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10장, 사람이 힘이다 (2)
“오빠? 이 뉴스 봤어?”
이지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질문을 던졌다.
한지호와 이지은은 한강 둔치에 차를 세워두고 은밀히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스마트 폰을 보던 이지은이 갑자기 목소리 톤을 높인 것이다.
한지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데? 큰 일이라도 났어?”
“오빠 뉴스가 메인에 걸렸는데! 몰랐어?”
“내가? 요즘 뉴스 메인에 걸릴 일을 한 적이 없는데. 건강백서 방송 내용도 평범했고.”
궁금증이 더 커졌다.
김영찬 교수를 묻어버린 이후 한지호는 언론의 관심에서 약간 비껴나 있었다.
매주 <건강백서, 진짜! 가짜!>가 방송되지만 늘 이슈가 되는 건 아니다.
최근 몇 주 동안은 평범한 아이템을 다뤘기에 포털 메인을 장식할 일은 없었다.
“줘 봐.”
한지호가 이지은에게서 스마트 폰을 건네 받았다.
그는 이지은이 보고 있던 뉴스를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어? 어…….”
“오빠도 몰랐구나. 난 한의원에서 보도자료 낸 줄 알았네.”
“아냐, 전혀.”
황태수의 단독 인터뷰가 대한민국 주요 포털 사이트의 메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는 한지호가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자신의 아내를 치료해준 일, 그리고 일자리까지 알아봐서 새 인생을 살게 해준 일을 기자들에게 알렸다.
한지호 덕분에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희망을 찾았고, 지금은 행복한 삶을 살지만 은혜를 갚을 길이 없어서 인터뷰라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사를 쭉 읽어 내린 한지호는 네티즌의 댓글들을 확인했다.
인터넷이 대세가 된 시대이기에 포털에 달리는 댓글이 곧 여론을 반영 한다.
다행히 각 포털 사이트의 댓글은 칭찬 일색이었다.
역시 국민 한의사라는 댓글이 N 포털의 베스트 리플로 등극 돼 있었다.
그 외에도 남몰래 선행을 한 한지호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댓글들이 주를 이뤘다.
간혹 카지노 의료 자문을 언급하며 욕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다른 네티즌들에 의해 신고를 당했다.
김영찬과의 여론전에서 승리한 한지호는 황태수의 인터뷰를 통해 완벽하게 국민 한의사 이미지를 되찾았다.
백수오 파동 때 절정을 찍었던 이미지가 잠시 주춤했다가 원위치로 회복된 것이다.
“황 선생님께서 인터뷰를……. 안 이러셔도 되는데. 언론에 노출 돼서 황 선생님 부부가 당분간 시달릴까봐 걱정 되.”
“자발적으로 오빠를 도우려고 하신 인터뷰잖아.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마요.”
이지은이 한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가 앙증맞게 두 손 엄지를 치켜세웠다.
“근데 오빠 진짜 대단해! 전에 고민 많이 하던 환자분 맞지? 아무 대가도 안 받고 이런 일을 숨어서 하다니. 너무 멋진 거 아냐?”
“그냥 돕고 싶어서 도운 것뿐이야. 황 선생님의 일편단심을 보면서 배운게 많거든.”
“일편단심. 그거 참 중요한 거니까 잘 배워서 나한테만 계속 일편단심을 유지하도록 해. 알겠어요, 한지호 원장님?”
“네, 알겠습니다. 국민 여동생 이지은 씨.”
장난스럽게 농담을 주고받은 둘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이지은이 한지호를 칭찬한 건 모두 진심이었다.
웃음기가 잦아들자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난 정말 오빠가 존경스러워. 이건 순도 100% 진심이야.”
“존경?”
“사람을 고치고, 또 살리는 일을 하잖아. 인터뷰를 하신 분도 오빠 덕분에 새 인생을 얻었다고 하고.”
“그럼 나도 니가 존경스러워. 노래 하나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니까.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럴까?”
“당연하지. 니 노래를 듣고 희망을 얻는 사람들도 많잖아.”
“헤헤. 그럼 우린 서로 존경하는 커플이네?”
“우리가 자주 못 봐도 마음이 변치 않는 건 그래서가 아닐까. 서로를 존경하니까.”
“와-! 정말 그런 것 같아!”
이지은이 과장된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한지호와 이지은은 바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여느 연인들처럼 자주 만나서 데이트를 할 수 없다.
이따금 데이트를 해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한다.
들키지 않고 데이트를 해야 한다는 것은 경험해보기 전에는 절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큰 스트레스다.
그래서 연예계의 비밀 커플들은 오래 가지 못하고 일찍 헤어진다.
그러나 한지호와 이지은은 조금 달랐다.
자주 못 보고, 연락을 많이 하지 못해도 만날 때마다 서로에게 힘이 돼 주는 관계였다.
한지호는 7살이나 어린 이지은에게서 배우는 점이 많았고, 이지은 역시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지호를 보며 감탄하기 일쑤였다.
남녀관계의 애정은 3개월이면 무참하게 식는다.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의 작용만으로 연애를 오래 할 수는 없다.
남녀를 떠나 인간적인 매력으로 끌려야만 장기 연애가 가능한 것이다.
한지호와 이지은은 서로의 존재 자체에서 뿜어지는 에너지를 흠모하고 있었다.
잘 나가는 연예인과 강남의 스타 한의사.
어디를 가도 튈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이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근데 지호 오빠, 홍콩은 언제 간다고 했었지?”
“이번 달 마지막 주에. 홍콩 아니고 마카오로 바로 갈 수도 있어.”
“마카오?”
“응. 만나야 할 사람이 도박 중독자라서. 마카오의 카지노에 박혀 있을 가능성이 높아.”
“몰랐는데 나도 그때쯤 홍콩 일정이 있거든. 중국 예능에 출연하는 거라서 이틀은 일하고, 이틀은 자유 시간이야. 시간 맞으면 오빠랑 홍콩에서 봐도 좋을 텐데.”
“정말? 일정 맞춰 보자. 홍콩이나 마카오라면 여기보다 훨씬 자유롭게 다닐 수 있을 테니까.”
“볼 수 있으면 진짜 좋을 것 같아. 같이 떠나는 건 아니라도 여행 온 기분이 나겠지?”
“그렇겠다. 갑자기 더 신난다!”
한지호의 홍콩 또는 마카오 출장과 이지은의 홍콩 방문 시기가 겹치면 밀회를 즐길 수 있다.
외국에서 몰래 만나 데이트를 하면 훨씬 더 자유롭고 짜릿할 것이다.
둘 다 기분 좋은 상상으로 미소를 지었다.
한지호는 문재영 부원장에게 하루만 한의원을 맡겨둘 생각이었다.
칭화 그룹의 후계자인 첸을 만나러 홍콩이나 마카오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문재영이 자기 역할을 해주면서 예정보다 빨리 출장 일정을 잡았다.
토요일 오후에 출국해서 월요일에 돌아오는 스케줄이면 크게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실질적으로 월요일 하루만 문재영이 맡아주면 된다.
그날 하루는 부원장에게 진료를 받기 원하는 환자들만 특별 예약을 받을 것이다.
어느새 제법 많은 환자들이 문재영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부원장 진료를 받지 않더라도 한지호 곁에 문재영이 있으니 낯이 익을 수밖에 없다.
한지호에게도 문재영의 존재는 큰 힘이 되고 있었다.
그가 있기에 홍콩 출장 일정도 빨리 잡는 게 가능했다.
앞으로도 한지호가 대국적인 일을 도모하는데 있어 문재영은 든든한 조력자가 돼 줄 것이다.
자발적인 깜짝 인터뷰로 한지호의 이미지를 높여준 황태수, 묵묵히 일을 배우며 뒷받침 해주는 문재영, 그리고 만날 때마다 활력을 선물해주는 이지은.
이 모든 사람들이 한지호의 가장 큰 자산이다.
지방에서 위천 한방병원 지점을 돌아다니고 있는 조기운과 원화 한의원 직원들, 명징약초의 최치우도 빼놓을 수 없다.
한의학계의 신성(新星) 한지호가 빠른 속도로 하늘 높이 떠오른 배경에는 여러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도움이 있었다.
역사 속 많은 영웅들은 자기 혼자 잘난 줄 알고 우쭐대다가 몰락한다.
한지호의 전생인 삼국지 시대에도 그런 영웅들을 숱하게 찾을 수 있다.
끝까지 살아남아 역사에 족적을 남기는 영웅들은 사람을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자기밖에 모른다는 효웅 조조는 사실 그 어떤 군주보다 인재를 중시하고 등용하는데 집중했었다.
그렇기에 위나라가 천하의 중심, 중원을 집어삼킬 수 있었던 것이다.
전생의 규호는 조조로 인해 사부인 화타를 잃고 천하를 주유해야 했었다.
그러나 조조로부터 배울 게 아주 많았다.
한지호는 전생의 은원(恩怨)에 얽매이지 않기에 역사 속 조조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을 더욱 귀하게 여겨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미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현대의 효웅 조준혁과 자웅을 가리기 위해서는 더 뛰어난 인재들이 필요하다.
“지호 오빠, 무슨 생각해?”
한지호가 잠시 상념에 빠져 말이 없어지자 이지은이 그를 불렀다.
다시 현실 속 벤틀리 안으로 돌아온 한지호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랑 홍콩 가서 놀 생각했지.”
천연덕스럽게 여자가 원하는 대답을 하는 걸 보니 한지호의 연애 스킬도 좀 나아진 모양이다.
이지은은 만족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좋은 거짓말은 알면서도 속아주는 게 여자다.
두 사람이 달콤한 사랑의 언어를 나누는 가운데 한강의 밤은 더욱 어두워졌다.
한지호는 잠시 모든 생각을 꺼두고 눈앞의 귀여운 연인에게 집중했다.
아름다운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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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 더워.”
한지호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홍콩의 더위는 살인적이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진 실내를 벗어나면 더위가 숨통을 옥죄고 들어온다.
여름이 코앞으로 다가왔기에 서울의 기운도 제법 올랐다.
하지만 홍콩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차라리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동남아가 훨씬 나을 것 같았다.
홍콩의 더위는 끈적끈적한 습도를 동반하고 있기에 불쾌지수를 최고점으로 높인다.
멀쩡한 사람도 홍콩에서 10분 넘게 걸어다니면 성격 파탄자가 될지 모른다.
워낙 덥고 습해서 옆에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는 걸 극도로 경계하게 되는 것이다.
홍콩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리츠 칼튼에 짐을 푼 한지호는 택시를 타고 페리 선착장으로 나왔다.
역시 첸은 마카오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카오 대신 홍콩에 호텔을 잡은 건 순전히 이지은 때문이다.
그녀는 한지호보다 하루 먼저 홍콩에 도착해 예능을 촬영하는 중이었다.
런닝맨의 메가 히트 이후 중국 대륙에서는 한국 예능이 대세가 됐다.
국민 여동생 이지은 역시 중국의 러브콜을 받고 홍콩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찍는 것이다.
그녀와 하루라도 여행 기분을 내기 위해 홍콩 리츠 칼튼을 선택한 한지호는 대가를 톡톡히 치루고 있었다.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더운 날씨에 페리를 타러 잠시 걷는 것조차 짜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미리 예약해둔 티켓을 보여주고 페리에 탑승했다.
다행히 페리 실내에는 에어컨이 나온다.
이런 날씨에도 갑판에 나가서 구경을 하는 관광객들이 보였다.
에어컨 가까운 자리에 앉은 한지호는 관광객들의 의지에 혀를 내둘렀다.
“진짜 대단하다. 실내를 놔두고 갑판에 서있다니……. 역시 의지의 한국인들이야.”
페리 갑판에서 연달아 셀카를 찍는 여자 관광객들이 위대하게 느껴졌다.
인증샷을 남기겠다는 한국 관광객의 의지는 홍콩의 무더위로도 꺾을 수 없는 모양이다.
뿌우우- 뿌우우우-
페리가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물살을 갈랐다.
머지않아 동양의 작은 유럽이라는 마카오에 도착할 것이다.
첸은 마카오의 특급 호텔로 한지호를 초대했다.
보나마나 특급 호텔에 딸린 카지노에서 억대의 도박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한지호는 블랙문 카지노에서처럼 게임에 참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첸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말할 것이다.
게임에서 진 대가로 조준혁은 3억 6천만 원을 잃었고, 첸은 한지호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홍콩을 뒤흔드는 칭화 그룹의 후계자에게 소원을 말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첸, 당신은 내 적토마가 되어야 합니다.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가장 먼저 달려 나가는 적토마.’
한지호의 몸에서 에어컨 바람보다 더 강한 기파가 뿜어져 나왔다.
홍콩과 마카오, 그 너머의 중국 대륙을 향한 포부가 구체화 되고 있었다.
- 6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