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7장, interactive (1)
“기회다.”
역삼 M 타워 옥상에서 한지호가 묵직한 혼잣말을 내뱉었다.
아무도 없는 옥상 아래로 역삼역 일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원화 한의원이 들어선 M 타워는 고층 빌딩은 아니다.
강남 일대에서는 20층짜리 건물도 고층 빌딩이라고 불리기 힘들다.
그러나 M 타워는 역삼역 바로 앞이라는 입지 덕분에 최상의 조망권을 갖고 있다.
한지호는 건물 옥상에서 남부럽지 않은 풍경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지리적 조건 때문에 신사동 오피스텔에서 내려 보는 풍경 못지않게 탁 트인 시야가 마음에 들었다.
“기회야, 기회.”
그는 다시 한 번 기회라는 말을 읊조렸다.
방금 전 제법 긴 이야기를 나눈 유방 교수가 Y대로 돌아갔다.
Y대 병원이 자랑하는 암센터의 주임 교수인 그는 한지호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하러 역삼까지 내려온 것이었다.
췌장암, 정확히 말하면 췌관선암 1기 판정을 받은 김금순 환자의 치료를 함께 하자는 제안이었다.
한지호가 췌장에 문제가 있음을 진단해서 진료의뢰서를 작성한 것부터 모든 과정을 언론에 공개하고, 공식적으로 Y대 췌장 담도 암센터와 원화 한의원이 협진을 하자는 것이다.
의사와 한의사의 사이가 극도로 나쁜 한국에서는 거의 시도 된 적 없는 일이다.
더구나 다른 병원도 아니고 Y대 암센터의 교수와 원화 한의원 한지호의 협진이다.
일이 성사되면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게 뻔했다.
Y대 내부, 특히 암센터 안에서도 유방 교수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 볼 것이다.
대학 병원 상부에 공식적인 협진 허가를 받는 것 자체가 난관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방이 제안을 한 건 의술의 지평을 넓히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그는 췌장 담도 암센터에서 조기진단 실패로 죽어가는 수많은 환자들을 지켜봐왔다.
뿐만 아니라 의사로서 한 끗 차이로 치료에 실패한 케이스를 한두 번 겪은 게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뭔가 다른 방법이 있었으면, 본인이 가진 의료 지식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해결책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지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드디어 돌파구가 보인 것이다.
예상 못한 방법으로 김금순 환자의 췌장암을 조기진단하게 만든 한의사가 있었다.
게다가 그 한의사가 TV에 출연하며 화제를 몰고 다녔던 한의학계의 젊은 아이콘이라 한다.
유방에게 이것은 천재일우의 기회로 생각됐다.
한지호에게만 기회인 것이 아니었다.
보수적이고 꽉 막힌 의료계 중심에서 고군분투해온 유방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꽉 잡겠다고 결심했다.
이번 기회에 한의학적 진단과 치료법에 대해 배우고, 늘 부족함을 느끼던 부분을 보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미국 의대들이 적극적으로 동양의 대체 의학 연구에 앞장서고 있는 상황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Y대 암센터와 원화 한의원이 손을 잡고 협진을 하면 한국의 항암 치료사에 한 획을 그을 것 같았다.
물론 개인적인 욕망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한지호에게 손을 내민 건 일종의 도박이다.
실패하면, 결과가 시원치 않으면 암센터 내부의 비판이 들불처럼 타오를 것이다.
최악의 경우 Y대 교수직을 내놓거나 지방으로 좌천당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만약 협진이 좋은 결과를 낸다면?
언론의 주목 아래에서 김금순 환자가 빠른 속도로 완치 판정을 받으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각종 매체들은 최초라고 해도 무방한 의학과 한의학의 교류를 집중 조명할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할 것이다.
암센터 내부에서 유방 교수의 입지도 이전과 비교 못 할 정도로 탄탄해질 터였다.
어쩌면 존스 홉킨스 의대나 텍사스 의대의 MD 앤더슨 암센터처럼 대체 의학, 특히 한의학을 이용해 항암 치료를 연구하는 부설 기관이 설립될지도 모른다.
당연히 유방 교수는 그 기관의 책임자 1순위로 거론 될 것이다.
의술에 대한 열망과 개인의 입신양명까지.
위험하긴 해도 유방 교수가 자신을 걸어볼 이유는 충분했다.
어차피 김금순 환자는 1기 상태에서 조기 진단을 받았다.
그만큼 완치 가능성도 높은 편이니 유방 교수가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 이보다 좋은 조건은 없다.
한지호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기진단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이후의 책임과 공로는 모두 항암 치료를 주관하는 의사의 몫이라고 생각했었다.
수술 치료가 필요한 경우에는 집도를 하는 주치의의 영향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암센터의 주임 교수인 유방이 먼저 손을 내밀었고, 한지호가 공식적으로 항암 치료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이제껏 수술 치료가 불가능해진 환자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약 치료를 통해 항암을 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하지만 모두 제도권 의료계 밖에서 일어난 일이다.
효과를 봐도 극단적인 예외로 취급받을 뿐, 의학적 성과로 인정받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Y대 암센터와 협진을 하면 모든 과정과 결과가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아 후대에 전해지게 된다.
부담도 크지만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일이다.
무엇보다 김금순 환자를 끝까지 책임질 수 있다.
국내 최고 수준의 암센터와 함께 진료를 하며 배우게 될 것도 적지 않을 터.
그런 경험과 지식은 한지호를 성장시키는 훌륭한 자양분이 될 것이다.
“흔들리지 말고 환자만 보자. 치료만 생각하는 거야.”
한지호는 옥상에 서서 스스로 다짐을 했다.
달콤한 열매들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게 사실이다.
협진이 확정되면 그 자체로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한몸에 받을 것이다.
국내 항암 의료 역사를 새로 쓰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들뜨지 않아야 한다.
치료 이후에 주어질 것들에 정신을 빼앗기면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처음도 환자, 마지막도 환자.
환자를 위하는 게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만 한다.
유방 교수의 제안도 김금순 환자가 한지호를 주치의로 강력히 원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환자만 생각하며 치료에 전념하면 나머지 부상은 저절로 주어지게 돼 있다.
한지호는 새삼 기회가 우르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위기가 올 때도 마찬가지다.
따로 따로 오지 않고 한 번에 몰아쳐서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는다.
기회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홍콩에서 림커창을 치료하고 어마어마한 기회를 손에 넣은 한지호에게 또 한 번 큰 기회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홍콩을 기점으로 중국 대륙에 진출하기 전, Y대 암센터와의 협진은 더 할 나위 없이 훌륭한 분기점이 될 것 같았다.
한국에서 Y대와 함께 항암 치료를 해낸 한의사라면 홍콩 사람들도 더욱 호기심을 보이지 않을까.
강남 전경을 내려다보는 한지호의 눈에 여러 열망이 담겨 있었다.
이제 화려한 강남도 그에게는 좁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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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선생님!”
김금순이 한지호의 손을 덥썩 부여잡았다.
2인실 병상에 누워있던 그녀는 한지호를 보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반가움이 무기력함을 이겨낸 것이다.
한지호는 그녀에게 양손을 붙잡힌 채 미소를 지었다.
“잘 지내고 계셨죠?”
“선생님 덕분에 조기 진단을 해서 입원을 했다 아입니까. 하마터면 췌장암이 있는지도 모르고 병을 키워서 죽을 뻔 했습니더.”
“그래도 안색이 좋아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본격적으로 항암 치료를 시작하믄 힘들어진다고 들었습니더. 선생님이 계속 저를 봐주시면 안 되는지예? 암도 선생님 아니었으면 못 찾았을 텐데 말입니더.”
김금순 환자가 간곡하게 사정을 했다.
그녀는 Y대 암센터보다 한지호를 더 신뢰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김금순이 허리 통증을 호소할 때 어디서도 원인을 찾아내지 못 했었다.
그런데 한지호는 췌장이 문제라는 걸 파악한 유일한 의사였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김금순 환자가 Y대 암센터 병실에 입원을 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찾으니 괜히 코끝이 시렸다.
“좋은 방향으로 김금순 환자님을 치료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잘 해보겠습니다. 마음을 편하게 먹고, 잘 쉬고 계세요. 아시겠죠?”
“항암 치료 들어가면 입맛이 뚝 떨어진다고 하던데예…….”
“그래도 잘 드시는 게 빨리 낫는 길입니다.”
“알겠습니더. 선생님도 꼭 이야기 잘 하셔서 계속 저를 치료해주셔야 합니더.”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한지호는 웃는 얼굴로 김금순을 꼭 안아주고 병실에서 나왔다.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보통 사람들은 절망감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김금순은 우려했던 것보다 상태가 좋아 보였다.
췌장암 1기에 조기 진단을 했으니 환자 본인도 완치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아는 듯 싶었다.
지긋지긋한 허리 통증이 췌장 때문이었고, 암만 이겨내면 요통도 사라질 거라는 희망 또한 김금순의 멘탈을 붙잡는 한 축이었다.
“환자 마인드가 좋아서 다행이야.”
짧은 병문안을 마친 한지호는 얼른 걸음을 옮겼다.
그가 대낮에 Y대 암센터로 온 건 단순히 김금순을 만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췌장 담도 암센터의 유방 교수와 협진하는 문제를 마무리 짓기 위해 직접 Y대를 방문한 것이다.
그는 암센터 내부의 교수 회의실로 향하고 있었다.
회의실 안에는 유방 교수를 비롯해 Y대 암센터의 과장 급 주임교수들, 그리고 센터장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한지호는 Y대 암센터의 의료진 앞에서 면접 아닌 면접을 봐야 한다.
대한민국 한의학계의 아이콘으로 부상한 그가 이제 와서 시험을 받을 처지는 아니다.
그러나 한지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Y대에서 한의학적 치료를 받아들여 협진을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센터장의 마음을 사로잡을 자신이 있었다.
시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인정받는 자리라고 생각하면 된다.
처억.
어느새 한지호가 교수 회의실 문 앞에 다다랐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약속 시간을 살짝 어겼다.
병실에서 김금순 환자를 만나고 오느라 3분 정도 늦은 것이다.
똑똑-
한지호는 가볍게 목을 좌우로 꺾으며 노크를 했다.
노크 소리가 울리자마자 회의실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들어오시오.”
췌장 담도 암센터 주임교수 유방의 음성이었다.
한지호는 그의 목소리를 바로 알아들었다.
이틀 전 원화 한의원에서 서로가 가진 의술에 대한 열망을 털어 놓으며 긴 이야기를 나눴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비해 지금은 목소리에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아무래도 공식적인 자리이다 보니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끼익!
한지호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갈무리하며 문을 열었다.
회의실 안에는 커다란 원탁이 놓여 있었다.
나란히 앉아 있는 교수들은 모두 네 명.
그리 적지도, 많지도 않은 딱 적당한 숫자다.
보통 학과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네 명에서 다섯 명 정도가 모여 회의를 한다.
Y대 암센터 산하의 췌장 담도 암센터와 원화 한의원의 협진을 결정하는 자리에도 그와 비슷한 수의 교수들이 모인 것이다.
“다들 아시겠지만, 원화 한의원의 한지호 원장님입니다.”
유방이 다른 교수들에게 한지호를 소개했다.
한지호는 원탁 앞에 서서 교수들을 쳐다봤다.
과하지 않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 그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환자를 치료할 때, 혹은 힘을 써야할 때 나오는 전투 모드가 발동 된 것이다.
‘중앙이 센터장. 그 옆에 두 명은 누군지 모르겠지만, 오늘 내 목표는 한 명이다. 센터장, 센터장.’
한지호는 속으로 센터장이라는 말을 곱씹었다.
센터장은 Y대 암센터의 대소사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다른 교수들도 그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센터장이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원화 한의원의 한지호입니다.”
한지호가 직접 자기 이름을 밝혔고, 그에 따라 암센터 교수들도 통성명을 시작했다.
면접 같은 분위기지만 사실은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의견을 나누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바쁠 텐데 여기까지 와주느라 수고가 많았어요, 한 원장님. 나는 우리 Y대 암센터의 센터장을 맡고 있는 최규열이라 해요.”
백발이 성성한 교수가 조곤조곤 자기소개를 했다.
Y대 암센터 센터장 최규열.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내과의 전설 중 한 명은 의외로 부드러워 보였다.
뒤이어 유방을 제외한 다른 두 명의 교수들도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췌장 담도 암센터의 김기준입니다.”
“방사선 종양학과의 박상욱입니다. 현재는 암 지식정보센터를 맡고 있지요.”
이만하면 Y대 암센터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구색은 갖춘 셈이다.
센터장과 당사자인 유방 교수가 포진해 있고, 같은 췌장 담도 암센터 소속이지만 소화기내과 전공인 김기준 교수가 균형을 맞췄다.
게다가 항암 치료와 관련된 모든 데이터베이스를 수집하고 관리하는 암 지식정보센터의 박상욱 교수도 자리했다.
여기서 내려지는 결정이 곧 Y대 병원 암센터의 공식적인 입장이 될 것이다.
한지호와 암센터의 교수들은 인사를 나누며 서로 탐색전을 마쳤다.
“시간 끌 것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보시지요. 한 원장님, 우리 대학 암센터가 김금순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원화 한의원과 협진을 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해주겠어요? 유 교수의 의견을 들었지만, 나와 다른 교수님들을 설득하려면 한 원장님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가 아주 중요할 것 같군요.”
센터장 최규열이 포문을 열었다.
원로 의사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그는 부드럽게 제 할 말을 다 하는 스타일이었다.
한지호는 그가 깔아준 멍석을 사양하지 않았다.
작정을 하고 왔으니 멍석 위에서 진가를 드러내 볼 요량이었다.
국내 항암 치료의 새 장을 열기 위한 한지호의 프리젠테이션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