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5장, 아픔을 딛고 (1)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 걸음이 이보다 더 가벼울 수는 없었다.
물론 홍콩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오지는 않는다.
비행기, 그것도 당연하게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고 편안하게 귀국했다.
하지만 이코노미 클래스가 아니라 좁디좁은 만원 버스를 타고 서울까지 왔어도 기분이 좋았을 것 같다.
2박 3일의 출장에서 믿기 힘든 성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홍콩에 원화 한의원을 열 수 있고, 들어가는 비용도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기대를 뛰어넘는 수확이기에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월요일 저녁 시간에 도착해 하루를 푹 쉰 한지호는 금방 베스트 컨디션을 되찾았다.
화요일의 해가 떠오르고 역삼동으로 출근하는 길도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오늘따라 강남에 차도 덜 막히는 것 같았다.
한지호는 새삼 자신이 두 손으로 잡고 있는 자동차 핸들을 쳐다봤다.
핸들 중앙에 알파벳 B가 날개를 단 모양이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었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벤틀리를 타고 강남 신사동에서 역삼동으로 출근하는 아침.
한지호는 아침 드라마 주인공이나 누릴 것 같은 비현실적 라이프 스타일을 살아나간다.
시간이 지나면 신사동에서 역삼동이 아니라 홍콩에서 서울을 오가며 글로벌한 일상을 영위할 것 같았다.
“좋다……. 더 열심히 살아야지.”
그는 차창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느끼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주어진 것들에 항상 감사하며 동시에 더 큰 꿈을 쫓아가는 삶.
한 번의 기회를 통해 180도 달라진 자신의 삶이 참 마음에 들었다.
원활하게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운 한지호는 꾸물거리지 않고 1층으로 올라갔다.
어제 한의원이 어떤 분위기였는지 얼른 보고를 받고 싶었다.
홍콩 출장을 가는 김에 실험적으로 문재영 부원장에게 하루 진료를 맡겼다.
이미 부원장 진료를 환자들에게 공지 했고, 평소보다 진료비도 낮게 책정했지만 혹시 컴플레인이 걸리지는 않았을까.
괜한 걱정과 기대가 교차했다.
겨우 하루지만 문재영이 자기 몫을 잘 해냈다면 앞으로도 종종 부원장 진료를 활성화 시킬 계획이었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에 소속된 다른 한의원에 특진을 나가고, 홍콩까지 진출하려면 믿음직한 부원장의 서포트가 절실하다.
과연 문재영은 한지호의 신뢰를 받은 만큼 문제없이 월요일 하루를 보냈을 것인가.
“어?”
한지호는 1층 로비를 지나 한의원 출입문 앞에서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많이 이른 시간이다.
그렇기에 아무도 출근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출입문이 벌써 열려 있었다.
한지호보다 먼저 출근해서 한의원에 나온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스으으윽-
카드 키를 인식시킬 필요 없이 자동문이 좌우로 열렸다.
토요일 오전까지 진료를 했지만, 월요일을 비워서인지 모던하고 럭셔리한 1층 대기실 풍경이 공연히 반가웠다.
“1층은 아니네?”
대기실과 상담실에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의원 내부의 안내 데스크 역시 주인 없이 비워져 있었다.
한지호는 계단을 거슬러 2층으로 올라갔다.
원장실 옆 진료실, 그곳에서 한지호보다 일찍 출근한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끼익-
문을 연 한지호는 예상하지 못한 얼굴을 확인했다.
진료실 안에 앉아있던 사람도 놀란 눈치였다.
“부원장님.”
“아… 원장님, 무사히 다녀오셨습니까?”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숙인 건 다름 아닌 문재영이었다.
어제 하루 한지호를 대신해 원화 한의원을 지켰던 그가 가장 먼저 나온 것이다.
“왜 이렇게 일찍 출근했어요? 어제 진료 보느라 피곤할 텐데.”
한지호의 물음에 문재영이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비교적 내성적인 편에 속하는 그는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혹시 실수한 게 있는지 싶어서요. 어제 기록한 차트를 검토하면서 복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부원장님, 나한테 잘 보이려고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아, 아닙니다. 정말 그런 게 아니라 제 처방에 100% 확신이 없어서…….”
“하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이런 자세 아주 좋아요. 나도 배워야겠는데요.”
한지호는 유쾌하게 웃으며 엄지를 치켜 올렸다.
진료와 처방을 마쳤다고 해서 의사의 역할이 끝난 것은 아니다.
차트를 확인하며 혹시 오진이 없었는지, 더 나은 처방은 없을지 고민하는 것 까지 의사의 몫이다.
문재영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었다.
이런 태도라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어제의 한의원 분위기가 짐작이 됐다.
미심쩍은 마음으로 부원장 진료를 받은 환자들도 대부분 만족했을 것이다.
부드럽고 꼼꼼한 문재영은 한지호와는 또 다른 스타일로 환자들의 신뢰를 사기에 충분했다.
한지호는 손짓으로 문재영을 자리에 앉혔다. 그리곤 자신도 맞은편 의자에 앉아 질문을 던졌다.
“어땠어요? 혼자서 원화 한의원 진료를 맡았던 소감은.”
“처음엔 긴장도 되고, 환자분들 앞에서 말도 더듬었지만… 간호사님들이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뭐가 제일 부담이었어요?”
“다른 곳과 달리 원화 한의원은 VIP 전문이라서 그만한 값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크게 들었습니다. 부원장 진료가 원장님 진료보다 많이 저렴하지만, 그래도 일반 한의원보다는 훨씬 고가이니까요. 과연 내 진료와 처방에 그런 가치가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계속 했습니다.”
“난 문 부원장님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어요. 자신감이 없다고 평가할 수도 있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낮은 자세로 임하는 것. 나에게는 부족한 면이기에 보완이 되는 느낌도 들고.”
“아닙니다. 정말 제가 부족해서 확신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계속 환자들 진료를 맡으면서 그 확신을 채워나가요. 경험이 쌓이고 여유가 생겨도 지금 같은 마음은 잃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명심하겠습니다, 원장님.”
문재영은 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듣는 모범생처럼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는 많아도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순수하고 순진한 모습이 한지호를 웃게 만들었다.
“그럼 오늘도 잘 부탁합니다, 부원장님.”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른 아침, 원화 한의원을 지키는 두 명의 한의사가 서로를 격려하며 환자들을 받을 준비를 했다.
한지호가 홍콩과 그 너머의 중국 대륙을 바라보느라 바빠져도 문재영이 든든히 버티고 있는 한 원화 한의원의 명성에 금이 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오랜 옛날, 삼국시대의 군주들은 외연과 내치의 딜레마에서 고뇌를 했었다.
외연을 확장하는데 집중하면 영토 내부의 살림과 규율이 무너지고, 내치에만 신경을 쓰면 국력이 답보 상태에 머물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외연과 내치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까지 다른 지역에 한의원을 열지 않아서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근거 없는 만용과는 거리가 멀다.
한지호는 자신의 능력을, 그리고 자신을 믿고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힘을 믿었다.
홍콩에서 돌아온 다음날, 희망찬 새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
“아이고오-! 죽겠네, 죽겠어. 아이고오오!”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곡소리를 하는 환자가 나타났다.
환자를 데려온 조민주 간호사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수석 간호사로 어지간한 경험은 다 해봤지만, 이 환자의 반응은 그녀마저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수고했어요, 조 간호사님.”
“네, 원장님.”
한지호는 조민주에게 눈을 찡긋거려준 후 진료실로 들어온 환자를 쳐다봤다.
60대를 넘긴 할머니다.
사실 요즘 시대에 60대를 할머니라고 부르기도 애매하다.
염색을 했는지 몰라도 새까만 머리칼에 화장을 짙게 한 환자는 정정해 보였다.
대체 무슨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 곡소리를 내는 것일까.
한지호는 환자에게 자리를 권하며 모니터에 떠오른 차트를 살펴봤다.
“안녕하세요, 김금순 환자님.”
“선생님, 내가 허리가 너무 아파 죽겠십니더.”
“상담 하시면서 제출하신 타 병원 진료 기록을 봤는데…… 대학 병원에서 CT와 MRI 촬영을 하셨네요.”
“했지예. 큰돈 들여서 검사 다 했지예.”
“검사 결과는 아무 이상 없음으로 나왔군요.”
“대학 교수라는기 천하의 돌팔이였습니더. 비싸고 번거로운 검사만 시키고, 계속 아파 죽겠다는디 문제가 없다고 진통 주사나 놔주고 말입니더.”
김금순 환자가 강한 사투리 억양을 자랑하며 대학 병원 흉을 봤다.
주치의였던 교수의 험담을 시작하자 아픈 것도 잊은 듯 했다.
한지호는 심각한 얼굴로 다시 한 번 차트를 검토했다.
‘아무 문제가 없는데…….’
대학 병원의 검사 기록은 클리어했다.
김금순 환자의 험담과 달리 대학 병원에서 검사를 대충 할 리는 없다.
무엇보다 검사는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한다.
결과를 검토하는 건 의사의 몫이지만, 교수 정도 되는 사람이 오독을 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상하네요. 디스크가 없어도 요통이 심각하면 작은 실마리라도 검사에 잡혀야 정상인데. 제가 한 번 보겠습니다. 뒤로 돌아앉아서 옷을 걷어주세요.”
한지호가 김금순 환자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얼른 의자를 돌리고 윗옷을 걷었다.
얼굴은 할머니처럼 안 보여도 속살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그래도 홍콩에서 치료했던 림커창의 꺼칠한 피부와 비교하면 양반 중의 양반이다.
한지호는 손을 뻗어 김금순 환자의 허리를 어루만졌다.
MRI로 판독되지 않는 허리 통증은 근육통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손끝으로 근육 상태가 정상적인지 알아내기는 힘들다.
화타의 진전과 규호의 의술을 계승했다고 해도 뭐든지 가능한 의술의 신이 된 것은 아니다.
다만 한지호는 손바닥에 따뜻한 기운을 담아 김금순 환자의 허리를 풀어주고 있었다.
“참말로 신기하네, 선생님이 만져 주니까 조금 낫습니더.”
“그래도 아직 통증이 있죠?”
“이 통증은 계속 있습니더, 계속. 그러다 한 번씩 심해지면 걷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어야 되예.”
“여기서 침을 놓겠습니다. 조금 아플 수 있으니 참으셔야 해요.”
부드럽게 환자를 타이른 한지호가 책상 위에서 침을 챙겼다.
침술실로 가지 않고 진료실에서 바로 시침을 하려는 것이다.
평소와는 다른 패턴이었다.
치료를 위해 침을 놓는 게 아니라 진단을 위해 시침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놓습니다.”
한지호는 김금순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하나하나 과정을 알려줬다.
푸욱-
제법 긴 침이 김금순의 허리에 꽂혔다.
“아이고오!”
역시 김금순은 참지 못하고 아픔을 호소했다.
하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한지호는 망설이지 않고 두 번째 침을 척추기립근의 하단 부위에 놓았다.
이번에는 김금순이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따끔거리고 아픕니더.”
“평소에 느끼시는 허리 통증이 더 심해진 건 아니지요?”
“예, 선생님. 그런 건 아닌 거 같고예…….”
“하나만 더 놓겠습니다.”
한지호가 마지막으로 침을 들었다.
소둔근(小臀筋)의 중심에 기다란 침이 푸욱 꽂혔다.
둔근은 말 그대로 엉덩이 근육이다.
그 중에서도 소둔근은 허리와 둔부를 연결하는 부위에 자리 잡고 있다.
장침이 절반 넘게 들어갔는데도 김금순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한지호는 턱 밑을 쓰다듬으며 질문을 했다.
“김금순 환자님, 처음 침을 놓았을 때도 따끔한 것이지 평소의 통증이 더욱 심하게 느껴진 건 아니었지요?”
“침이 훅 들어오니 깜짝 놀라서 엄살을 좀 떤 것 같습니더. 따갑긴 했는데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지예.”
“근육통도 아닙니다.”
대학 병원의 정밀 검사에 의하면 디스크는 아니다.
디스크로 의심이 갈 정황조차 없다.
한지호는 김금순의 허리를 어루만져 기혈을 풀고, 요통을 유발하는 근육과 연결 된 혈도에 침을 놓았다.
만약 근육이 문제였다면 순간적으로 찌릿찌릿한 통증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을 것이다.
그런데 김금순은 첫 침에서 엄살을 부렸을 뿐, 두 번째와 세 번째 침을 아무렇지 않게 맞았다.
디스크도, 근육통도 아니면 대체 무엇이 그녀의 허리를 아프게 만드는 것일까.
노인이 되면 엄살이 심해진다지만, 단순한 엄살로 대학 병원에서 MRI를 찍고도 모자라서 비싼 원화 한의원까지 찾아오진 않았을 터.
그동안 수많은 환자를 접했지만 진단을 내리는 단계에서 걸림돌에 막힌 적은 처음이다.
세 개의 침이 꽂힌 김금순 환자의 허리를 쳐다보는 한지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