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33화 (133/255)

# 133

4장, 타통(打通) (2)

한지호는 칭화 병원 센트럴 지점의 원장실에 앉아 있었다.

병원장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없음에도 한지호가 원장실에 떡하니 들어올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웨이 림 때문이다.

웨이 림의 지시를 받은 병원 직원들이 한지호를 원장실로 모셨다.

직원들의 태도가 무척 극진해서 웨이 림이 어떤 식으로 말을 해놓았는지 예상이 됐다.

한지호는 큼직한 가죽 소파에 앉아 최고급 용정차의 향을 맡고 있었다.

방금전 센트럴 지점에 도착한 웨이 림과 재키 마, 그리고 첸은 808호에서 림커창을 만나는 중이었다.

조금 지나면 칭화 그룹의 회장이 원장실로 들어올 것이다.

한지호는 따뜻한 용정차를 한모금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주화입마 해소라는 큰 산을 넘었으니 웨이 림과의 만남은 보상으로 주어지는 특별 이벤트나 마찬가지다.

그가 아무리 홍콩을 좌우하는 국제적인 거물이라고 해도 필요 이상으로 긴장 할 필요는 없다.

마음이 다스려지자 긴장 대신 기대감이 무럭무럭 솟아 올랐다.

과연 웨이 림은 어떤 유형의 사람일까.

위천 한방병원의 이사장인 조준혁처럼 한지호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을까.

기다리는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한지호는 옥상에서 바람을 쐬며 땀을 식혔고, 원장실에 가만히 앉아 체력을 회복했다.

내공을 많이 소모했기에 제대로 휴식을 취하며 운기조식을 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조금 쉬었더니 일상생활을 하기엔 무리가 없을 정도로 컨디션이 올라왔다.

웨이 림을 직접 만난다는 생각에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이런 건지도 모른다.

똑똑똑!

그때 원장실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한지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문이 있는 방향을 쳐다봤다.

노크가 멎고 몇 초쯤 지났을까.

문이 열리며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가장 먼저 보인 사람은 웨이 림의 수석비서이자 칭화 그룹의 실세라는 재키 마였다.

그가 손수 원장실 문을 연 것이다.

한지호는 바깥에 서있는 사람들을 보며 놀라움을 삼켰다.

원장실 문 뒤쪽으로 검은 정장을 입은 덩치 큰 남자들 수십 명이 서있었다.

웨이 림이 움직일 때마다 따라다니는 수행원과 경호원들인 것 같았다.

아마 저들 중에 홍콩 삼합회의 멤버가 섞여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벅저벅.

그리고 그가 원장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십 명의 사내들을 직각으로 서있게 만들고, 재키 마로 하여금 직접 문을 열게 한 칭화 그룹의 회장.

그의 키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작았다.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160cm가 안 될 것 같은 단신이다.

다른 사내들처럼 검은 정장을 입고 구두를 신었지만 키가 너무 작아 왜소해 보일 뿐이다.

하지만 한지호는 웨이 림을 얕보지 않았다.

당당하게 원장실 안으로 들어온 그에게서 위험한 냄새가 풍겼기 때문이다.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소파에서 일어선 한지호가 판단을 내렸다.

웨이 림은 자기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는 사람이 아니다.

아마 삼합회를 이용해 사람도 여럿 죽였을 것 같았다.

세상을 전쟁터라 생각하고 살아가는 거친 남자, 어설프게 쎈 척 하지 않는 진짜 쎈 남자 특유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니 하오. 아니지, 영어?”

중국어로 인사를 건넸던 웨이 림이 영어로 말을 바꿨다.

그 역시 아들인 첸처럼 유창한 영국식 영어를 사용했다.

180cm가 넘는 큰 키의 한지호는 살짝 허리를 굽히며 손을 내밀었다.

“한국에서 온 지호 한입니다.”

“닥터 한, 우리 아이가 한 말이 과장이 아니었어. 내 형을 살려줘서 고맙네.”

웨이 림은 한지호의 손을 맞잡으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한지호는 부드럽게 웃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보통이 아냐.’

악수를 하며 느껴지는 악력이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이 가벼운 악수로 한지호를 놀래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웨이 림의 손끝에서는 저릿저릿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키는 작아도 몸이 무척 탄탄해 보였다.

수십 년 전 한국의 주먹 세계를 평정했다는 시라소니와 비슷한 체구였다.

‘악진과도 닮았어.’

한지호는 전생의 인물을 떠올렸다.

삼국지 시대, 위나라 조조의 맹장으로 천하의 존경을 받았던 천생 무인 악진 문겸.

관도대전에서 원소의 용장 순우경을 죽이고, 합비에서 손권이 대군을 막아낸 악진은 적아를 가리지 않고 모든 무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불굴의 장수다.

작은 키의 악진이 말도 타지 않고 흉터 가득한 맨몸을 드러낸 채 전장에 모습을 보이면 아군은 용기백배했고, 적군은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홍콩의 의료, 금융, 어둠. 서로 다른 세 곳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웨이 림의 첫인상은 악진처럼 단단해 보였다.

“일단 앉지.”

웨이 림이 소파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한지호는 원래 앉았던 자리에서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봤다.

가늘고 길게 찢어진 눈매가 매서워 보였고, 코나 입은 전형적인 중국 남자처럼 뭉툭하게 생겼다.

외아들 첸이 준수한 미남인데 비해 웨이 림은 다소 투박한 얼굴이었다.

그런 시선을 알아차린 것일까.

그가 씨익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첸과는 몇 번 만났다면서? 내가 그놈 애비 같이 안 생겼지.”

“모르고 만났으면 알아보긴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놈을 낳으려고 홍콩 최고의 미녀와 결혼을 했으니 당연히 잘 생겨야지, 껄껄껄!”

웨이 림이 목을 뒤로 꺾으며 통쾌하게 웃었다.

어쩐지 호쾌한 웃음소리가 명징 약초의 최치우 사장을 연상시켰다.

둘 다 산전수전을 다 겪고 긴 세월동안 자기만의 내공을 쌓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림커창 환자와는 많은 대화를 나누셨습니까?”

한지호는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림커창의 이름이 언급되자 웨이 림이 눈을 빛냈다.

쭉 찢어진 눈에서 날카로운 생명력이 느껴졌다.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모든 방법을 동원했던 것이지. 어렵게 찾았는데 의욕도, 생기도 없는 반 폐인이 되어 있었으니……. 아시아 최고의 병원이라 자부했던 이곳에서도 손을 쓸 수 있는 의사 녀석들이 하나도 없고 말이야.”

“주화입마는 일반적인 질병이 아니니까요.”

“대충 설명은 들었네. 아무튼 우리 아들놈이 생전 안 하던 부탁을 했고, 그러면서 자네 이야기를 꺼냈지. 반신반의하면서도 혹시 이게 하늘이 내려준 기회가 아닐까 여겼단 말이야. 헌데 정말이었어. 하늘이 우리 형제의 말년을 불쌍히 여겨 자네, 닥터 한을 보내준 거 아닌가!”

말을 계속할수록 웨이 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젊은 시절 헤어졌던 이복 형이 살아났고,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감정이 복받친 것이다.

“후- 내가 처음 만난 닥터 한 앞에서 주책을 보였군.”

“아닙니다.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우리 아들놈과 비슷한 나이 같은데 많이 다르구만.”

“첸은 송곳입니다. 수면 위로 튀어나올 날을 기다리며 자신을 갈고닦는. 도박이 아니라 일에 중독되면 무서운 사람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내 아들을 그리 높게 평가해주어 고맙네. 자네 말대로 저 놈이 송곳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나대로 약속을 지켜야겠지?”

드디어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나왔다.

한지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회장님의 직인이 찍힌 계약서를 마 비서에게 요구했습니다.”

“물론. 이제 와서 약속을 무르거나 바꿀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 걱정 말아도 되네. 그리 얄팍하게 살아왔다면 지금의 칭화 그룹은 없었을 터.”

“회장님을 의심하진 않습니다.”

“여기, 내 직인이 찍힌 계약서를 받지.”

웨이 림은 구구절절한 말을 늘어놓는 대신 정장 안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한지호는 절반으로 곱게 접힌 종이를 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내용의 계약서였다.

오직 한 장.

한지호는 종이에 적힌 주요 글귀를 읊조렸다.

“칭화 그룹 회장 웨이 림은 한국인 한의사 한지호가 원하면 즉시 홍콩 최적의 장소에 한의원을 열 수 있도록 협조한다. 법적인 문제는 물론이고, 향후 10년의 임대료를 칭화 그룹에서 책임진다. 이 계약은 한지호의 한의원이 홍콩에 개원한 날부터 10년 동안 유효하다.”

계약서가 영어로 쓰여 있었기에 한지호도 영어로 내용을 읽었다.

재키 마에게 조건을 들었을 때부터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막상 그 내용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작성된 계약서를 보니 다시금 심장이 쿵쾅거렸다.

먼 미래의 일이라고 여겨왔던 대륙 진출이 현실이 된 것이다.

중국의 실질적인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홍콩에 한의원을 열 수 있게 됐다.

홍콩 원화 한의원.

조용히 입 안으로 되뇌기만 해도 흥분되는 이름이다.

선명하게 찍혀 있는 웨이 림의 직인은 사실 홍콩에서 아무나 볼 수 없는 것이다.

아무 서류에나 회장의 직인을 찍지는 않는다.

웬만한 결재 서류에는 칭화 그룹 임원이나 수석 비서 재키 마의 도장이 찍혀 있다.

웨이 림의 공식 직인이 찍힌 종이 한 장의 가치는 수십억 원 이상이다.

산술적으로 홍콩 요지의 10년 치 임대료만 계산해도 수십억이 넘는데, 정부를 설득하는 것과 기타 기회비용을 합하면 가치를 환산하기 힘들 정도다.

한지호는 계약서를 다시 반으로 접어 품에 넣었다.

신주단지를 모시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기브 엔 테이크. 닥터 한은 내게 형과 지나간 세월을 나눌 수 있도록 힘을 써줬고, 나는 그 보답을 하는 것이고. 누가 누구에게 감사할 일이 아니지 않나.”

합리적인 말이었다.

보통 부자들은 큰돈을 쓰면서 생색내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웨이 림은 결이 달랐다.

한지호가 림커창의 주화입마를 해소시켜준 대가로 계약서를 주는 것이란 걸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잡음이 나올 여지가 없는 깨끗한 거래다.

“생각해둔 장소나 날짜는 있겠지?”

웨이림이 홍콩에 한의원을 열 계획을 물어봤다.

한지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렇게 일이 빨리 진행될 줄은 몰랐습니다만, 구체적인 구상은 마쳐 놓았습니다.”

“좋아, 좋아. 물었을 때 바로 바로 계획이 튀어나오는 사람이 좋다고. 자네가 우리 회사에 있었으면 참 크게 썼을 텐데.”

갖고 싶은 인재를 발견해서일까.

입맛을 쩝쩝 다신 웨이 림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을 따라 맞은편에서 일어난 한지호를 쳐다봤다.

날카로운 시선이 한지호의 눈동자에 정면으로 꽂혔다.

“닥터 한의 의술이 아무리 대단해도 홍콩 사람들의 신뢰를 사기가 쉽지는 않을 테지. 10년, 아니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우리 칭화 병원에 잡아먹혀도 원망하지 말게.”

“다 큰 어른이 남 탓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껄껄껄, 거 참 말도 시원시원하게 잘 하는군. 또 보지.”

“또 뵙겠습니다.”

가볍지 않은 말을 남긴 웨이 림이 성큼성큼 걸어가 원장실 문을 열었다.

문 바깥에는 여전히 수십 명의 사내들이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대기하고 있었다.

한지호는 사내들을 이끌고 사라지는 웨이 림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봤다.

그가 계약서를 통해 약속한 것은 한의원 개원과 임대료다.

하지만 한지호가 홍콩 의료계의 텃세 때문에, 혹은 한국 출신 한의사에 대한 편견 때문에 실패 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높은 임대료라는 리스크가 사라졌어도 홍콩은 한국과 다른 점이 많은 외국이다.

게다가 어느 나라에서나 의료 분야는 외국인을 배타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텃세, 편견, 환경의 차이, 언어의 차이 등등 중국 대륙에 한의학의 깃발을 성공적으로 꽂기 위해선 뛰어 넘어야 할 장애물이 무수히 많았다.

한지호는 날선 경고를 해준 웨이 림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엄청난 계약에 도취되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는 게 훨씬 낫기 때문이다.

들떴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고, 머릿속으로는 다음 스텝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분명한 사실은 꽉 막혀있던 림커창의 기혈을 뚫어냈고, 자신의 야망도 스스로 개척했다는 점이다.

막힌 혈도를 타통하듯 높아 보이던 중국 진출의 벽을 꿰뚫었다.

2박 3일.

짧다면 짧고 길면 긴 시간 동안 한지호는 마카오와 홍콩을 오가며 굵직한 에피소드를 여럿 만들어냈다.

홍콩에서 얻은 보물을 어떻게 활용할지, 서울에서는 또 어떤 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

머리는 복잡하지만 가슴은 기분 좋게 뛰었다.

한지호는 칭화 병원 밖으로 나와 화려한 홍콩의 거리에 스며들었다.

공항으로 가기 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다.

그는 홍콩의 생생한 풍경을 눈에 담으며 미래를 위한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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