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29화 (129/255)

# 129

2장, 한의(韓醫) (2)

‘환갑 정도 된 것 같은데 피부는 나이보다 더 노화가 진행 됐어. 고생을 많이 했군.’

한지호는 먼저 림커창의 외모부터 살폈다.

피부를 비롯해 환자의 외모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생각 이상으로 많다.

한의학에서 망진(望診)이라는 단계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환자의 얼굴형과 색깔, 체격 같은 외부 모습만으로도 건강 상태는 물론이고 병세를 진단하는 게 가능하다.

림커창은 깊은 잠에 빠졌는지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미동도 안 하는 걸 보면 언뜻 살았는지 죽었는지 헷갈릴 정도다.

하지만 얕게나마 일정한 호흡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생명이 위중한 상태는 아니다.

산소호흡기를 부착하지 않았고, 호흡에 무리가 없다는 것만으로 최소한의 진단은 내릴 수 있다.

간단하게 망진을 마친 한지호는 다음 단계로 돌입했다.

망진 다음은 문진(聞診)이다.

환자의 몸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를 귀로 듣고 진단을 내리는 과정이다.

기침 소리, 숨소리와 목소리, 아주 희미한 소리라도 해도 진단을 내리는데 도움이 된다.

한지호는 고개를 숙여 림커창의 목 가까이 귀를 가져갔다.

병실 안에 있는 재키나 바이룽, 첸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개의치 않았다.

“흐- 흐으-.”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 의사라고 해도 숨소리에서 정보를 얻어내는 경우는 드물다.

백날 귀를 기울여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한지호는 어떠한 사전 정보도 제공 받지 않았다.

칭화 병원 센트럴 지점에서 시행한 정밀 검사 리스트와 진단 차트를 보지 않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진단을 하는 중이다.

괜히 검사 결과표를 봤다가는 저도 모르게 편견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칭화 병원에서도 해결책을 찾지 못한 것이라면 백지 상태에서 뛰어드는 게 낫다.

“그런 식으로 뭘 알아낼 수 있다고.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군, 이해를.”

바이룽이 냉소를 흘렸다.

그는 일부러 한지호가 들으라는 듯 영어로 불평을 토해냈다.

한지호는 구태여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아직 진단이 끝나기 전이다.

쓸데없는 신경전으로 집중력을 흐트리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마음 상태로 망진과 문진 결과를 되짚었다.

‘피부가 과하게 상했고, 안색이 좋지 않아. 반면 호흡에는 문제가 없어. 눈에 드러나는 문제는 아니지만 안에서부터 몸이 상하고 있다는 뜻.’

망진과 문진만으로 윤곽이 드러났다.

환자가 잠들어 있으니 질문을 던지는 문진(問診)은 할 수 없다.

억지로 림커창을 깨워서 질문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진맥, 즉 절진(切診)을 하면 구체적인 진단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윽-

한지호가 축 늘어져 있는 림커창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전매특허인 진맥이다.

모든 한의사들이 진맥을 할 줄 안다.

당연히 모든 중의사들도 진맥을 한다.

중의학과장인 바이룽 역시 숱하게 림커창의 맥을 짚어 봤을 것이다.

하지만 진맥이라고 해서 다 똑같지는 않다.

환자의 맥은 똑같지만, 그것을 감지하고 해석하는 실력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다른 한의사, 또 다른 중의사들과 비교 받고 싶지 않았다.

진맥의 세계에 천외천(天外天)이 있다면 바로 그 자신일 거라고 생각했다.

오만함이 아니라 자신감이다.

그는 두 눈을 감고 림커창의 맥박에 온신경을 기울였다.

이 순간, 한지호의 영혼까지 림커창의 맥에 가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건?’

한지호가 눈을 부릅떴다.

평온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의 이마에 핏줄이 선명하게 올라왔다.

그만큼 깜짝 놀랐다는 뜻이다.

이제껏 수많은 환자들을 진맥했고, 듣도보도 못한 희귀병을 발견한 적도 꽤 된다.

김해수의 구음절맥이나 황태수의 아내가 앓았던 광전증은 현대에서 보기 드문 질병이다.

그럼에도 이처럼 격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었다.

등을 돌리고 있었기 망정이지, 첸이나 재키가 한지호의 얼굴을 봤다면 당장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것이다.

처억.

한지호가 림커창의 손목에서 손을 뗐다.

망진, 문진에 이은 절진까지 끝났다.

진맥을 다 했으니 병실 안 사람들에게 답을 줘야 한다.

그가 몸을 돌리자 세 사람의 각기 다른 시선이 한몸에 꽂혔다.

첸은 기대 어린 눈빛이었고, 바이룽은 여전히 거만함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이었다.

반면 재키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위천 한방병원의 이사장인 조준혁과 닮은 것 같았다.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전에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알겠습니까?”

재키가 입을 열었다.

한지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바이룽이 한지호를 믿지 않았다.

“정밀 검사도 없이 간단한 진맥으로 대체 뭘 알아낸단 말인지 모르겠군. 어디 한 번 말해봐. 환자가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호흡 정상. 맥박은 불규칙하나 이것만으로 이상이라 말할 수 없고.”

“그거야 누구나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이지.”

“문제는 식사를 제대로 못하고, 급속도로 생기를 잃어간다는 점. 소화기관에 아무 문제가 없음에도 몸이 음식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설사와 구토가 지속 됐을 겁니다.”

“그, 그거야…….”

바이룽이 움찔 놀라는 게 느껴졌다.

팔짱을 끼고 둘을 지켜보던 재키 마의 얼굴색도 변했다.

첸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한지호와 바이룽의 설전을 주시하고 있었다.

“림커창 환자는 당뇨 등의 지병이 없음에도 급격한 노화 증세를 보이며 원인을 알 수 없는 소화 불량 증상까지 동반해 빠른 속도로 기력을 잃고 있습니다. 암 말기 환자 같은 증세지만 내부 장기는 깨끗할 게 확실합니다. 아마 칭화 병원에서는 제대로 된 병명조차 찾지 못했겠죠.”

“어떻게, 어떻게 그걸?”

한지호는 순식간에 바이룽의 넋을 빼놓았다.

짧은 진맥만으로 정밀 검사 결과를 줄줄 읊고 있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몰래 검사 차트를 훔쳐보고 연기를 하는 게 아닌지 의심 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한지호가 어떠한 정보도 없이 808호에 들어왔다는 건 모두 아는 사실이다.

바이룽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재키 마를 흥분시킨 한지호는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림커창 환자, 평소에 기공이나 도인술에 심취해 있지 않았습니까? 중국에는 다양한 종류의 기공 수련이 존재한다고 들었습니다만. 예를 들면 태극권이나 팔괘장, 또는 중국 정부에서 금지한 파룬궁 같은.”

투툭-!

타이밍 좋게 재키의 자켓에 꽂혀있던 만년필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재키는 만년필을 주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흔들림 없던 그의 얼굴에는 뚜렷한 감성이 떠올라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봤을 때 나오는 표정.

바로 그 표정이 재키의 얼굴을 수놓았다.

“닥터 한, 당신……. 대체 정체가 뭡니까?”

“아시다시피 한국에서 온 한의사입니다. 여러분의 반응을 보니 제 진단이 정확한 모양이군요.”

한지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재키가 경악했다면 바이룽은 패배감에 휩싸여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칭화 그룹의 최첨단 장비로 검사해서 알아낸 사실을 한국의 젊은 한의사가 진맥 한 번으로 뚝딱 파악했기 때문이다.

반면 첸만 신이 나서 기뻐하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아버지에게 추천한 사람인 한지호가 제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으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닥터 한, 그래서 병명이 뭔가요?”

첸의 물음에 한지호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진맥을 마친 그는 스스로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주화입마입니다.”

“주화입마요?”

“그렇습니다. 림커창 환자는 주화입마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

주화입마(走火入魔).

무협 소설에나 등장하는 생소한 병명이다.

사실 병명(病名)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하다.

현대 의학은 물론이고, 한의학과 중의학에서도 주화입마라는 용어를 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동양 의학의 고전에는 당연히 주화입마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기혈(氣穴)이 뒤엉킨 상태를 총칭하는 말이 바로 주화입마다.

문제는 현대인들의 기혈이 뒤엉킬 일이 거의 없다는데 있었다.

기혈이 엉키려면 먼저 기(氣)를 다루는 수련을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불운이 겹치면 기가 지나다니는 통로인 기혈이 엉키면서 주화입마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기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고, 따라서 기를 다루는 수련을 할 리가 없는 현대인들은 다른 질병에는 취약해도 주화입마에 걸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그러나 간혹 특이한 사람들이 있는 법.

한국에서도 태극권이 팔괘장을 수련하는 소수의 매니아들이 존재한다.

한 때 유행했던 단학이나 뇌 호흡도 크게 봐서는 기 수련의 범주에 포함 된다.

중국은 한국보다 더 하다.

한국과 일본에서 기 수련을 하는 사람들이 극소수라면 중국에서는 제법 대중화가 돼 있다.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기 수련을 파고들어 제대로 된 명맥을 유지해온 단체들도 적지 않다.

중국 정부의 탄압을 받은 파룬궁도 기 수련을 하고, 소림사와 무당파의 명맥도 예전만 못하지만 수련법을 전승 해오고 있었다.

도처에 널린 태극권 모임이나 팔괘장 모임도 우습게 볼 수는 없다.

만들어진지 수십 년이 넘은 동네 태극권 모임의 내공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림커창 역시 처음에는 동네 태극권 모임에서 기 수련을 배웠다.

웨이 림의 이복 형이지만 사생아였던 그는 정처 없이 대륙을 떠돌았고, 마음을 붙일 대상이 필요했던 찰나 기 수련에 꽂혀 인생을 걸게 됐다는 이야기다.

다른 나라였으면 허무맹랑한 소리로 치부할 수 있지만, 중국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림커창은 제대로 된 수련을 통해 약간의 기를 쌓은 것 같았다.

단전에 쌓인 기의 존재를 느끼기 시작하면 수련에 중독되기 십상이다.

한국에서도 뇌 호흡에 과도하게 집착한 수련자들의 부작용이 뉴스가 됐던 적이 있다.

한지호는 주화입마라는 진단을 내렸고, 거기에 대해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만약 재키가 한지호를 믿지 않는다면 어찌 할 방법이 없다.

한지호는 진맥으로 자신을 증명했다.

칭화 병원의 정밀 검사를 잠깐의 진맥으로 따라잡았으니 의술을 충분히 보여준 셈이다.

선택은 재키 마의 몫이다.

칭화 그룹 회장 웨이 림의 대리인 자격으로 나와 있는 그가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릴까.

재키와 첸, 한지호, 그리고 계속 잠들어 있는 림커창은 여전히 808호 안에 있었다.

바이룽은 한지호의 진단에 충격을 받은 듯 몸을 떨다가 먼저 밖으로 나갔다.

아마 한동안은 금이 간 자존심이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치료는… 가능하겠소?”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던 재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태도를 완전히 버렸다.

한지호의 의술이 다른 의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경지라는 걸 몸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치료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주화입마를 해소시킨 다는 말이 맞겠죠.”

“림커창 님은 하루가 다르게 생기를 잃어가고 있소. 치료든 해소든, 닥터 한이라면 림커창 님의 증상을 낫게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습니다.”

“회장님께서 무척 기대하고 있는 사안이오.”

“방금 전에 말했던 서류에 회장님의 직인을 찍어 오세요. 그리고 약속을 확실하게 지킬 준비만 하면 됩니다. 림커창 환자는 내가 맡겠습니다.”

재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림커창을 치료하는데 성공하면 칭화 그룹이 한지호를 대신해서 홍콩 중심지에 한의원을 열어줄 것이다.

소요되는 모든 비용과 10년 치 임대료도 당연히 칭화 그룹의 몫이다.

이로서 계약이 성립 됐다.

한지호는 첸을 통해 원래의 소원보다 훨씬 더 큰 기회를 얻었다.

림커창의 주화입마를 해소시키면 중국 대륙을 이끌어가는 홍콩에 깃발을 꽂을 수 있다.

그의 첫 번째 중국인 환자가 칭화 그룹 회장의 이복 형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인생은 예상 밖으로 흘러가기에 더 재미있는 것인지 모른다.

한지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의학의 정수를 보여줄 작정이었다.

그는 중의학의 원조인 화타의 진전을 이었다.

그렇지만 화타의 제자인 규호는 어디까지나 전생의 인물이다.

현생의 주인 한지호는 한국인이고, 독자적으로 발전한 한의학을 배웠다는데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화타와 규호의 의술도 현대 한의학이라는 틀 안에서 소화 시키는 중이었다.

한지호는 스스로를 한의사(韓醫師)라고 생각했다.

뿌리 깊은 정체성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의술로 대륙을 정복하고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원대한 야망은 어느새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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