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37화 (137/255)

# 137

6장,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 (2)

Y대는 우리나라 의대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다.

그곳의 교수들이 얼마나 대단한 권위를 누리는지 외부인은 짐작도 하기 힘들다.

대학 병원 안에서 과장급 교수는 독립 국가의 왕이나 다름없다.

영토의 사이즈는 작아도 교수가 되면 동일 학과 의사들을 하인처럼 부려먹을 수 있다.

그렇기에 어디를 가서도 뻣뻣한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일반 사람들이 의사에 대해 가지고 있는 나쁜 편견은 대부분 대학 병원 교수들이 만든 것이다.

대단한 실력자들이지만 동시에 엄청나게 거만한 권위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인을 Y대 교수라고 밝힌 유방은 체면을 내려놓았다.

의사가 한의사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건 의료계에서 상상 할 수 없는 일이다.

질문도 보통 질문이 아니었다.

대학 병원에서 밝혀내지 못한 사실을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다.

한지호가 Y대에서 해내지 못한 진단을 성공했다고 인정한 것이다.

“듣고 있는 것이오? 대체 어떻게 췌장암을 진단했는지 물었소.”

유방이 대답을 재촉했다.

어지간히 심각하게 궁금한 모양이었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은 의사라면 그럴 수도 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경지의 의술을 접했을 때 호기심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물론 대부분의 의사나 교수들은 매너리즘에 빠져 새로운 의술이나 기법이 나타나도 심드렁하지만 말이다.

“유 교수님, 질문에 답하기 전에 제가 먼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한지호는 유방의 의도를 파악하고 차분하게 대응했다.

순수한 의도의 의학적 열망을 보이는 사람이라면 나쁜 인물은 아닐 것 같았다.

“무엇이오?”

“췌장암은 조기에 발견하는 게 어려워서 사망률이 높지 않습니까. 김금순 환자님은 1기에 발견이 됐으니 희망적인 상태라고 봐도 되겠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 상태에서 확진을 했으니 수술 후 경과가 좋을 걸로 기대되고 있소.”

“Y대 병원의 공식적인 입장이라 봐도 되겠습니까?”

“그렇소. 이제 내 물음에 대답을 해주시오.”

“췌장암이라고 확신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김금순 환자가 호소하는 요통의 근원이 허리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MRI에도 문제가 없었고, 침으로 진단을 했을 때도 허리가 아플 여지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통증이 허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비롯됐을 거라는 생각……. 거기까지는 이해가 가지만 췌장을 정확히 지목해서 진료 의뢰서를 쓴 건 어떻게 가능했소?”

“유 교수님, 처음 통화로 인사드리는데 제 밑천까지 가져가시려는 것 아니신지요.”

한지호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완곡하게 돌려 말했다.

그는 유방이 정말 Y대의 교수인지 신분도 정확히 확인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할 리는 없겠지만 아무튼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이다.

진단을 내리는 과정에서의 근거들을 일일이 알려줄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닌 것이다.

그제야 유방도 자신의 결례를 파악한 듯 사과를 해왔다.

“아, 미안하게 됐소. 검사 결과와 진료 의뢰서의 내용이 딱 맞아 떨어진 것이 너무 신기해서 그만…….”

“괜찮습니다. 의학에 대한 열정이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그럼 바쁘겠지만 한 번 만날 수 있겠소? 김금순 환자는 계속 원화 한의원에서 치료 받기를 강력히 원하고 있고, 췌장암을 가장 먼저 진단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한 원장님께 조언을 듣고 싶기도 해서 말이오.”

이만하면 Y대 교수로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말이었다.

세상에 어느 대학 병원 교수가 젊은 한의사에게 조언을 듣고 싶다고 말하겠는가.

하지만 유방은 다른 교수들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자신의 의학적 한계를 인정하고, 벽을 뛰어 넘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 같았다.

한지호는 전화기 너머로 느껴지는 유방의 맹목적이면서도 순수한 모습이 싫지 않았다.

의대는 물론이고 한의대에도 권위를 내세우며 체면 차리기에 급급한 교수들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한지호에 의해 추락한 김영찬 교수다.

그에 비하면 유방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교수는 신선하기 짝이 없었다.

나이는 많아도 의술을 향한 집착 아닌 집착에서 여전한 젊음이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저도 유 교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김금순 환자님의 치료와 관련해서 나눌 말씀이 많을 것 같습니다.”

“좋소! 미루지 말고 바로 날을 잡는 게 어떻겠소. 한 원장님 말대로 환자의 치료가 달린 문제이니 말이오.”

“저는 오늘 진료가 끝나고 저녁 시간도 괜찮습니다.”

“내가 저녁에 원화 한의원 근방으로 가겠소. 오늘 보십시다.”

유방 교수는 무척 적극적이었다.

Y대 병원은 신촌에 있다.

강북에서 원화 한의원이 있는 역삼동까지 내려오는 건 쉽지 않다.

특히 퇴근 시간에는 지옥의 정체길이 열린다.

그럼에도 유 교수는 한지호를 만나고 싶은 생각에 이것저것 가리지 않았다.

한지호 입장에서도 거부 할 이유가 없었다.

췌장이 문제라는 정확한 진단을 해냈지만, 한의학적 치료만으로 암이라는 절체절명의 질병과 맞서 싸우기는 힘들다.

김금순의 완쾌를 위해서는 수술을 집도할 주치의와 긴밀하게 협력을 해야 한다.

물론 항암 치료를 주관하는 콧대 높은 의사가 한의사와 손을 잡을 확률은 매우 맞은데, 유방은 먼저 손을 내밀어왔다.

한지호는 하늘이 김금순을 돕는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원화 한의원에 오지 않았다면 췌장암은 계속 진행됐을 것이다.

2기, 3기를 넘겨 발견되면 생존률이 극도로 낮아진다.

한지호를 만나서 1기에 췌장암을 조기 발견한 것, Y대 교수가 한지호의 진단에 경의를 표하며 조언을 구한 것 모두 김금순에게 호재(好材)였다.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은 한지호는 잠시 숨을 골랐다.

담담하게 통화를 했지만 심장은 제법 거세게 뛰고 있었다.

‘맞았어. 이번에도 내가 맞었어!’

발견하기 쉽지 않은 1기 췌장암을 진단해낸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다.

허리 통증에서 시작 된 병명(病名) 추적 끝에 진범을 잡아낸 것이다.

쓰라린 이별의 아픔 덕에 실마리를 얻었지만, 결과적으로 한지호의 실연이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리게 될지도 모른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의 아픔이 다른 사람에겐 생명 연장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인생사는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고, 오늘의 선택이 어떤 내일을 불러올지 감히 짐작하기 힘든 것이리라.

한지호는 그저 씨익 웃었다.

이지은은 그녀와의 이별이 김금순이라는 여성에게 엄청난 기회가 됐음을 알고 있을까.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면 오늘 이야기를 꼭 해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결심하니 심장을 짓누르는 것 같았던 납덩이의 존재가 조금은 가벼워진 듯 했다.

한지호는 간호사실에 다음 환자를 올려 보내라는 사인을 보내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 나쁘지 않은 나날이었다.

+++

유 교수는 약속을 지켰다.

정말 진료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원화 한의원으로 찾아온 것이다.

Y대 의대의 교수가 직접 방문하니 오히려 한의원 직원들이 놀랐다.

한지호는 마지막 환자의 진료를 보는 중이었고, 사무장 박우식이 유 교수를 맞이했다.

“죄송합니다. 원장님께서 아직 진료를 보고 계십니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아, 물론 그래야지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유방 교수는 정중한 태도를 보이며 1층 대기실 의자에 앉았다.

학과장 급 교수답지 않게 거만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원화 한의원의 럭셔리한 인테리어가 신기한 듯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모습도 소탈해 보였다.

“사무장님, 원장님께 알려 드릴까요?”

안내 데스크의 이주희가 최고급 용정차를 준비하며 박우식에게 질문했다.

그래도 대학 교수가 찾아왔는데 한지호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하지만 박우식은 고개를 저었다.

“진료 중간에 따로 말씀을 드릴만한 일은 아니니까 그냥 기다립시다. 원장님께서도 그 편이 편하실 테고, 교수님도 기다리겠다고 하셨으니.”

“네. 그럼 다과만 드릴게요.”

박우식은 과연 한지호의 마음을 잘 아는 수족다웠다.

한지호는 웬만큼 급한 일이 아니고서는 진료 시간에 방해 받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Y대 의대의 교수가 찾아왔다고 해도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

박우식도 한지호를 따라 한층 대범해진 것 같았다.

그사이 이주희가 다른 VIP 환자들에게 서빙 되는 용정차와 한과를 대접했다.

유방은 병원에서 이런 서비스를 받는 게 낯선지 어색해하는 모습이었다.

그가 대기실에서 엉거주춤 한지호를 기다린지 10분쯤 지났을까.

오늘의 마지막 환자가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왔다.

한지호의 진료가 끝났다는 뜻이다.

박우식은 데스크에서 진료비 결제를 맡으며 이주희에게 지시를 내렸다.

“주희 씨, 원장님께 유 교수님 오신 것 말씀드리세요.”

“네, 사무장님.”

이주희가 2층으로 올라갔다.

1층의 터줏대감인 코디네이터들은 상담이 진료보다 먼저 끝났기에 이미 퇴근을 한 뒤였다.

이윽고 한지호가 이주희와 함께 내려왔다.

그는 대기실에 앉아있는 유방을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얼굴을 처음 보지만 이주희에게 설명을 들었기 때문이다.

“먼 길 오셨습니다. 한지호입니다.”

“아, Y대 취장 담도 암센터 간담췌외과의 유방이오.”

두 사람은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서양의학과 한의학이라는 갈래는 달라도 연배로 따지나 경력으로 따지나 한지호가 한참 후배다.

그렇지만 유방은 섣불리 반말을 하지 않고 한지호를 존중했다.

단순히 한지호가 잘 나가는 한의원의 원장이고, 매주 TV에 나오는 한의학계의 유명 스타여서는 아니다.

그보다 김금순의 병을 진단해낸 의술을 인정하기 때문에 나이 차이를 초월해 동등한 의료인으로 대우를 하는 것이다.

한지호는 통화를 할 때부터 유방의 조심스러운 태도를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반쯤은 마음을 열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한다.

유방이 먼저 권위를 내려놓았으니 한지호도 그의 선의를 순순히 받아들이기 쉬웠다.

“바쁘실 텐데 여기까지 와주시고,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시간을 내주었으니 내가 더 고맙소.”

“그럼 위로 올라가셔서 이야기를 나누실까요?”

“그럽시다.”

한지호는 박우식에게 먼저 퇴근하라는 눈빛을 보낸 후 유 교수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의 간호사들도 퇴근 준비를 마친 다음 내려갔고, 박우식과 이주희도 금방 길을 나설 것이다.

환자들로 성시를 이루던 원화 한의원이 고요해졌다.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을 찾기 힘들 것 같았다.

“사실 말이오……. 내가 한 원장님에게 전화를 걸고, 이렇게 찾아온 게 알려지면 반기지 않을 사람들이 많을 것이오.”

“Y대 암센터에는 출중한 분들이 많으시니, 유 교수님께서 한의사인 저에게 조언을 구하는 걸 달가워하지들 않겠지요. 이해합니다.”

한지호는 콧대 높은 대학 병원 내부의 질서를 모르지 않았다.

한의대 내부에도 비슷한 분위기가 형성 돼 있고, 알게 모르게 서로를 배척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지면 학과장 급 주임교수인 유방은 대단한 용기를 낸 셈이었다.

이런저런 계산보다 의술에 대한 열망이 더 강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췌장암을 조기에 발견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오. 조기 진단을 못해서 췌장암의 사망률이 그렇게 높은 것이 아니겠소?”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원장님은 김금순 환자가 호소하는 요통이 췌장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냈고, 덕분에 조기 진단을 가능하게 만들었소. 평소 한의학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내 상식을 뛰어 넘는 일이 벌어진 것이오.”

말을 계속할수록 유방의 목소리가 커졌다.

의술 이야기에 열정을 담는 걸 보니 그가 요즘 세상에 찾아보기 힘든 진짜 의사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와 닿았다.

“운이 따르기도 했습니다.”

“운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소. 그래서 한 원장님께 중요한 제안을 하고자 여기까지 온 것이라오.”

Y대 췌장 담도 암센터의 주임 교수가 할 수 있는 제안이 어떤 것일까.

한지호는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곧이어 유방이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국의 경우 텍사스 주립대, 애리조나 주립대, 미네소타 주립대에서 대체 의학을 가르치며 한의학을 연구하고 있소. 세계 최고의 의대라는 존스 홉킨스에서는 대체 의학 대학원 과정을 신설했고 말이오.”

“미국에서는 서양 의학과 동양 대체 의학 사이의 상호 교류가 활발하다고 하더군요.”

“단순한 교류 정도가 아니라오. 텍사스 의대의 MD 앤더슨 암센터(MD Anderson Cancer Center)는 우리나라의 한방 의학을 연구하며 실제 치료에도 적용하고 있소. 정작 한국에서는 의사와 한의사들이 대립하며 서로를 욕하기 바쁜데 말이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번 기회에 한 원장님과 내가 그 안타까운 현실에 경종을 울려 보십시다.”

“정확히 어떤 그림을 구상하고 계십니까?”

감을 잡은 한지호가 눈을 빛냈다.

Y대의 주임 교수가 잡담이나 나누러 러시아워를 뚫고 강남까지 오진 않았을 것이다.

유방은 작심한 듯 자신의 목표를 털어놓았다.

“김금순 환자는 계속 한 원장님이 주치의가 되기를 원하고 있는 상황이오. 허나 아시다시피 수술 치료도 반드시 필요하오. 만약 우리가 함께 손을 잡고 김금순 환자의 췌장암을 치료하고, 외부에도 이를 적극적으로 알리면 어떻겠소?”

어쩌면 국내 의료계 전체를 뒤집어 놓을 수 있는 발언이었다.

한지호와 유방,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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