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24화 (124/255)

# 124

10장, 사람이 힘이다 (1)

“선생님!”

한지호가 팔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저만치에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던 중년 남성이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한지호의 인사를 받은 중년인도 환하게 웃었다.

그는 마치 엄마를 발견한 어린 아이처럼 한지호 앞으로 달려왔다.

중년의 나이가 무색해질 만큼 활기찬 걸음이었다.

“한 원장님!”

한지호가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황태수였다.

그의 부인은 한지호 덕분에 광전증에서 벗어났고, 한 쪽 눈의 시력을 잃었지만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황태수도 한지호의 소개로 유건영을 통해 일자리를 얻었다.

오랜 기간 경력이 단절 된 상황이라 좋은 일자리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유건영이 꽤 신경을 써서 대형 빌딩의 경비원으로 취직을 시켰다.

황태수는 이만한 직업도 감사할 뿐이라며 두 번째 인생을 사는 중이었다.

한지호는 간간히 그의 소식을 들었지만 일하는 곳으로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마침 원화 정의 네트워크에 소속된 한의원이 근처라서 생각난 김에 들린 것이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사모님은 잘 계시죠?”

“원장님 덕분에 새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와이프도 많이 건강해졌고, 요즘은 뜨개질 클래스에도 다닙니다. 열심히 배워서 뜨개질 강사가 되겠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꿈도 못 꿨던 일인데…….”

“정말 다행이네요. 두 분이 잘 지내신다고 하니 듣기만 해도 행복합니다.”

“원장님이 아니었으면 이런 삶을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저희 부부는 평생 원장님께 빚진 마음으로 살아가야지요.”

“두 분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는 게 빚을 갚는 일입니다.”

한지호는 부드럽게 웃으며 챙겨온 것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서 하얀 박스를 넘겨 받은 황태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무엇인지요?”

“보약입니다. 사모님 드시라구요. 황 선생님이 뺏어 드셔도 됩니다. 체질 상관없이 기를 보하는 약재로 지은 것이니까요.”

“아이고, 아이고-! 제가 신세진 것만 해도 평생 못 갚을 터인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전 이거 못 받습니다, 원장님.”

“받으세요. 서운하시겠지만 이건 그렇게 비싼 약도 아니에요.”

“원장님께 진료 받으려면 최소 몇 백만 원이 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 아내를 무료로 고쳐주시고 제게 일자리까지 주셨는데, 또 이렇게 은혜를 베푸시면 제가 부끄러워서 어찌 할지 모르겠습니다.”

“계속 사양하시면 정말 삐질지도 몰라요.”

“어휴….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내가 또 고마워서 울지 모르겠네요, 원장님.”

황태수가 보약이 든 하얀 박스를 넘겨 받았다.

한손에 들고 있던 약을 선물해준 한지호는 티 없이 환하게 웃었다.

그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남을 돕는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황태수를 통해 배웠다.

황태수 아내의 광전증을 치료해준 뒤로 원화 한의원의 의료 봉사에도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다.

더 많은 돈을 버는 것, 그리고 더 높이 올라가는 것에만 집중하던 한지호에게 황태수는 낮은 곳을 돌아보게 만든 소중한 계기였다.

한지호 자신의 고향이자 출발점이었던 세상의 낮은 곳.

그곳에서도 사람들은 사랑과 의리를 지키며 어떻게든 세월을 버티고 있다.

황태수 부부가 선사해준 교훈과 감동은 돈으로 값을 따질 수 없는 것이었다.

“큰 빌딩이라 일이 쉽지 않을 텐데, 황 선생님도 몇 포 챙겨서 사모님이랑 같이 드세요.”

“꼭 그러겠습니다, 원장님. 따로 시간을 내서 저를 보러도 와 주시고……. 아내가 조금만 더 나아지면 같이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제가 종종 찾아뵈러 올게요.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한지호는 쾌활하게 인사를 마치고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황태수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왜 아니겠는가.

황태수에게 있어 한지호는 하늘이 내려운 동아줄이었다.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 평생 어렵게 모시며 살아야 할 은인으로 여기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한지호는 그런 대우를 바라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움직였기에 황태수의 아내를 치료한 것이고, 이후에도 계속 잘해주는 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내켜서이다.

보약을 전달하고 돌아온 한지호는 발걸음이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의술의 힘은 위대하다.

단순히 한 사람을 낫게 하고 살리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환자와 그 가족들의 인생 전체를 뒤바꿀 수 있는 게 바로 의술이다.

한지호는 침 끝의 무게를 되새기며 차에 올라탔다.

엑셀을 밟는 기분도 평소보다 산뜻했다.

+++

“원장님, 제가 오늘 진료하고 시술한 환자들 리스트입니다.”

말끔한 인상의 부원장이 차트를 내밀었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 소속 최 원장의 한의원에서 일하던 부원장은 얼마 전부터 한지호에게 일을 배우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네트워크 한의원끼리의 교육 실습이다.

믿을 수 있는 인력을 키워내서 네트워크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제도다.

한지호는 최 원장이 보내준 부원장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나이는 자신보다 몇 살 많지만 전혀 티를 내지 않았고, 시키는 건 무엇이든 군말 없이 소화했다.

간혹 한의학적 견해가 달라도 한지호에게 배움을 얻으려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똑같은 한의사 면허를 지녔고, 게다가 따지고 보면 선배임에도 자신이 교육을 받으러 온 부원장 신분임을 망각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을 볼 때 가장 중요한 건 뭐니 뭐니 해도 태도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실력이 출중해도 태도가 글러먹은 사람은 곧 한계를 드러낸다.

반면 태도가 좋은 사람은 부족한 재능과 실력을 끝끝내 극복해내는 경우가 많다.

한지호는 부원장의 태도에 주목했고, 지난 한 달 가까이 그를 성장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직접 진료 해보니까 어때요?”

“원래 한의원에 있을 때와는 느낌이 많이 달랐습니다. 최 원장님 밑에서는 다양한 환자들을 경험할 수 있었고, 여기서는 VIP 환자들을 봐야 하니 진료부터 시술까지 아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했습니다.”

“다 똑같은 환자이지만, 원하는 게 다르죠. 현대 사회의 의사는 환자의 니즈를 분석하고 맞춰주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네. 이 기회가 아니었으면 절대 몰랐을 것들을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부원장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한지호는 표정을 풀지 않고 그가 건네준 진료 차트를 살펴봤다.

“음… 이인호 환자에게는 침을 놓지 않고 약만 처방했군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차트에 적은 것처럼 침을 놓아야 하는 혈자리 부위의 피부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습니다.”

“침을 놓기 힘들 정도로?”

“환부를 피하면 침을 놓을 수야 있지만, 정확한 혈도에 자극을 주는 게 아니라면 차라리 안 놓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대신 약재로 피부 재생을 돕는 황련(黃連)과 황백(黃柏), 연교(連翹)와 금은화(金銀花), 그리고 판람근(板藍根)을 처방했습니다.”

부원장의 설명을 들은 한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된 판단이었고, 나무랄 구석이 없는 처방이었다.

마음 같아선 환하게 웃으며 칭찬해주고 싶었지만 아직 검토해야 할 게 남았다.

한지호는 한 달 넘게 대기해야 하는 오래된 예약 환자들의 경우 의사를 물어 부원장이 치료하게 해봤다.

대신 한지호가 직접 볼 때보다 진료비는 낮아지고,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생각보다 많은 환자들이 부원장의 진료를 받아들였다.

한지호의 명성을 보고 원화 한의원을 찾는 것이지만, 예약이 너무 힘들고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환자들은 어차피 같은 한의원에서 진료를 받는 것이니 부원장이 나서도 한지호의 영향 아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 덕에 부원장은 기대 이상의 임상 실습을 하며 경험치를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임미향 환자와 최필선 환자를 진료한 부분은 빈틈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마지막으로 본 김재우 환자, 요통이 있어서 왔다고 했죠?”

“네. 디스크 수술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계십니다.”

“약재 처방도 좋고, 침을 놓은 것까지도 좋은데 후속 조치가 아쉽습니다.”

“후속 조치라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요통 부위에 침을 놓으면 일시적으로 통증이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환자들이 불안해하는 경우가 많고, 불안증이 커지면 없던 병도 생깁니다. 이에 충분한 안내는 물론이고, 침술로 자극시킨 근육과 혈도를 진정시키는 별도의 조치를 취하는 게 좋습니다.”

“아…… 그렇게까지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원장님.”

“나도 처음엔 그랬어요. 하지만 원화 한의원을 열고, VIP 시스템에 맞게 환자 한 분 한 분과 길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되더군요. 환자들이 어떨 때 불안해지는가, 진료를 마치고 돌아가서도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 고민 끝에 답을 찾아가고 있는 겁니다.”

부원장은 감명을 받은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진료를 할 때만 환자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돌아가서의 통증과 멘탈까지 염려하고 알맞은 처방을 내리는 한지호가 새삼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그가 괜히 젊은 나이에 강남 바닥을 주름잡으며 한의학계의 신성으로 떠올랐는지 알 것 같았다.

부원장은 방금 전의 가르침을 잊지 않기 위해 얼른 메모를 했다.

한지호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비로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최 원장님에게 말해서 몇 달 더 우리 한의원에 있게끔 해놓았습니다. 물론 부원장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이번 달을 끝으로 복귀해도 됩니다.”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원화 한의원에서 더 배우고 싶습니다!”

부원장은 혹시 한지호가 말을 바꿀까봐 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평소답지 않게 허둥거리는 모습이 순수해 보였다.

한지호는 처음으로 부원장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문재영 부원장님. 그럼 앞으로도 잘 지내봅시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원장님!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문재영 부원장이 허리를 90도로 꾸벅 숙였다.

한지호는 그를 바라보며 예전부터 품었던 생각을 단단히 다졌다.

그는 최 원장과 잘 의논해서 문재영 부원장을 아예 스카웃 할 작정이었다.

최 원장 입장에서는 아쉽겠지만, 같은 네트워크 소속으로 서로에게 득이 된다면 충분히 이해해 줄 것이다.

대신 한지호는 예정보다 자주 최 원장의 한의원에 방문해서 진료를 봐주면 된다.

TV에 나오는 명의 한지호가 방문 진료를 하면 최 원장의 한의원 운영에도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더불어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공고한 결속력도 홍보가 될 것 같았다.

한지호는 마음을 먹었음에도 문재영에게 바로 계획을 알려 주지는 않았다.

몇 달 더 지켜보면서 사람 됨됨이를 완전히 확인하려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태도를 보이며 성실하게 경험을 쌓는다면, 문재영은 무리 없이 원화 한의원의 부원장이 될 터였다.

지방 한의대 출신으로 한의학계에서 특별히 빛을 볼 가능성이 적었던 문재영에게 큰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유일무이한 VIP 시스템을 자랑하는 원화 한의원의 첫 번째 부원장이 된다는 건 엄청난 일이다.

단숨에 문재영 개인의 가치와 지명도가 급상승 할 게 확실하다.

그는 원화 한의원에서 몇 달 더 일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눈에 띄게 기뻐하고 있었다.

만약 정식으로 원화 한의원의 부원장이 되라는 제의를 받으면 숨이 넘어갈지도 모른다.

한지호는 꾸밈없이 속내가 다 드러나는 문재영의 표정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특출나게 똑똑해도 신뢰하기 어렵다.

그가 조기운을 좋아하는 것도, 문재영을 마음에 들어 한 것도 겉과 속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조기운과 문재영은 속마음을 감추고 두 마음을 품을 정도로 머리를 팽팽하게 돌리지는 못한다.

가끔씩은 너무 우직한 모습을 보여서 답답함이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일을 믿고 맡기기엔 그런 성품이 제격이다.

언제 어느 때 얼굴을 바꾸고 나를 잡아먹으려 들지 모르는 장수에게 칼을 맡길 수는 없다.

동탁은 여포라는 천하제일의 무장을 양아들로 뒀지만, 결국 여포에게 당하고 말았다.

지혜로운 군주라면 여포보다 무력이 떨어져도 더 믿음직스러운 장수를 호위무사로 쓸 것이다.

“부원장님이 우리 한의원에 더 오래 있게 됐으니 축하 회식을 해야겠군요. 내가 한우를 쏠 거라고 다른 직원들에게 전해줘요.”

“네, 원장님. 저도 한우 참 좋아합니다!”

씩씩하게 대답한 문재영이 원장실 밖으로 나갔다.

퇴근 전에 각자 업무를 마무리하고 있는 간호사 팀과 코디네이터 팀, 데스크 팀에게 회식 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한지호는 문재영을 내보내고 홀로 남아 눈을 빛냈다.

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벼린 칼날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문재영 부원장이 자리를 잡으면 생각보다 일찍 홍콩에 갈 수 있겠어. 기운이와 오대경이 위천 한방병원의 빈틈을 조사하고, 나는 홍콩에서 첸을 만나 중국 진출을 의논하면 일거양득! 내실을 다지고 외연도 확대할 수 있다.’

삼국지 시대에 천하(天下)라 불렸던 중국.

21세기에 이르러 다시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

그 드넓은 대륙에 한지호의 이름으로 깃발을 꽂을 날이 멀지 않았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도, 사람을 키우는 것도, 블랙문 카지노에 투자해 자금을 불리는 것도 모두 더 큰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한의학으로 천하를 통일한다.

한지호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그가 쓴 시나리오가 진짜 영화가 될 날이 성큼 다가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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