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28화 (128/255)

# 128

2장, 한의(韓醫) (1)

홍콩 센트럴에 내린 한지호는 어렵지 않게 칭화 병원을 찾았다.

삐까번쩍한 빌딩들이 즐비한 곳이 센트럴이지만, 칭화 병원은 대로변 중심에 우뚝 서있었다.

웬만큼 길치가 아니고서는 손쉽게 칭화 병원 간판을 발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지호는 망설이지 않고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손꼽아 기다렸던 이지은과의 행복한 데이트까지 뒤로 미루고 달려왔다.

여기서 반드시 만족할 성과를 얻어가야 한다.

그는 병원 로비에 들어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수많은 환자들과 보호자, 그리고 바빠 보이는 의료진들이 넓은 1층 로비를 꽉 채우고 있었다.

우웅- 우우웅-

때마침 다시 스마트 폰이 울렸다.

첸이었다.

“네. 지금 칭화 병원입니다.”

“센트럴 지점으로 온 거죠?”

“센트럴 지점 1층 로비입니다.”

“808호로 와주세요. 갑자기 부탁해서 미안해요, 닥터 한.”

“알겠습니다.”

한지호는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며 생각을 거듭했다.

첸이 미안하다고 말한 걸 보면 단순히 장난을 치거나 시험을 하는 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진짜 중요한 할 말이 있거나 갑자기 치료해야 할 환자가 생겼는지 모른다.

“808호라, 808호.”

한지호가 혼잣말을 읊조렸다.

중국인들은 이상할 정도로 8이라는 숫자를 좋아한다.

808호는 분명 칭화 병원에서 가장 비싼 특실일 것이다.

띠잉!

그때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한지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8층을 누르지 않아 그가 직접 버튼을 눌러야만 했다.

2층, 3층, 4층, 5층.

엘리베이터는 거의 매 층마다 멈췄고, 환자와 보호자들이 우르르 내렸다.

7층을 지나자 엘리베이터 안에는 한지호 혼자만 남게 됐다.

아마 8층 전체가 특실로 이뤄져 있어 평범한 환자들은 올라갈 일이 없기 때문인 것 같았다.

스으으윽-

8층에 당도한 엘리베이터 문이 좌우로 열렸다.

한지호는 복도에 내리자마자 황금빛 향연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모름지기 병원 인테리어는 차분함을 첫 째 덕목으로 삼는다.

하지만 칭화 병원 8층은 누가 황금을 많이 쓰는지 내기라도 한 것 같았다.

철저하게 중국인들의 취향을 반영해서 인테리어를 한 것이다.

물론 칭화 병원 전체가 이런 분위기는 아니였다.

평범한 환자들은 특실에 입원하지 않는다.

대형 병원 특실의 입원료가 5성급 호텔의 숙박료보다 더 비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황금빛 넘치는 인테리어는 특별함을 원하는 중국 부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너무하잖아.”

한지호는 정신 사나운 인테리어에 불평을 토하며 걸음을 옮겼다.

간호사와 의사들이 보였지만, 특별히 한지호의 신분을 확인하거나 길을 막아서지는 않았다.

첸이 말한 808호는 복도 오른쪽 끝에 있었다.

복도 안쪽의 병실은 프라이버시가 보호될 뿐 아니라 마음 놓고 넓은 공간을 터서 쓸 수 있기에 가장 좋은 자리다.

한지호는 병실 문 앞에 섰다.

실내가 보이지 않도록 두꺼운 원목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 와중에 문의 손잡이도 황금빛으로 도장이 되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한지호는 쓴웃음을 머금고 문을 두드렸다.

똑똑-

노크를 하고 3초쯤 지났을까.

곧바로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닥터 한!”

핏기 없이 새하얀 얼굴의 첸이 한지호를 맞이했다.

원래부터 하얀 피부를 자랑하던 첸이지만 오늘은 영화 속 벰파이어처럼 생기가 없어 보였다.

“급한 일인 것 같아서 바로 왔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우선 안으로 들어와요.”

한지호는 첸에게 이끌려 808호 안으로 들어갔다.

칭화 병원 센트럴 지점에서 최고로 치는 특실이 얼마나 넓고 호화로운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한지호는 오직 사람에 집중했다.

808호 안에 있는 낯선 사람들을 파악하는 게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병상 옆에 서있었고, 환자 한 명이 누워있었다.

정장을 빼입은 중년인도 접객용 소파에 앉아있는 게 보였다.

첸을 포함해 모두 네 명이 808호 안에 있는 것이다.

한지호가 들어서자 나머지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은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에게 가려져 얼굴을 확인하기 힘들었다.

첸은 그들을 향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을 했다.

영어 대신 중국어로 한지호가 누구인지 설명하는 것 같았다.

한지호는 말없이 서서 사람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은 칭화 병원의 의사군. 30대 중반? 그리고 정장을 입은 사람은 40대 초반. 둘 다 나이가 많지는 않아. 하지만 제법 높은 신분이겠지.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첸이 둘을 함부로 대하고 있지 않으니까.’

짧은 순간이지만 한지호는 808호 병실 내부의 흐름을 예리하게 파악했다.

관찰력과 순발력으로 정답에 근접한 추측을 한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첸이 다시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실례했어요. 잠시 닥터 한에 대해 소개를 하느라고.”

“괜찮습니다.”

“지금부터는 영어로 말하죠. 닥터 한, 이쪽은 칭화 병원 센트럴 지점의 중의학과장 바이룽입니다.”

지목 당한 의사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한지호는 바이룽을 유심히 쳐다봤다.

30대 중반으로 밖에 안 보이는데 칭화 병원의 학과장이라는 게 신기했다.

그래서일까.

바이룽에게서 거만한 태도가 느껴졌다.

첸이 있기에 대놓고 티는 못 내도 한지호를 고깝게 보는 것 같았다.

“이 분은 아버지가 제일 신뢰하는 수석 비서, 재키 마입니다.”

한지호의 시선이 돌아갔다.

몸에 딱 맞는 명품 정장을 입은 40대 초반의 남자는 홍콩 영화배우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잘 생겼다.

그의 신분도 예사롭지 않았다.

칭화 그룹의 회장인 웨이 림이 가장 신뢰하는 수석 비서라면 실세 중의 실세다.

후계자인 첸이 미래의 권력이라면 웨이 림 회장의 세대에서 현재 권력은 수석 비서인 재키 마일지 모른다.

808호 병실 안에서 첸의 태도가 평소보다 훨씬 차분했던 이유가 있었다.

젊은 중의학과장 바이룽도 바이룽이지만, 그보다는 재키 마를 의식했던 것이다.

첸이 한지호를 어떻게 소개했는지 몰라도 재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한지호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비서라고 우습게 볼 수 없다.

우리나라 대기업으로 치면 삼성 그룹의 사장과 비슷한 위치다.

그룹 오너의 수족이 되어 경영에도 관여하는 가신(家臣)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그렇다면 과연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는 누구란 말인가.

대체 그가 누구이기에 웨이 림의 수석비서와 아들을 같은 병실로 불러낸단 말인가.

한지호가 질문을 던지기 전, 재키 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홍콩 느와르에 나오는 영화배우 같은 외모처럼 목소리도 중후했다.

“닥터 한. 첸이 말하기를 엄청난 실력을 가진 한의사라고…… 맞습니까?”

“제 의술에 자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환자가 누구인지 알고 왔습니까?”

“전혀 모릅니다. 첸의 전화를 받자마자 달려온 것뿐입니다.”

한지호의 대답을 들은 재키가 첸을 쳐다봤다.

복잡한 사정을 알아서 설명하라는 뜻 같았다.

‘확실히 중요한 인물이다.’

한지호는 재키 마의 존재감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첸에게 눈빛으로 지시를 내릴 정도의 인물이다.

미래 권력이자 그룹의 후계자인 첸도 껄끄러워 할 정도의 실세가 확실했다.

첸은 한지호를 보며 빠르고 정확하게 상황을 설명해줬다.

그는 너무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전달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 닥터 한의 소원을 의논하러 아버지를 만났어요. 그러자 아버지께서 처음으로 비밀을 말해줬지요. 어릴 때 헤어졌던 알려지지 않은 이복 형이 있다고……. 그를 찾았지만 이미 병이 든 상태라 손쓸 방법이 많지 않다고. 저기 누워 있는 사람이 아버지의 이복 형이라네요. 나도 오늘에서야 알게 되어서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칭화 그룹 웨이 림 회장님의 이복 형이 808호의 환자라는 말입니까?”

“그렇다네요.”

“그런데 왜 그렇게 급하게 나를 부른 겁니까?”

“그게… 아버지께 닥터 한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잖아요. 홍콩에 한의원을 열어달라는 사람이 있다, 내가 아는 사람인데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 그 사람 대단한 의술을 가졌다.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니까 아버지께서 그렇게 대단한 의사면 실력을 보이라고 하신 거죠. 만약 이복 형을 치료하면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시겠다고 했어요.”

한지호는 일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단번에 캐치했다.

첸이 아버지인 웨이 림에게 한지호의 소원을 들어 달라 부탁했고, 그 과정에서 한지호가 얼마나 대단한 의사인지 설명한 게 일의 시작이었다.

그동안 이복 형의 일을 비밀로 해오던 웨이 림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기 아들이 보증하는 한의사를 시험하려는 것이다.

도박에만 빠져있던 아들이 처음으로 추천한 사람이니 더더욱 믿어볼 수밖에 없을 터.

단순히 첸을 통해 홍콩 당국의 규제를 돌파하려던 한지호는 본의 아니게 칭화 그룹의 집안일에 끼어들게 됐다.

칭화 그룹을 소유한 림 씨 가문의 비사(秘事) 한 복판에 등장한 것이다.

중의학과장 바이룽이 한지호를 싸늘하게 쳐다봤던 것도 이해가 됐다.

바이룽은 홍콩 최고의 명의라는 자부심이 대단할 텐데 듣도 보도 못하던 한국 한의사가 구원투수처럼 나타났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닥터 한.”

다시금 재키 마가 나섰다.

그가 한지호에게 웨이 림의 명확한 뜻을 전달했다.

“닥터 한이 림커창 님을 치료할 수 있다면 홍콩에서 원하는 지역 어디든 한의원을 열어 드릴 겁니다. 한의원을 여는데 드는 모든 비용과 당국의 협조, 10년 동안의 임대료는 모두 칭화 그룹이 부담할 겁니다. 회장님의 약속입니다.”

믿기 힘든 제안이었다.

병상에 누워있는 웨이 림의 이복 형이 림커창이다.

그를 치료하면 홍콩 최고의 중심지에 한의원을 열 수 있고, 필요한 모든 조치와 비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더군다나 홍콩의 임대료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수준이다.

10년 치 임대료를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50억 원에서 100억 원 이상이 될 수도 있다.

홍콩 요충지에 한의원을 열면 한 달 임대료가 최소 5천만 원은 들 것이다.

칭화 그룹에서 향후 10년의 임대료를 내주면 한의원 운영은 땅 짚고 헤엄치기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 모든 사업의 진리인데 이 경우에는 리스크 없이 리턴만 기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 첸에게 소원으로 말했던 홍콩 당국의 승인 여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규모의 조건이었다.

거부 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이런 기회가 주어진 걸 행운으로 여겨야 한다.

블랙문 카지노에서의 위험한 게임, 그때 시작된 첸과의 인연이 나비 효과처럼 번져나가 지금의 기회를 만들어낸 것이다.

문제는 단 하나, 병상에 누워있는 림커창의 상태다.

칭화 병원의 센트럴 지점에는 홍콩 최고의 의료진들이 포진해 있다.

양의학과 중의학을 동시에 다루는 병원이기에 가능한 모든 조치를 다 해봤을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차도가 없어서 웨이 림이 한지호라는 조커 카드를 선택한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보증하는 한의사라는 게 유일한 이유지만, 반나절 사이 한지호에 대한 조사를 마쳤을지도 모른다.

한지호가 한국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지 알아보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

그는 이미 유명인의 반열에 오른 스타 한의사이기 때문이다.

“웨이 림 회장님을 뵌 적은 없지만, 약속을 어기는 분은 아닐 거라 믿습니다.”

“당연한 말을.”

약간의 의문을 담은 한지호의 말에 재키 마가 눈을 번뜩이며 대답했다.

한지호는 물러서지 않고 원하는 바를 말했다.

“홍콩에서는 웨이 림 회장님의 이름이 보증수표겠지만, 한국에서는 계약서 없이 어떤 일도 추진하지 않습니다. 회장님의 약속을 문서로 만들어 준다면 이 환자를 치료하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단 환자부터 보고 나서 말하는 게 어떨지? 보고 나서도 치료할 자신이 있다면 회장님의 직인이 찍힌 문서는 오늘 저녁에라도 가져다 줄 수 있으니 말이오.”

재키는 단호해 보였지만 한지호가 내건 조건을 받아들였다.

만족한 한지호는 첸을 지나쳐 병상으로 다가갔다.

환자의 상태를 보고 치료 여부를 가늠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병상 앞에 서서 사태를 관망하던 바이룽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과 칭화 병원의 다른 의료진을 놔두고 한국에서 온 한의사에게 환자를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불쾌했기 때문이다.

“해결책을 찾기 힘들 텐데. 할 수 있는 건 우리가 다 해봤으니.”

바이룽이 혼잣말처럼 한 마디를 내뱉었다.

한지호는 잠깐 동작을 멈췄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건조하게 대답했다.

“이곳의 의료진이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릅니다.”

바이룽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한지호는 칭화 병원 의사들과 완전히 선을 그었다.

너희는 못 해도 나는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붉으락푸르락 하는 바이룽을 뒤로 하고 한지호가 허리를 숙였다.

병상에 누워있는 림커창, 808호의 주인이 얼마나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지 진단할 시간이다.

늘 그렇듯이,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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