에 휘둘리지 않고 확실한 성과로 말을 대신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또 다시 영예롭게 9시 뉴스를 장식한 한지호는 명실상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한의사가 됐다.
물론 그보다 더 일찍 TV에 출연해 화제를 일으켰던 한의사들이 없지 않다.
위천 한방병원의 병원장인 유우선도 한 때 국내 최고의 한의사로 명성이 자자했었다.
요즘에는 위천 한방병원의 전국 프렌차이즈를 총괄하며 주요 VIP들만 진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스타 한의사의 계보를 따지면 유우선이 원조다.
유우선을 필두로 이슈의 중심에 섰던 한의사들이 몇 명 더 있다.
그러나 누구도 지금의 한지호와 비교할 만큼 자주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진 못했었다.
천하의 유우선조차 스타성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다이어트 한약을 시작으로 가짜 백수오 사건, 한약 협회와의 싸움, 그 과정에서 드러난 카지노 문제, 황태수의 아내를 무료로 치료해준 것 등등.
한지호는 언론과 대중이 열광할 일들을 단기간에 무수히 해냈다.
이제까지의 유명 한의사들과 달리 젊고 훈훈한 외모를 지녔다는 점도 플러스 요소였다.
그런데 이번에 결정타를 날렸다.
한의사가 암환자의 치료에 주치의로 참여했다는 건 역사적인 대사건이다.
과장이 아니라 대한민국 의료사에 기록 될 일이다.
민간에서 암을 치료했다는 이야기는 예전부터 꽤 많았다.
하지만 민간 치료는 아무리 대단해도 결국 야매 취급을 받을 뿐이다.
한지호는 민간 치료사들과 달리 Y대 암센터라는 국내 최고 의료기관의 인정을 받았다.
공식적으로 모든 진료 기록을 남기며 양한방 협진의 물꼬를 텄다.
그가 남긴 발자취는 양한방 협진과 항암 치료 분야의 크나큰 유산이 될 것이다.
벌써 텍사스 의대의 M.D 앤더슨 암센터에서 관심을 보인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M.D 앤더슨 암센터에서 대체의학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김의신 교수가 Y대 병원에 자료를 요청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국민들은 더욱 큰 기대감을 가졌고, 언론은 한지호의 인터뷰를 따기 위해 혈안이 됐다.
김금순의 퇴원 이후에도 언론 접촉을 자제해온 한지호도 이제는 입장을 밝힐 때가 임박했다.
그렇게 이슈가 집중 된 가운데 주말이 지나가고 있었다.
진료가 없는 일요일.
한지호는 선글라스를 끼고 동네 카페에 앉아 책을 읽는 중이었다.
얼마만에 여유를 즐기며 휴식을 취하는지 모른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놓고 카페 구석에서 소설을 읽는 시간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재밌네.”
한지호는 한 시간 넘게 뚫어져라 집중했던 소설책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고고학자라는 소설인데 나른한 일요일 오후를 흥미진진하게 만들어줬다.
그는 시원한 아메리카노로 목을 축이며 스마트 폰을 확인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가로수길이 아닌 세로수길 구석의 동네 카페. 여기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쉴 수 있다는 게 무척 만족스러웠다.
“기운이는 잘 하고 있고…. 그래도 지방에 너무 오래 둬서 미안하단 말이지.”
그는 조기운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입맛을 다셨다.
위천 한방병원의 실상을 파헤치라는 미션을 받은 조기운은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탐사를 하는 중이다.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사실 한지호는 김금순을 치료하며 조기운에게 서울로 돌아오라고 했었다.
그러나 조기운이 실마리를 찾았으니 시간을 더 달라고 부탁해서 어쩔 수 없이 내버려뒀다.
한지호는 1주에서 2주만 더 지켜보고 안 되면 강제로라도 서울에 데려올 마음을 먹었다.
조기운이 책임지던 청우단 판매량이 줄어든 건 큰 문제가 아니다.
다만 믿음직한 동생인 조기운을 평소처럼 가까이 두고 싶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너무 무리한 미션을 맡겼는지 모른다.
무턱대고 위천 한방병원의 전국 지점을 돌면서 문제가 될 요소를 찾아보라 했는데 누군들 쉽게 미션을 이루겠는가.
우웅-
조기운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다시 보던 소설을 읽으려는데 또 폰이 울렸다.
한지호는 책을 집으려던 손으로 방금 주머니에 넣은 폰을 꺼냈다.
“어?”
쿵!
심장이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실제로 그런 소리는 날 리가 없다.
하지만 진짜 가슴팍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을 생생하게 받았다.
스마트 폰 화면에 떠오른 이름 하나만 보고 순식간에 말이다.
<우리 지은이>
분명 그녀의 이름이었다.
동명이인일 가능성은 없다.
한지호가 저장해둔 그대로의 이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메시지 내용을 확인하려면 버튼을 누르고 스마트 폰 잠금을 풀어야 한다.
“후우…….”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는 것일까.
어떤 면에서는 진맥하고 침을 놓을 때보다 더 떨렸다.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잠금을 푼 한지호는 이지은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 또 진짜 멋진 일을 해냈더라. 뉴스 봤어. 사람들이 엄청 좋아하고 기대하는 것 같아. 한의사가 이렇게 국민들을 기쁘게 만들면 나 같은 연예인들은 어떻게 하라구 그래. 그냥 축하는 꼭 해주고 싶어서. 좋은 일 있을 때 축하하고 나쁜 일 있을 때 위로하고… 우리가 그럴 수는 있는 사이잖아? 축하해, 지호 오빠. -
그녀는 어떤 마음으로 이 메시지를 보냈을까.
한지호는 마치 이지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그가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놀리려다 멈칫했다.
뭐라고 답장을 보내는 게 좋을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평상시에는 그렇게 팽팽 회전하던 머리가 꽉 막힌 기분이었다.
“하아-.”
한지호는 답장을 보내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설령 연락을 이어나가 다시 만나게 된다고 해도 다른 결과를 만들 자신이 없었다.
이제야 이지은이 왜 울먹이면서 이별을 선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길고 긴 말을 꾹꾹 눌러담았다.
대신 짧은 답장을 보냈다.
- 고마워. 시간이 좀 더 지나면, 편하게 보자. -
메시지를 보내고 카페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헤어지던 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진짜 이별을 맞이한 것 같았다.
“나도 참. 우습다.”
한지호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한국 최초로 양한방 항암 치료를 성공시킨 주인공이 됐는데 메시지 하나에 마음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잠시 눈을 감고 스스로를 진정시킨 그가 책을 집었다.
그는 오늘만 아무렇지 않게 보내고 내일부터 미친 사람처럼 일에 몰두하기로 작정했다.
좀처럼 소설의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지만, 한지호는 오늘까지만 아파하겠다고 다짐했다.
+++
“다른 병원과 환자분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으니 정숙하게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곧 원장님께서 나오실 겁니다!”
사무장 박우식이 목소리를 높였다.
원화 한의원이 들어선 역삼 M 타워 앞에는 수십 명의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자세히 세어보지 않았지만 얼추 100명이 넘을 것 같기도 했다.
아침 일찍부터 역삼역에 모인 기자들은 한지호가 나온다는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괜히 소란을 피웠다가 그의 마음이 바뀌면 허탕을 치게 되기 때문이다.
가짜 백수오 파동 때도 많은 기자들이 M 타워로 찾아왔었다.
그렇기에 박우식은 비교적 수월하게 대처를 할 수 있었다.
역시 경험이 약인 법이다.
기자들의 숫자는 더 늘어났어도 한 번 겪어본 상황이기에 정리가 쉬웠다.
“어? 저, 저기!”
“한지호 원장님이다!”
조용해졌던 기자들이 다시 웅성거렸다.
병원 건물 안에서 한지호가 걸어나왔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기자들이 몰려와 한의원 안에 자리를 마련할 수 없었다.
기자들은 M 타워 정문에서 비껴난 곳에 우르르 몰려 있었다.
한지호는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는 쪽으로 재빨리 걸어갔다.
괜히 건물 입구를 막았다가 3층, 4층, 5층의 다른 병원에서 불만을 터트리면 할 말이 없다.
“한 원장님, 협진 프로젝트에 대해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김금순 환자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원장님, 여기도 좀 봐주세요!”
한지호가 등장하자 질서를 지키던 기자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협진 프로젝트가 세상에 알려진 이후 처음으로 한지호의 실제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자칫 분위기가 과열되면 병원 건물 앞이 난장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한지호는 바로 입을 열지 않고 한 손을 들었다.
쏴아아아아아-
오른손을 높이 든 그가 오금희의 기운을 뿜어냈다.
다섯 가지 각기 다른 오행의 기운이 그에게서 뿜어져나가 넓은 공간을 장악했다.
“기자분들을 만나러 나온 거니까… 조금 조용히 해주세요. 곧 예약 환자들이 도착 할 시간입니다. 소란이 일어나면 여러분 앞에서 서있을 수 없습니다.”
한지호가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그의 음성이 베테랑 기자 수십 명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다.
먼저 질문을 쏟아내기 위해 흥분하던 기자들이 거짓말처럼 온순해졌다.
알게 모르게 공기를 짓누르는 오금희의 내공, 그리고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한지호의 존재감이 기자들을 압도한 것이다.
“먼저 가장 궁금해 하실 협진 프로젝트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한지호는 기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한두 번 기자회견을 해본 솜씨가 아니다.
실제로도 기자들을 만나 굵직한 특종을 만들어준 횟수를 손가락으로 세기 힘들다.
그가 입을 열자 베테랑 기자들은 마치 EBS 수업을 듣는 고3 수험생처럼 집중했다.
“Y대 암센터에서 배포한 보도자료 내용처럼 김금순 환자님의 예후는 아주 좋습니다. 췌장 담도 암센터의 유방 교수님께서 수술을 훌륭하게 집도하셨고, 이후에는 제가 항암 대신 한의학 치료를 전담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김금순 환자님은 꾸준히 한의원으로 통원하고 계십니다. 꾸준히 Y대 암센터와 협력해서 한방 치료가 특정 조건에서는 기존의 항암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겠습니다.”
“수많은 암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셨는데요, 한의학 치료가 일괄적으로 항암 치료를 대신할 수 있을까요?”
한지호가 말을 마치자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기자가 잽싸게 질문을 했다.
무거운 분위기를 뚫고 먼저 입을 연 것으로 보아 경력이 오래 된 기자 같았다.
“그런 단정을 함부로 할 수는 없습니다. 새로운 치료법이 개발 되고, 많은 환자들에게 도입이 가능해지려면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저와 Y대 암센터는 양한방 협진으로 암을 이겨내는 길에 이제 막 첫 걸음을 뗐습니다. 앞으로 먼 여정을 함께 걸어가며 환자분들께 희망을 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섣부른 기대와 추측은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킬 수 있습니다. 기자분들께서도 신중하게 기사를 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빈틈없이 완벽한 정론이었다.
한지호는 기자들이 쓸 수 있는 멘트를 콕콕 집어 주면서도 오버를 하거나 말실수를 하지 않았다.
곧이어 다른 질문들이 튀어 나올 것 같았지만, 한지호가 선수를 쳤다.
“오늘은 협진 프로젝트와 별개로 중대 발표를 하려고 합니다. 아침부터 여기까지 와주신 기자분들께 제일 먼저 알리는 소식입니다.”
예기치 못한 중대 발표라는 말에 기자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마다할 일은 아니다.
협진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한의학계에서 독보적 영역을 구축한 한지호의 입에서 나오는 중대 발표다.
모든 기자들이 눈을 빛내며 귀를 쫑긋 세웠다.
“원화 한의원이라는 브랜드로, 한의학의 자부심을 품고…… 중국 대륙에 진출하겠습니다.”
“!”
강렬한 파문이 기자들을 덮쳤다.
너무 놀라면 말도 새어나오지 않는다.
한지호는 경악으로 물든 기자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흔들림 없이 우뚝 서있었다.
드넓은 대륙에 의술로 깃발을 꽂는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뤄 나갈 천하통일.
그 원대한 포부를 세상에 공표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