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1장, 마카오 (2)
“홍콩보다는 못해도 나쁘지 않죠?”
첸이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당연히 나쁘지 않았다.
마카오의 야경을 별로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뉴욕과 비견되는 홍콩의 야경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마카오의 스카이라인 역시 둘째가라면 서럽다.
한지호와 첸은 스카이 바에서 제일 좋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첸이 등장하자 호텔 스카이 바에서 중요한 손님을 위해 비워두는 상석(上席)을 내줬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첸의 얼굴이 곧 명함이었다.
얼마나 자주 방문해서 거액을 쓰고 다니는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
한지호는 마티니로 입술을 적신 뒤 천천히 대답했다.
“멋진 야경입니다. 홍콩의 야경은 아직 확인하지 못해서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마카오로 온 건가요?”
“홍콩에 도착해 짐만 풀고 페리를 탔습니다.”
“이런, 그럴 줄 알았으면 내가 홍콩으로 나가는 건데요.”
한지호는 그저 웃을 따름이었다.
도박 귀신인 첸은 게임이 길어지면 약속 따위는 어기고도 남을 인물이다.
번거로워도 마카오의 카지노로 직접 찾아온 게 마음 편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언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사람이니 말이다.
한지호의 웃음에 담긴 의미를 알았는지 첸도 멋쩍게 웃었다.
“그건 그렇고, 여기까지 단순히 내 얼굴을 보려고 왔을 리는 없고. 그렇죠?”
“부탁을 하려고 왔습니다.”
“부탁?”
“블랙문 카지노에서의 게임, 기억하고 계십니까?”
한지호는 바로 본론을 던졌다.
첸과 같은 도파민 중독 환자들은 지루한 걸 절대 못 참는다.
괜히 말을 빙빙 돌리면 흥미를 잃고 자리를 뜰 확률이 높다.
다행히 첸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다소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요! 그렇게 재밌었던 미친 게임을 어떻게 잊겠어요?”
“그날의 게임에서 진 대가로 제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것 역시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 소원을 지금 말하고 싶습니다.”
“생각보다는 이른 타이밍이지만, 좋아요! 배팅은 배팅이니까.”
첸은 말을 바꾸지 않았다.
한지호의 예상대로 그는 게임에 걸린 판돈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소인배가 아니었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잔에 손을 가져갔다.
한지호는 마티니, 첸은 스코틀랜드 아일라 섬의 싱글몰트 위스키인 아드벡을 마셨다.
한 모금의 술로 목을 축인 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떤 소원을 들어주길 원하나요, 닥터 한?”
첸 역시 한지호 못지않게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졌다.
한지호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마티니를 한 번 더 마셨다.
어느새 잔이 비었다.
한 잔을 모두 비운 것이다.
“홍콩에 한의원을 열고 싶습니다.”
마티니를 비우고 나온 한지호의 소원은 예사롭지 않았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대수롭지 않은 소원으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중국과 홍콩의 의료 시장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대번에 심각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첸도 마찬가지였다.
도박에 빠져 허송세월을 하는 것 같지만 그는 칭화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다.
의료와 금융을 무기로 삼는 칭화 그룹의 황태자는 바보가 아니다.
현지에서도 그의 도박 중독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한 과정으로 여긴다.
그만큼 똑똑하고 날카로운 승부사 첸이 인상을 찡그렸다.
한지호의 소원이 얼마나 들어주기 어려운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10억 원을 마다한 게…… 이래서였군요, 닥터 한.”
“어렵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참 애매해요. 들어주기 까다로운 소원이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니죠. 그래서 더 어렵네요, 어려워.”
첸이 남아있던 위스키를 한 모금에 털어 넣었다.
아드벡은 여러 종류의 싱글몰트 위스키 중에서도 향이 강하고 독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그런 술을 반 잔 넘게 단숨에 마신 것이다.
한지호는 소원을 말하며 몇 억이 오가는 게임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첸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고 첸을 기다렸다.
재촉한다고 해서 바뀔 결과가 아니다.
원하는 것을 말했으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첸이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어도 칭화 그룹의 후계자 계승권을 달라는 식의 황당무계한 부탁이었다면 고민 할 필요도 없을 터.
그가 들어줄 수 있는 수준의 적절한 소원을 말하는 게 핵심이었다.
또 너무 쉽게 들어줄 수 있는 가벼운 소원이라면 10억 원을 받는 것만 못하다.
한지호가 내민 카드는 첸 입장에서 단호하게 거절하기도, 그렇다고 손쉽게 들어주기도 애매한 소원이었다.
들어줘야 할 사람을 고민하게 만드는 소원.
그가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서 예리한 한 방을 휘둘렀다는 뜻이다.
“닥터 한도 알다시피 중국은 매우 독특한 개방 정책을 실시하고 있지요. 특히 의료 분야라면 공안 당국이 설정해 놓은 법적인 기준을 뚫는 게 거의 불가능해요.”
“공안과 끈이 없으면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내륙이 아닌 홍콩도 사정은 비슷하다고들 하더군요.”
“맞아요. 크게 다를 게 없죠. 어떤 면에서는 홍콩 당국이 더 까다롭기도 해요.”
“힘들겠습니까?”
한지호가 다시 한 번 정곡을 찔렀다.
완곡하게 돌아가지 않고 직선으로 목적지를 가르는 질문이었다.
소원을 들어주는 게 불가능한지 묻는 그의 눈빛은 첸을 시험하는 것도 같았다.
첸은 한지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홍콩에 한의원을 열려는 이유가 뭔가요? 닥터 한의 병원은 서울에서 아주 잘 나가고 있다면서.”
“솔직하게 말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에요. 솔직하지 않은 대답이라면 들을 이유가 없지 않나요.”
“한의학으로 중의학을 이기고 싶습니다.”
추상적인 야망이다.
그러나 핵폭탄 급 발언이었다.
마카오의 야경이 한 눈에 보이는 스카이 바는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와 음악 소리로 시끄러웠다.
하지만 한지호와 첸 사이에는 쥐 죽은 듯한 적막이 감도는 것 같았다.
중국인들의 자존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다.
그들은 중국이 경제대국으로 부상하기 전에도 자신들의 세계를 천하라 부르며 세계의 중심으로 여겼었다.
하물며 홍콩인은 그런 중국인들보다 한 차원 높은 자존심을 지니고 있다.
한지호는 중국의 유구한 자존심 중 하나인 중의학을 한의학으로 누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호오라?”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첸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는 불쾌해하지 않고 흥미로워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의학으로 중의학을 이긴다고요?”
“오랜 꿈입니다.”
“기분 나쁠지 모르겠지만, 중의학이라는 뿌리에서 파생 된 줄기가 한의학이라고 들었는데요.”
“줄기가 자라 또 다른 뿌리를 이루고, 더 큰 나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하-! 역시 닥터 한은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손꼽을 정도로 재밌다니까요.”
“만족스러운 대답이었습니까?”
“만족해요. 하지만 충분한 이유는 아니지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알았다면?”
탁구를 치는 기분이었다.
한국과 중국은 세계 탁구의 양대 강국이다.
마카오의 최고급 호텔 스카이 바에서 한지호와 첸이 핑퐁을 주고받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 문장도 생각 없이 내뱉지 않았다.
한지호는 홍콩에 한의원을 열려는 또 다른 이유를 설명했다.
“두 번째 이유는 간단합니다. 돈입니다.”
“돈!”
“한국의 인구는 대략 5천만 정도라고 합니다. 그에 반해 중국에서는 백만장자만 5천만 명이 있다고 하죠.”
“그거야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요.”
“북경, 상해, 청도도 유명하지만 중국인들은 홍콩을 문화의 중심이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홍콩에 성공적으로 한의원을 열고, 서울에서처럼 VIP들을 대상으로 특진만 한다면…… 단기간에 어마어마한 부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서울에서 성공한 것처럼 홍콩에서도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완전히 다른 게임일 거예요, 닥터 한.”
“게임은 내가 플레이 합니다. 게임을 할 수 있는 판을 깔아달라는 게 제 소원입니다, 첸.”
한지호의 의사는 확고했다.
홍콩에서 성공을 하고 말고는 자신의 몫이라는 것이다.
다만 홍콩 당국과 의료계의 텃세를 뚫고 한의원을 열 수 있게 도와달라는 것이 소원임을 분명히 했다.
“하루만 시간을 주세요.”
“시간이 필요한 일인지는 몰랐습니다.”
“돈을 쓰는 일이라면 내가 결정할 수 있는데, 당국을 움직여야 하는 일이니까요. 아버지께 여쭤볼게요.”
첸이 자신의 아버지를 언급했다.
한지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칭화 그룹의 회장에게 직접 말을 하겠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아버지를 만나려니 영 껄끄럽지만, 게임에서 졌으니까 어쩔 수 없죠.”
그는 최선을 다해 한지호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한지호는 더 이상 채근하지 않고 가만히 한 손을 들었다.
그가 손을 들자 스카이 바의 직원이 곧장 다가왔다.
“마티니, 그리고 아드벡 한 잔 더 부탁합니다.”
한지호는 자신을 위해, 그리고 첸을 위해 같은 술을 더 시켰다.
결과를 예단할 수는 없지만 칭화 그룹의 후계자를 움직이는데 성공했다.
원래 한지호는 한국에서 위천 한방병원 이상의 성공을 거둔 다음 중국으로 진출하려 했었다.
그러나 계획보다 일찍 기회가 찾아왔고, 한국과 중국에서 동시에 성장하며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게 더 나은 전략인 것 같았다.
“마니티, 그리고 아드벡 17년 산 입니다.”
곧이어 직원이 한지호가 주문한 술을 가져왔다.
한지호는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건배하죠.”
“닥터 한의 소원을 위해서?”
“우리의 수교를 위해서.”
“수교…… 그래요. 닥터 한의 소원이 이뤄지는 게 내게도 기회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첸이 의미심장한 말을 뱉으며 잔을 들었다.
한지호는 그와 가볍게 건배를 했다.
어쩌면 너무 일찍 너무 큰 무대 위에 서려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첸이 그의 아버지인 칭화 그룹 회장 웨이 림을 설득해낸다면 원화 한의원 홍콩 분원을 여는 문제는 일사천리로 진행 될 것이다.
마카오의 밤이 깊어가는 가운데 꿈은 더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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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은 예전만해도 천국과 비교 되던 도시였다.
한 때 동아시아 문화를 이끌었던 중심지였고, 홍콩 출신의 영화배우들은 자연스레 아시아 전역의 스타가 됐다.
이소룡, 성룡, 이연걸, 견자단 같은 무협 스타들을 비롯해서 주윤발, 유덕화, 여명 등의 느와르와 멜로 스타들까지.
수많은 스타를 품은 홍콩이 별천지의 천국으로 여겨졌던 게 당연하다.
물론 지금은 예전과 달리 문화적 위상이 많이 낮아졌다.
명실공히 한류의 시대이기에 한국의 스타가 곧 아시아의 스타가 되는 세상이다.
그래도 여전히 홍콩 특유의 정취는 모래알 같은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영국에서 중국으로 주권이 반환된 후에도 매년 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홍콩을 찾는다.
마천루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시티 뷰 외에도 느와르적인 느낌이 살아있는 골목골목도 놓칠 수 없는 관광지다.
한지호는 이지은의 하얗고 작은 손을 꼭 잡고 홍콩 거리를 걷고 있었다.
홍콩에서 예능 촬영을 마친 이지은은 챙이 넓은 스냅백과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렸다.
관광객들이 워낙 많은 곳이고, 다들 낮에는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기에 얼굴을 숨기기 편했다.
“우와! 저거 봐, 지호 오빠.”
“줄이 엄청 긴데?”
“맛집인 거 같아. 우리도 들어가서 먹고 갈까?”
“한국 사람들도 많을 테니 테이크 아웃 해서 가자.”
“그래, 좋아!”
길 모퉁이의 딤섬집 앞에 인파가 몰려 있었다.
한지호와 이지은은 정체가 노출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도 평범한 데이트를 만끽했다.
대낮에 함께 거리를 거닐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니.
그나마 외국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서울이었다면 자동차 안이나 서로의 집, 몇 곳의 아지트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지은은 평소보다 더 신이 나 보였다.
한지호 역시 기분이 업 됐다.
첸의 연락을 기다리면서도 옆에 있는 이지은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또 언제 이렇게 한가로운 데이트를 즐길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둘은 꼭 잡은 두 손을 절대 놓지 않고 딤섬집으로 걸어갔다.
테이크 아웃 줄은 따로 있어서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우웅- 우웅-
줄을 서려는 찰나, 한지호의 주머니 속에서 스마트 폰이 울음을 토했다.
“잠시만.”
한지호는 이지은에게 양해를 구하고 폰을 꺼냈다.
스마트 폰 화면 위에는 첸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안 받을 수 없는 전화다.
과연 첸은 아버지를 설득해서 한지호의 소원을 이뤄줬을까.
아니면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 전화를 건 것일까.
잠깐이지만 온갖 상상이 머릿속을 휩쓸고 지나갔다.
“닥터 한!”
“말씀하세요.”
“지금 홍콩이지요?”
“네.”
“당장 센트럴에 있는 칭화 병원으로 와주세요. 급히 봐야 할 환자가 있어요, 얼른!”
다짜고짜 칭화 병원 센트럴 지점으로 오라는 전화였다.
칭화 그룹의 회장을 설득했는지 여부를 물을 틈도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알고 싶었다.
“왜 그래, 오빠? 무슨 일 있어?”
“정말 미안한데… 지금 센트럴 쪽으로 가봐야겠어.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일이라서. 미안해.”
“우리 이렇게 데이트 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 없잖아. 꼭 지금 가봐야만 하는 거야?”
이지은의 큰 눈동자를 마주보고 있으니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중국 진출이 가능해질지 모른다.
한지호는 꿈의 끈을 잡았고, 사랑이 이해를 해주리라 믿었다.
“서운한 거 잘 알아. 오늘보다 100배 더 멋진 데이트로 보답할게. 한 번만 이해해줘.”
“알겠어. 어쩔 수 없지…….”
이지은은 국내에서 스케줄이 제일 많은 여자 연예인 중 한 명이다.
그렇기에 항상 이해를 받는 쪽이었다.
한지호처럼 바쁜 남자를 만나 이해를 해야 하는 입장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한지호는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녀를 두고 걸음을 옮겼다.
큰길로 나와서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센트럴로 이동하는 길.
이래저래 마음이 무거웠다.
짐작할 수 없는 첸의 부름 때문에, 그리고 혼자 남겨둔 이지은 때문에.
부우우웅-
그러나 한지호를 태운 택시는 이미 속도를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