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36화 (136/255)

# 136

6장,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 (1)

연인과 헤어질 때, 이별의 고통을 느낄 때,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 아픈 것이지만 마치 진짜로 심장이 아픈 것처럼 느껴진다.

김금순도 마찬가지다.

죽겠다고 엄살을 부리는 그녀는 원인 모를 허리 통증을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요통(腰痛)이 진짜가 아니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통증 자체가 거짓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마음과 심장을 착각하는 것처럼, 다른 곳이 아픈데 허리가 아프다고 느끼는 것일 수 있다.

허리라는 부위에 집착했던 것이 실수였다.

보통 환자들은 통증이 발생 되는 부위를 정확히 알고 있다.

자기 몸 어디에서 아픈 감각이 느껴지는지 모를 가능성은 극히 낮다.

그러나 소수의 예외적인 케이스도 존재한다는 걸 언제나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대학 병원 의사들, 그리고 한지호마저도 병명을 밝혀내지 못한 것은 김금순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이지은과 헤어지는 순간,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사소하지만 큰 깨달음을 얻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진료실에 앉아있는 그는 치료로 이별의 아픔을 잊으려는 듯 무섭게 집중하고 있었다.

‘허리 통증의 원인을 파헤치려고 하니까 답이 안 나올 수밖에 없었어. 김금순 환자의 요통은 본질이 아니다. 본질을 찾아야 해, 본질을.’

세상의 수많은 문제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겉과 속이 다르다.

질병이라고 해서 항상 겉과 속이 똑같다는 법은 없다.

겉은 통증이고, 속은 원인이다.

한지호는 머릿속으로 인체 해부도를 떠올리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어디가 뿌리일까? 어디서 시작된 통증이기에 김금순 환자가 요통이라고 확신하게 됐을까…….’

몇 가지 단서가 있다.

우선 허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기관의 문제일 것이다.

명치 아래와 둔부까지가 한계다.

그 범위를 벗어난 기관에서 통증이 발생했다면 환자 본인이 요통이라고 착각할 리 없다.

두 번째 단서는 죽겠다는 소리가 나오게 할 만큼 통증이 강렬하다는 사실이다.

엄살이 섞였더라도 김금순은 정말 아파하는 게 분명했다.

때때로 통증이 심해지면 누워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드러난 두 가지 단서만 놓고 봐도 의심되는 병이 몇 개로 좁혀진다.

허리 통증이라는 안개를 걷어냈으니 다시 김금순을 진료하면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그녀는 매일 원화 한의원에 들러 통증을 줄이는 침을 맞고 있었다.

그동안 뾰족한 진단을 내리지 못했던 한지호는 드디어 돌파구를 찾은 기분이었다.

비록 그 계기가 가슴 아픈 이별이라는 게 아쉬울 따름이지만, 실연 후유증에 빠져 환자를 외면할 순 없다.

한지호는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오늘의 진료 스케줄을 확인했다.

김금순 환자는 오후 두 시에 예약이 돼 있다.

그가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면 평소처럼 진통 효과를 내는 침만 맞고 갔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뭔가 다를지 모른다.

원인 모를 통증의 뿌리를 찾아낼 가능성이 보였다.

일찍 한의원에 출근해 진료 준비를 마친 한지호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인연을 잃어버린 아픔도 환자를 향한 그의 열정을 식게 만들지는 못했다.

한지호는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실연을 극복해나갈 것 같았다.

헤어졌지만 이지은에게 부끄럽지 않은 남자가 되는 길은 이것밖에 없다.

그는 흔들리는 멘탈을 꽉 붙잡고 남자답게 이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

꾹- 꾸욱-

한지호가 누워있는 김금순의 복부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눌러봤다.

척추 기립근이나 둔근 등 허리 부근의 근육에 문제가 없다는 건 이미 확인했다.

그는 오늘도 변함없이 허리 통증을 호소하는 김금순을 진정시키며 이런저런 테스트를 하고 있었다.

“구토나 소화 불량 증세는 없었나요?”

“가끔씩 속이 불편하긴 해도… 허리가 아프기 전부터 늘 그래 왔습니더.”

“구토는 어떻습니까?”

“최근에 토를 한 기억은 없습니더.”

“음.”

예상과 다른 대답이었다.

하지만 실망하긴 이르다.

한지호는 김금순의 통증이 허리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명치 아래에서 둔부 위라는 명확한 범위.

강렬한 통증을 유발한다는 특징.

두 가지 확실한 단서가 있는 이상 지겨운 스무 고개도 곧 끝이 날 것이다.

“김금순 환자님, 제가 좀 민망한 질문을 할 건데 정확하게 대답해주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더. 선생님이 물어보시는 건데 당연히 말씀을 드려야지예.”

“통증이 느껴진 이후로 변 색깔을 확인하신 적이 있습니까?”

“변? 똥 말씀하시는 거지예?”

“네. 회색에 가까운 색이 나오지는 않던가요.”

“가끔 가다가 색이 좀 그런 거 같아서 이상했는데… 매번 색을 보는 건 아니라서…….”

김금순이 누운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답을 들으니 회색변 증상이 아예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한지호는 눈을 날카롭게 뜨고 다음 질문을 이어 나갔다.

“체중도 조금 감소되고 있죠?”

“예, 선생님. 입맛이 없는 건 아닌데 허리가 아픈 뒤로 몸무게가 좀 빠졌습니더.”

“황달 기운도 심하진 않지만 예후가 보이고.”

한지호의 말대로 김금순의 얼굴은 미세하게나마 노랗게 떠 있었다.

피곤이 심해지면 누구나 약간의 황달 증상을 보일 수 있다.

그것 하나로는 무엇도 유추할 수 없다.

하지만 여러 조각들이 맞춰지면 하나의 큰 그림이 완성되는 법이다.

한지호는 김금순의 통증과 증상, 예후로 퍼즐을 맞추고 있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들으세요.”

그가 누워있던 김금순을 일으켰다.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자리에 앉은 김금순이 한지호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 역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원인을 찾을 수 없던 통증에 대한 해결책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지호의 입에서는 기대와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허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이유 때문에 통증이 발생한 것이고, 요통으로 착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랍니까, 선생님? 허리 통증이 아니고 착각이라니예? 매일 허리가 아파서 잠도 못 자는 사람한테 무슨……!”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는지 김금순의 언성이 다소 높아졌다.

환자들은 의사를 신뢰하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느낌을 더 믿는다.

분명 허리가 아픈데 착각이라는 말을 들으니 순간적으로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한지호는 김금순의 반응을 예상한 듯 부드럽게 말을 받아 넘겼다.

“허리가 아닌 다른 곳의 문제입니다. 그곳에서 발생 된 통증을 요통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대체 어디가 문제라는 건지 시원하게 말씀 한 번 해주시지예.”

“췌장입니다. 제가 진료의뢰서를 써드릴 테니 복부 초음파를 받아 보셔야겠습니다.”

뜬금 없으면서도 충격적인 말이었다.

한지호는 어렵게 내린 진단에 자신이 있는 듯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 못한 진단 결과에 당황한 건 김금순이었다.

그녀가 말을 더듬으며 물음을 던졌다.

“췌, 췌장 때문에 허리가 아픈 거라고예?”

“정확한 진단은 복부 초음파를 받으면 나올 겁니다만, 저는 90% 이상 췌장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그 췌장암……?”

“아니, 아닙니다. 그렇게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한지호가 재빨리 김금순의 말을 끊었다.

환자에게 필요 이상의 불안감을 주는 건 치료에 도움이 안 된다.

“췌장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른 증상 등을 미루어 보아 설령 췌장암이라 해도 중기 이후로 진행됐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아시다시피 췌장암은 조기 발견이 어려워 문제가 되는 것이지 초기에 진단해내면 완치가 가능합니다. 아무튼 하루라도 빨리 확실하게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진료 의뢰서를 써드리면 병원 측에서도 급히 검사 일정을 잡아줄 겁니다.”

“아, 알겠습니더.”

김금순은 일시적 패닉 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위나 간, 폐 등은 평소에도 신경을 쓰지만 췌장을 염두에 두는 사람은 거의 없다.

TV 드라마에 췌장암이 단골 질병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다들 이름 정도를 들어봤을 뿐이다.

아무튼 한지호는 허리 통증이라는 위장막을 걷어내고 나름의 진실을 찾아냈다.

그의 진단이 맞을지, 아니면 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원인 불명의 요통과 싸워야 할지는 머지않아 알게 될 것이다.

한지호는 김금순이 곧바로 복부 초음파 검사를 받을 수 있게 신경 써서 진료 의뢰서를 작성했다.

이런 경우에는 확진을 위해 서양 의학의 첨단 기술이 필요하다.

환자의 건강이 달린 일에 괜한 자존심을 내세울 필요 따위는 조금도 없다.

어차피 대학 병원에서는 통증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고, 한지호가 췌장이 문제라는 해답을 찾아낸 것이다.

복부 초음파 결과 한지호의 진단이 맞는 걸로 드러나면 서양 의학과 한의학 중 적절한 치료법을 선택하거나 병행하면 된다.

우선은 예상치 못한 깨달음 덕에 한 고비를 넘겼다.

어떤 의미에서 한지호는 김금순보다 더 복부 초음파 결과가 빨리 나오기를 기다리게 될 것 같았다.

+++

“네, 조 간호사님.”

한지호는 진료실 책상 위에 놓인 내선 전화를 들었다.

수석 간호사인 조민주가 전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원장님, 찾으시는 전화가 있는데 연결해 드려도 될까요.”

“5분 뒤에 다음 환자가 들어올 겁니다만. 보통 진료 중에는 외부 전화 연결하는 경우가 없었는데, 급한 일인가보죠?”

한지호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던졌다.

아직 오늘의 일정이 끝나지 않았다.

잠깐 틈이 나서 지난 차트를 뒤적이고 있었을 뿐, 엄연한 진료 시간에 외부 전화를 연결한 적은 거의 없었다.

진짜 급한 연락은 한지호의 개인 스마트 폰으로 오기 마련이다.

한지호는 조민주가 아무 전화나 연결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궁금해졌다.

“저 그게… 대학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라서요. 김금순 환자님의 검사를 담당한 대학 병원 교수님께서 원장님과 통화를 하고 싶으시다고…….”

“김금순 환자의? 알겠습니다. 다음 환자분께 조금 더 기다려 달라고 양해를 구해주세요. 전화 연결해주고.”

“네, 원장님.”

한지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김금순의 검사 결과가 나온 모양이다.

그녀는 내내 허리 통증을 호소했지만, 한지호는 췌장에 문제가 있을 거라며 진료 의뢰서를 써줬었다.

췌장이라는 확실한 목표를 두고 복부 초음파 검사를 하라고 했으니 한지호의 진단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금방 드러날 것이다.

자신감이 있지만 긴장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만약 복부 초음파 검사에서 췌장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나왔다면, 한지호는 개망신을 당하게 되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김금순의 신뢰도 잃어버릴 게 분명했다.

환자 한 명을 놓치는 게 원화 한의원 운영에 타격을 입히지는 못한다.

하지만 경영자가 아니라 한의사로서 오진으로 환자를 잃는다는 건 자존심에 금이 가는 일이다.

뚜-뚜-

얼마간 연결음이 들리더니 전화기 너머에서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 아. 이거 연결된 건가?”

“네, 원화 한의원의 한지호 원장입니다.”

“아! 맞구만. 처음 인사드리겠소. Y 대학 병원의 유방 교수요.”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유 교수님.”

한지호는 무척 독특한 이름에 웃음이 나올뻔 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전화 통화여서 망정이지, 얼굴을 보고 있었다면 웃음을 참느라 일그러진 표정이 들켰을 것이다.

통성명을 마친 유방 교수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실례라는 것 잘 알고 있지만, 한 가지만 묻고 싶어서 전화를 했소.”

“편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어떻게 알았던 거요?”

“네?”

“검사 결과 김금순 환자는 췌관선암 1기 상태였소. 대체 이것을 어떻게 알고 진료 의뢰서를 써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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