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
5장, 아픔을 딛고 (2)
우웅- 우웅-
김금순의 허리를 보며 고민을 거듭하는데 때마침 스마트 폰이 진동을 토해냈다.
진료 시간에는 무음으로 바꿔 놓는데 오늘은 깜빡한 것이다.
그나마 진동이 짧게 울리고 멎는 걸 보니 전화가 아닌 메시지가 온 모양이었다.
한지호는 김금순 환자의 허리에서 침을 회수하며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낭패감이 들었다.
이런 기분을 느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TV에서 보니 못 고치는 병이 없는 것 같아서 어렵게 왔는데예…… 어쩌면 좋습니까, 선생님?”
환자의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원화 한의원에서도 요통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면 더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환자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탓이었다.
하지만 마냥 당황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자신을 믿고 시간을 내서 찾아온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다.
“김금순 환자님.”
“예.”
“우선 시술실로 가서 허리 부위의 통증을 줄이는 침을 놓겠습니다. 진통 효과는 있겠지만, 일시적인 방법이라 본질적인 치료는 아닙니다.”
“그러면 진짜 치료는 안 되는 거 아닌가예?”
“솔직히 당장 확답을 드리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한지호는 그럴 듯한 말로 환자를 속이지 않았다.
사실 의사가 작정하면 궁지에 몰린 환자들의 심리를 조종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다.
그러나 한지호는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소통하는 것이 왕도라고 생각했다.
설령 그 과정에서 신뢰를 얻는 게 힘들어져도 의사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다.
“이제부터는 따로 예약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요통의 원인을 찾을 때까지 매일 진료를 하겠습니다. 혹시 매번 한의원을 찾아오실 시간이나 상황이 되십니까?”
“남는 게 시간입니더. 근데 진짜 매일 와도 되는지……. 선생님 억수로 바쁜 분이고, 여기 예약 기다리는 환자들이 줄을 서있다 아닙니까.”
“김금순 환자님은 특별 케이스입니다. 부담 갖지 마세요. 요통의 원인을 찾아낼 때까지 진료비도 받지 않겠습니다. 진단을 해야 치료가 시작되는 것이니까요.”
한지호는 특별한 사명감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었다.
한국을 넘어 홍콩에서도 신기에 다다른 의술을 입증하고 왔다.
그런 한의사로서 일종의 호승심을 느낀 셈이다.
물론 엄살인지 진짜 고통을 느끼는 건지 모를 김금순이 더 이상 갈 데가 없다는 걸 알기에 최선을 다하고 싶기도 했다.
“우선 시술실로 가서 조금만 기다리고 계세요. 진통 효과를 내는 침을 놓아드리겠습니다.”
“예, 선생님. 고맙습니더.”
“인사는 치료를 완벽하게 해내고 난 다음에 받겠습니다.”
표정은 부드러웠지만 한지호의 말투는 무척이나 단호했다.
반드시 김금순이 느끼는 허리 통증의 원인을 찾아내 완치를 시키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당장 진단에 실패했어도 진정성으로 환자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다.
사실 이익만 생각하면 굳이 어려운 치료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홍콩에 원화 한의원을 열 계획을 세우고, 비교적 고치기 쉬운 환자들을 치료하며 매스컴에 홍보를 때리면 그만이다.
그럼 대다수의 언론이 국민 한의사가 중국 진출을 한다고 떠들썩하게 조명해줄 터였다.
하지만 한지호는 사업가이기 전에 한의사라는 걸 잊지 않았다.
비즈니스 마인드도 중요하지만, 환자 한 명 한 명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초심을 잃으면 한낱 장사꾼이 되고 만다.
거창한 대의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도 명색이 화타의 의술을 이었으면서 장사꾼이 될 수는 없었다.
똑똑-
“김금순 환자님. 시술실로 모셔드릴게요.”
호출을 받고 진료실로 온 간호사 이해나가 노크를 한 뒤 문을 열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김금순은 다시 엄살인지 진짜인지 모를 신음을 흘리며 시술실로 이동했다.
한지호는 진료실에 혼자 남아 깊은 고민에 빠졌다.
“통증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어. 디스크도, 근육통도 아닌 그 원인이 대체 뭘까?”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맞이한 환자 김금순의 증상이 이토록 난해한 미션이 될 줄은 몰랐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민을 하던 한지호는 문득 스마트 폰을 쳐다봤다.
김금순과 이야기를 나눌 때 진동이 울렸던 게 기억났다.
그는 시술실로 나가기 전 폰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메시지가 와있었다.
- 지호 오빠, 우리 생각할 시간을 좀 가지는 게 좋겠어. -
이지은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그녀가 보낸 짧은 문장이 한지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생각할 시간을 갖자.
커플들이 헤어지기 전에 주로 하는 말이다.
홍콩에서 갑자기 첸의 호출을 받고 그녀를 남겨뒀던 게 떠올랐다.
이지은과 한지호 둘 다 워낙 바쁜 사람들이라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홍콩에서의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 같았다.
한지호는 어떻게 답장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후우우-.”
그저 긴 한숨만 나올 뿐이다.
마음 같아선 당장 전화를 걸어 이지은을 만나러 가고 싶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남아있기에 한의원을 비울 수 없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홍콩에서 엄청난 성과를 내고 돌아온 한지호에게 예상 밖의 일들이 주어지고 있었다.
한지호는 답장을 하려다 말고 폰을 내려놓았다.
진료실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쓸쓸해 보였다.
+++
둘만의 아지트에 들린 것도 오랜만이다.
한강 잠원 지구와 반포 지구 근교의 카페는 예전부터 이지은이 아지트로 애용하던 곳이다.
한지호가 그녀와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도 단 둘이 만났던 장소였다.
카페의 사장님은 오늘도 별 말 없이 진한 드립 커피를 내려줬다.
만약 사장님의 입이 조금만 가벼웠다면 진즉 한지호와 이지은의 열애설이 터졌을 것이다.
하지만 손님도 별로 없는 카페의 사장님은 언제나처럼 둘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국민 여동생과 국민 한의사를 못 알아볼 리 없는데도 말이다.
“여기도 오랜만이네.”
한지호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 잔을 앞에 두고 입을 열었다.
맞은편에는 모자를 깊게 눌러쓴 이지은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맑고 큰 눈동자가 모자 챙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이지은은 말없이 두 손으로 커피 잔을 만지고 있었다.
길고 하얀 손가락의 움직임이 애처로워 보였다.
홍콩에서 제대로 데이트를 즐기지 못하고 급작스럽게 헤어진 후 처음 만난 것이다.
며칠 전 이지은이 생각할 시간을 갖자는 메시지를 보냈고, 한지호는 그게 무슨 뜻인지 캐묻지 않았다.
누가 봐도 헤어짐을 암시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평소와 달리 무거운 분위기가 두 사람을 짓누르고 있었다.
“오빠.”
“알아, 무슨 말 할지.”
한지호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이지은이 말을 다 하도록 놔두면 진짜 둘의 관계가 끝날 것 같았다.
그는 진심을 다해 그녀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다.
“홍콩에서 그렇게 가 버린 거. 정말 미안해. 미안하다, 지은아. 나라도 화났을 거야.”
“중요한 일이었다면서.”
“조만간 원화 한의원을 홍콩에도 열게 됐어. 그날 일을 잘 해결한 덕분에.”
“축하해…….”
“포기할 수 없는 기회였어. 앞으로 내가 더 잘할게. 홍콩보다 더 좋은 곳으로 같이 여행가자. 스케줄도 맞출게.”
“단순히 홍콩에서 일 때문에 이러는 건 아냐, 지호 오빠.”
이지은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달싹였다.
한지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 마음이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커피 잔을 만지던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작정을 하고 나온 듯,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나도 바쁘고, 오빠도 바쁘고. 처음엔 그게 좋았어. 내가 바쁜 걸로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오빠한테는 나보다 일이 더 중요한 것 같아. 내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우습지만, 나도 여자라서 그런 게 자꾸 서운해져.”
“…….”
한지호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지은의 솔직한 속마음 앞에서 다른 변명을 하기 힘들었다.
“어느 순간 겁이 나기 시작했어. 이러다 내가 다른 여자들처럼 오빠한테 짜증내고, 화내고, 토라지고 그러면 어떡하지? 서로가 서로의 좋은 모습만 보면서 만났는데, 우린 서로를 좋아하면서 또 존경하고 있는데 그게 다 깨지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이 들었지 뭐야.”
“다… 내 잘못이다.”
“누구 잘못도 아냐. 내가 이기적이라서 이런 걸지도 몰라.”
“우리 둘 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면 안 되겠어?”
한지호가 마지막으로 이지은을 붙잡았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다만 그녀를 이대로 놓치기 싫다는 것만은 진심이었다.
이지은이 단지 어리고 예쁜 연예인이기 때문은 절대 아니다.
그녀는 때론 한지호보다 더 성숙하고 지혜로웠고, 밝은 에너지를 퍼트리고 다닌다.
한지호는 이별이 가까이 다가온 순간 새삼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달았다.
“지호 오빠. 난 정말 오빠에 대한 이 마음, 그리고 우리의 좋은 기억이 망가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아. 하지만 지금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기다려주다가 점점 지치게 될 거야.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거, 오빠도 알잖아?”
“마음을 굳히고 나왔구나.”
“정말, 정말 많이 좋아해. 그러니까 여기까지…… 했으면 해.”
기어코 헤어지자는 말이 나왔다.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 나온 말이 한지호의 심장을 후벼팠다.
한지호는 어떤 말로도 이지은의 결심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감정이 식어서, 화가 나서, 그런 이유로 헤어지자는 게 아니었다.
이지은의 말처럼 누구의 잘못도 아닐지 모른다.
그저 두 사람 모두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큰 꿈을 쫓아가며 산다는 게 잘못이라면 잘못일 것이다.
이대로 계속 만나면 서로를 힘들게 한다는 걸 한지호도 모르지 않았다.
어쩌면 언젠가 다시 인연이 닿을 수 있어도 지금은 멈춰야 할 때다.
한지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에 무거운 납덩이를 올린 기분이었다.
스윽-
그가 천천히 팔을 뻗었다.
이지은의 모자를 벗긴 한지호는 예전처럼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하얀 볼을 어루만졌다.
곧이어 손가락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이지은이 소리 내지 않고 흘린 눈물이 손끝에 닿은 것이다.
“고맙고, 미안해. 니가 내 여자였다는 거 잊지 않을게.”
“바빠도 건강 잘 챙겨.”
“의사가 아프면 환자들 볼 면목이 없지. 걱정하지 마. 너도 밥 잘 먹고.”
“응. 나 먼저 일어설게.”
“차는?”
“매니저 불렀어.”
한지호와 이지은은 마치 내일 다시 볼 것처럼 담담하게 마지막일지 모를 인사를 나눴다.
다시 모자를 쓰고 자리에서 일어선 이지은의 두 뺨 위로 계속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조심해서 들어가, 지은아.”
“잘 지내, 지호 오빠.”
이지은이 애써 등을 돌리고 카페 밖으로 걸어나갔다.
한지호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망부석처럼 의자에 파묻혀 앉아있었다.
붙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았고, 떠나는 마음이라도 편하도록 자연스레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슬픈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만 힘겹게 참아내는 중이었다.
의학적으로는 말이 안 되지만, 진짜 심장 부근이 아팠다.
누가 돌덩이를 올려놓고, 그러고도 모자라 칼로 가슴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지금 느껴지는 이별의 고통은 가짜가 아니다.
다만 마음이 아픈 것인데 마치 진짜 심장이 아픈 것처럼 느껴지는 것뿐.
“!”
불현듯 어떤 깨달음이 한지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별의 아픔을 느끼는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의학적인 성찰을 한 것이다.
방금 전의 깨달음을 계기로 김금순 환자를 진단하는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지은은 떠나는 순간까지 한지호에게 많은 것을 남겨주었다.
한지호는 그녀의 해맑은 미소를 떠올리며 오래도록 카페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