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30화 (130/255)

# 130

3장, 무공과 의술 (1)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

토, 일, 월.

한지호는 고작 사흘의 일정으로 홍콩에 날아왔다.

벌써 일요일 오후가 됐으니 24시간 뒤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타야 한다.

재키 마는 오늘 밤까지 웨이 림 회장의 직인이 찍힌 계약서를 가져오겠다고 했다.

한지호가 웨이 림의 이복 형인 림커창을 치료하면 홍콩 어디에든 한의원을 열어주고, 10년 동안 임대료를 내준다는 내용의 계약서다.

눈이 휘둥그레질 조건이지만, 전제가 있다.

반드시 림커창을 회복시켜야 한다.

한지호는 간단한 진맥으로 그의 증세와 발병 원인을 맞췄다.

그로인해 칭화 병원의 중의학과장인 바이룽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고, 재키 마의 신뢰를 얻어냈다.

뿐만 아니라 주화입마라는 진단까지 내리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병명을 맞췄다는 것만으로는 무엇도 얻어낼 수 없다.

치료를 하지 못하면 주화입마라는 진단도 헛소리 취급을 받을 것이다.

첸과 재키 역시 한지호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를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강제로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재키는 나름 합리적인 태도로 한지호의 상황을 배려해줬다.

월요일까지 초기 치료에 힘쓰고, 주말마다 홍콩을 오가며 림커창을 돌보라고 한 것이다.

그는 조금씩이라도 차도가 보이면 한지호를 계속 믿어주겠다고 약속했다.

누가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한지호가 일을 첸도 재키의 현실적인 태도에 안도했다.

홍콩과 서울은 그리 멀지 않다.

아침 비행기로 홍콩에 와서 진료를 하고 밤 비행기로 돌아가는 게 가능한 거리다.

주말을 이용하면 충분히 홍콩을 오가며 림커창을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한지호의 대답은 재키와 첸을 또 다시 놀라게 만들었다.

그는 굳이 서울과 홍콩을 몇 번씩 날아다니며 번거롭게 치료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내일 저녁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림커창을 치료할 수 있다고 자신한 것이다.

칭화 그룹 내부에서 포커 페이스로 유명한 재키는 오늘 두 번이나 크게 놀라고 말았다.

한지호가 림커창의 상태를 정확히 맞췄을 때, 그리고 내일까지 치료를 할 수 있다고 말했을 때 모두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누가 한지호를 말리겠는가.

10분 남짓한 시간 안에 칭화 병원의 정밀 검사 시스템과 중의학과장을 바보로 만든 장본인이다.

게다가 첸의 보증까지 있다.

재키는 서두를 필요 없다는 말을 남기고 웨이 림의 직인을 받으러 병실 밖으로 나갔다.

808호 안에는 죽은 듯이 잠들어있는 림커창과 한지호, 첸만 남아 있었다.

“닥터 한. 정말… 내일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가능하겠어요?”

첸이 본심을 드러냈다.

그는 껄끄러운 인물인 재키가 사라지자 평소와 비슷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한지호는 칭화 병원 중의학과에서 공수해온 치료 장비들을 체크하며 대답했다.

“자신이 없으면 왜 그렇게 말했겠습니까. 재키의 제안대로 주말마다 홍콩을 오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그러니까 말이에요. 어려운 일도 아닌데 시간을 더 달라고 하지 그랬어요. 아무리 닥터 한이라도 하루 만에 저 사람을 치료하는 건…….”

첸이 말끝을 흐렸다.

저 사람이라고 했지만 림커창은 그의 큰아버지인 셈이다.

오늘은 아버지의 이복 형이라는 존재를 알게 된 첫 날이다.

거액이 오가는 도박판에서 단련이 된 첸의 멘탈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단단하게 중심을 잡고 있는 사람은 한지호가 유일했다.

그는 일생일대의 기회 앞에서 흥분하거나 떨지 않았다.

당연히 심장이 빠르게 뛰지만, 오금희의 기운과 갈고 닦은 정신력으로 마음을 안정시켰다.

“첸. 만약 림커창 환자가 다른 질병을 앓고 있었다면 절대로 하루 안에 치료를 자신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주화입마는 질병이 아니라 무공, 아니 기공을 수련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작용입니다. 증세는 질병보다 심각하지만 원인과 해법은 다릅니다.”

“무슨 말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특별한 방법이 있다는 뜻으로 들리네요. 맞나요?”

“맞습니다. 날 믿고 기다리면 됩니다.”

확신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첸은 더 이상 염려하지 않았다.

걱정을 계속 하는 것도 상대에게 실례가 될 수 있다.

대신 그는 한지호가 림커창을 고치는데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닥터 한, 원래 계획과는 달라졌지만 아버지께서 아주 큰 기회를 주신 거죠. 나에게도 아버지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기회에요. 사람 보는 눈이 있다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으니까요. 그러니 꼭 저 사람을 고쳐서 닥터 한이 원하는 걸 얻기를 바랄게요.”

“고맙습니다. 이 기회 놓치지 않을 겁니다.”

“내가 도와줄 건 없나요?”

“내일 아침이 밝을 때까지 808호 안으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주면 좋겠습니다.”

“그건 어렵지 않아요.”

“또 하나, 곧 림커창 환자를 깨울 겁니다. 첸이 통역을 해줬으면 합니다.”

“물론 내가 도와야죠.”

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본능에 각인 된 도파민 중독 증세가 슬슬 살아나려 했다.

블랙문 카지노에서 조준혁이 자기 손을 다치게 만들고, 한지호가 곧바로 치료를 했던 광경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어쩌면 오늘 첸은 그에 버금가는 장면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콧대 높은 중의학과장 바이룽을 패닉에 빠트린 한지호다.

정말 하룻밤 사이 죽어가는 림커창을 치료한다면, 그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다면 몇 억짜리 게임을 하는 것보다 훨씬 흥미진진할 것이다.

방금 전까지 나가있던 멘탈이 벌써 제자리를 찾은 것일까.

하여간 첸도 보통 인물은 아니다.

그의 눈빛이 사춘기 소년처럼 초롱초롱하게 변했다.

“밖에 나가서 출입을 통제하고 올게요.”

첸은 마치 한지호의 조수처럼 굴었다.

칭화 그룹의 후계자가 직접 말을 할 테니 외부인이 808호로 들어올 일은 없을 것이다.

한지호는 심호흡을 들이마시고 목을 좌우로 꺾었다.

호언장담을 했으니 결과로 증명을 할 차례다.

주화입마에 빠진 림커창을 깨우고, 의술과 무공을 절묘하게 조합해 그를 회복시켜야 한다.

“이 세상에서 주화입마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한지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뛰어난 의술을 가진 의사와 한의사, 중의사들은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으로 무공을 익힌 사람은 전세계에서 한지호밖에 없다.

주화입마는 의술보다는 무공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한지호는 단전에 쌓인 내공을 끌어 올리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를 위해 준비 된 무대에 오를 쇼 타임이 왔다.

+++

“자세가 불편하진 않으십니까?”

한지호가 영어로 질문을 던졌다.

곧이어 첸이 그의 영어를 중국어로 통역해줬다.

잠에서 깨어난 림커창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한지호가 손수 그의 다리와 손을 움직여 가부좌 자세를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괜찮다고 하시네요.”

림커창이 중국어로 뭐라 뭐라 말했고, 첸이 다시 영어로 통역을 했다.

한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하지만 의사소통은 확실하게 된다.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 보이는 림커창은 기력이 없는지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별 것 아닌 가부좌 자세도 그에게는 힘겨워 보였다.

쭈글쭈글하게 말라붙은 피부 가죽, 초점 없이 풀린 눈동자, 의욕을 잃은 표정.

그의 몸에서 영혼의 생기가 떠나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몸 안의 기혈이 엉킨 것은 엑스레이나 CT, MRI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당사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제대로 소화를 못 시켜서 구토와 설사가 동반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혈도를 타고 흐르는 기의 흐름이 끊기면서 오장육부와 뼈마디, 그리고 근육들이 서서히 서서히 죽어간다.

주화입마에 빠진 당사자는 그 느낌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된다.

겨우 가부좌를 틀고 앉은 림커창의 몸짓에 힘이 없는 게 당연했다.

한지호는 주화입마 현상을 헤아리고 있기에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제가 올라가서 등 뒤에 앉을 거라고 전해주세요, 첸.”

첸에게 말을 전한 한지호가 병상 위로 올라갔다.

칭화 그룹 센트럴 지점에서 가장 비싼 특실답게 808호의 병상은 일반적인 환자용 침대와 달랐다.

킹 사이즈 침대보다 더 넓고 튼튼한 병상이었다.

말이 병상이지 최고급 호텔 침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털썩.

한지호는 림커창 바로 뒤에 가부좌를 틀었다.

둘 다 한쪽 벽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의를 탈의해 달라고 전해주세요.”

한지호의 말을 들은 첸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첸은 오늘 처음 만난 자신의 큰아버지에게 웃옷을 벗으라고 말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왜 옷을 벗으라고 하냐며 따질 법도 하다.

하지만 림커창은 순순히 입원복 윗도리 단추를 풀었다.

일일이 시시비비를 가리며 따질 기운도 없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말도 안 통하는 이방인에게 희망을 거는 것인지 모른다.

어느 쪽이든 림커창은 한지호의 주문대로 상의를 다 벗었다.

조명 아래 환하게 드러난 그의 상체는 더욱 볼품없었다.

피부 표면의 노화가 몸에서 더 가파르게 진행된 것 같았다.

얼굴과 손이 쭈글쭈글한 정도라면 림커창의 가슴과 등에는 보기 흉한 주름과 기미들이 자글자글했다.

비위가 약한 사람은 그의 등을 보는 것도 힘겨워 할 게 분명하다.

그러나 한지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가뭄에 시달린 논두렁 같은 피부를 보고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팔을 뻗어 두 손을 림커창의 등에 붙였다.

영혼 없는 사람처럼 굴던 림커창도 흠칫 놀란 모양이다.

한지호는 그의 등 뒤에 앉아있어 얼굴 표정을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피부를 통해 림커창이 긴장한 게 느껴졌다.

“이제부터 몸 안의 혈도를 자극해 뒤엉킨 기혈을 바로 잡을 겁니다. 짧으면 한 시간, 길면 몇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누구도 우리를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출입 통제는 철저하게 당부해 놓았어요.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808호로 들어오는 사람은 없을 테니 걱정 말아요, 닥터 한.”

첸의 말을 들은 한지호는 두 눈을 감았다.

잠시 기운을 모으느라 집중한 한지호가 입술을 달싹였다.

“첸. 림커창 환자에게 절대 놀라지 말라고, 나를 끝까지 믿고 계속 앉아있으면 반드시 주화입마로 인한 괴로움을 해결해 주겠다고 전해주겠습니까?”

첸은 지체 없이 한지호의 말을 림커창에게 전달했다.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알게 모르게 파르르 떨고 있던 림커창의 몸이 진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한지호는 오금희를 수련하며 쌓은 내공을 두 손으로 끌어올렸다.

림커창의 등에 손바닥을 붙인 건 내공을 주입하기 위해서다.

한지호 자신의 내공을 림커창의 몸 안으로 주입해서 뒤틀린 기혈을 바로잡아야 한다.

고도의 추궁과혈(推宮過穴)과 내기도인술(內氣導引術)만이 주화입마를 해소시키는 열쇠다.

의술과 무공을 동시에 아는 사람만 펼칠 수 있는 비기(秘技)가 오랜 세월을 건너뛰어 홍콩에서 재현되기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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