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8장, 현대의 효웅(梟雄) (2)
자단목의 은은한 향이 감도는 넓은 방 안에 한지호, 조준혁, 첸, 세 명만이 남았다.
조준혁이 특별한 게임을 위해 딜러를 내보냈기 때문이다.
원래 카지노의 어느 테이블에서건 딜러가 없는 장면을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세상에 절대 안 되는 일 같은 건 없다.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조준혁과 첸, 두 사람은 지구 어디에 가도 예외를 만들어낼 수 있는 특별한 인물이다.
한지호는 말없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수십억 원 가치의 칩들이 쌓여 있다.
천만 원짜리 칩을 잃은 한지호 앞에는 9억 9천만 원의 칩이, 그리고 조준혁과 첸은 각각 30억 정도의 칩을 쌓아두고 있었다.
은행 금고도 아니고 테이블 위에 70억 원 가까운 돈이 올려져 있는 셈이다.
비현실적인 풍경이라 오히려 실감이 가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한지호는 조준혁의 속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블러핑으로 김우창을 만신창이로 만든 것까지는 좋았다.
한지호도 본격적으로 게임에 뛰어들어 조준혁과 부딪쳐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김우창을 쫓아낸 그가 갑자기 특별한 게임을 제안한 건 예상 밖이었다.
그것도 판돈 대신 소원을 들어주는 조건이라니, 어쩌면 몇 억짜리 칩을 거는 것보다 더 위험한 승부다.
그때 중앙에 앉은 첸이 입을 열었다.
“나야 재미만 있으면 되니까, 그리고 서로의 소원을 배팅하는 것이니까 아무 불만은 없어요. 그런데 의술로 하는 게임이 뭔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말을 마친 첸이 조준혁을 쳐다봤다.
조준혁은 칭화 그룹 황태자의 눈빛을 받으며 유려하게 대답했다.
마치 예전부터 이런 게임을 준비했던 사람 같았다.
“최근 한지호 원장님의 명성은 한국 내에서 따를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기회에 그 신묘한 의술을 직접 체험해보고 싶지 않습니까?”
“신묘한 의술(mysterious medical techniques)라…….”
첸의 영국식 엑센트가 한지호의 귀에 또박또박 꽂혔다.
그는 말을 꺼낸 조준혁의 눈동자를 노려봤다.
저절로 눈빛에 힘이 실렸다.
‘시험하겠다는 건가? 나를?’
이제야 조준혁의 의도가 보였다.
어쩌면 그가 오늘 블랙문 카지노에 온 것도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한지호가 방문하는 날에 맞춰 판을 짠 것이다.
목적은 간단하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한의학계의 스타 한지호가 진짜배기인지 가짜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단순한 음모론이 아니라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진짜 조준혁의 의도대로 판이 흘러가고 있었다.
“한지호 원장님. 영화배우 김해수 씨를 치료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자기 왼손을 다치게 만들고, 눈앞에서 바로 붓기를 가라앉혔다고. 맞습니까?”
한지호는 깜짝 놀랐다.
김해수와의 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건영의 소개로 김해수를 만났던 한지호는 신뢰를 사기 위해 왼손을 자해했고, 그녀가 보는 자리에서 붓기를 치료했었다.
그 뒤에 김해수가 자신의 알몸을 보여주며 구음절맥 치료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조준혁이 그때의 일을 알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아냐,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왔으나 꾹꾹 억눌렀다.
한지호는 뜨거워진 심장을 진정시키며 냉정하게 머리를 돌렸다.
“김해수 씨에게 이야기를 들으셨군요.”
아는 사람이 둘 밖에 없는 일이니 김해수가 직접 말해줬을 것이다.
조준혁 정도의 인물이라면 김해수와 알고 지낼 가능성이 충분하다.
정작 깊은 관심을 보인 건 첸이었다.
자연스레 영어로 나눈 둘의 대화를 듣고 첸이 눈을 번뜩였다.
“정말? 정말인가요? 자기 손을 다치게 만들고, 그 자리에서 바로 치료했다는 게?”
“한지호 원장님께서 인정하시는 걸 보니 정말인 모양입니다.”
“와우-!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미친, 아, 미안해요. 완전 재밌는 사람이었네요, 닥터 한!”
첸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는 조준혁이 블러핑으로 김우창을 박살내는 걸 보고 간만에 제대로 된 적수를 만났다면서 기뻐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한지호도 만만치 않은 별종인 걸 알게 되자 흥분할 수박에 없었다.
어중이떠중이들과 몇 억을 걸고 도박을 하는 것보다 진짜배기들과 위험한 내기를 하는 게 훨씬 스릴 넘친다.
첸이 흥분하자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조준혁은 포커페이스를 지키며 자신이 생각한 게임의 룰을 설명했다.
“솔직히 말해서 김해수 씨의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의문이 갑니다. 만약 한지호 원장님께서 그때와 똑같은 방법으로 의술을 증명한다면 이전 게임에서 딴 3억 6천만 원을 드리겠습니다. 아니면 소원 한 가지를 들어드리는 것도. 어떻습니까?”
그는 한지호의 의술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려 했다.
방송에 나와 유명세를 타고, 젊은 한의사들을 규합해 소장파 세력과 원화 정의 네트워크를 만든 한지호가 과연 진짜 실력자인지 시험하려는 것이다.
만약 한지호가 소문처럼 대단한 의술을 지녔으면 위천 한방병원이 가장 경계해야 할 인물이다.
그게 아니라면 언젠가 빠질 거품이기에 내버려둬도 무방하다.
조준혁은 지금의 위천을 만든 장본인으로서 위협적인 적의 그릇을 판단하려는 것 같았다.
“그때처럼 자해를 하라는 것입니까?”
“한 원장님께 다시 강요를 할 수는 없으니 내 왼손을 다치게 만들겠습니다. 자신이 없다면 편하게 나가도 됩니다. 김우창 상무처럼.”
김우창처럼 미숙한 패배자 취급을 받으며 나갈 것인가, 아니면 조준혁의 게임에 응할 것인가.
의도적인 도발인 걸 알지만, 한지호는 승부를 피하고 싶지 않았다.
도파민이 마구 분비되는지 얼굴까지 빨개진 첸은 판을 키우며 열기를 일으켰다.
“3억 6천? 최소 배팅이 36만 달러! 좋아요, 아주 좋아요. 난 뭘 걸어야하지……. 돈? 소원? 아니, 그전에 진짜 눈앞에서 타박상을 바로 치료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에요?”
“어디에 걸겠습니까? 가능하다, 불가능하다.”
조준혁의 부추김에 잠시 고민하던 첸이 엄지를 거꾸로 들었다.
“불가능.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하니 그쪽에 내 소원을 걸게요. 만약 곧바로 눈에 띄는 치료 효과가 나타난다면 무슨 부탁이든 들어주고, 반대라면 닥터 한의 칩을 전부 내놓도록 해요.”
당당한 배팅이었다.
첸은 자신의 소원 하나와 한지호가 가진 9억 9천만 원짜리 칩을 동일 선상에 놓고 있었다.
엄청나게 불리한 조건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어떤 소원을 말하느냐에 따라 9억 9천은 우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칭화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인 첸 앞에서 신용을 논하는 건 무의미한 짓이다.
한지호가 받아들이기만 하면 게임이 시작된다.
조준혁의 시선이 칼날처럼 꽂혔다.
- 주저하지 말고 너 자신을 증명해라, 위천이 경계할 인물인지 진가를 보여라. 자신 없으면 머리를 숙이고 사라져서 조용히 살아라. -
그는 입을 닫고 있었지만, 마치 눈빛으로 말을 하는 것 같았다.
한지호는 조준혁의 도발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피할 길이 없는 게임이다.
“조준혁 이사장님께서 저를 시험하고 싶으신 것 같은데, 한의학계의 후배로서 마다할 수 없군요.”
“이로서 우리의 게임이 성립 됐습니다.”
“불가능에 배팅을 한 이사장님과 첸, 두 분은 기억에 남을 뼈아픈 패배를 경험하게 될 겁니다.”
한지호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의 선언에 첸은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고, 조준혁은 살짝 눈썹을 꿈틀거렸다.
거의 처음 보이는 미세한 표정 변화였다.
한지호의 당찬 도발에 반응한 것이다.
‘당신도 사람이었군.’
조준혁은 금방 포커페이스를 회복했지만 한지호는 만족스러웠다.
짧게나마 단단한 무표정을 깼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시험이라면 즐겨야지. 그리고 경악하게 만들어야지.’
각오를 굳힌 한지호의 눈빛이 한층 매서워졌다.
아주 간단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면 미쳤다고 손가락질할 게 분명한 게임이 시작됐다.
“침은 있습니까? 더 필요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준비해도 됩니다.”
“카지노 의무실에 가져다놓은 침이 있습니다. 다른 건 필요 없습니다.”
조준혁이 벨을 눌렀다.
직원을 불러 의무실에 있는 침을 가져오게 하려는 것이다.
“별 기대 없이 놀러왔는데 이런 재밌는 게임을 하게 될 줄이야……. 결과가 어떻게 되든 두 사람 다 홍콩에 오면 내게 연락해요. 나도 이만큼 재밌는 걸 보여줄 테니까.”
첸이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한지호는 그의 말을 흘려듣지 않고 가슴 깊이 묻어뒀다.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지만 첸과의 인연은 언젠가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얼마 전에 나갔던 딜러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의무실 내 책상 서랍에 침 케이스가 있을 겁니다. 여기로 가져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난데없이 침 케이스를 가져오라니 황당할 법도 했지만 딜러는 그저 고개를 숙였다.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않는 것, 어떤 일에도 호기심을 품지 않는 것.
이 두 가지가 VVIP들을 상대하는 카지노 딜러의 기본 소양이다.
“기다리기 힘들어요, 기다리기가.”
첸은 계속해서 손목시계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언뜻 보이는 그의 시계 다이얼에 파텍 필립(patek philippe)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파텍 필립? 역시 레벨이 다르군.’
한지호는 내심 감탄했다.
파텍 필립은 전세계의 수많은 시계 브랜드 중에서 부동의 1위 자리를 놓치지 않는 살아있는 전설이다.
가장 저렴한 모델이 2천만 원이 넘는다.
몇 억에서 시작해 10억이 넘는 모델들도 즐비하다.
시계는 몰라도 파텍 필립은 아는 게 상식이다.
한지호는 새삼 첸이 홍콩 의료계와 금융계를 장악한 칭화 그룹의 후계자라는 걸 되새겼다.
그러고 보니 조준혁의 왼손에서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멀리서 시계 다이얼에 새겨진 글자를 읽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한지호는 오금희를 익혀 평범한 인간의 육체 능력을 초월한지 오래다.
시각에 기운을 집중시키니 조준혁 역시 파텍 필립을 차고 있는 게 보였다.
손목에 편히 차고 있는 시계만으로도 두 사람의 클래스가 입증 됐다.
한지호는 자신이 하늘 위의 거물들과 나란히 앉아 위험한 게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방심은 금물이다.
아무리 유리한 게임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언제든 잡아먹힐 수 있다.
똑똑똑-
그때 다시금 노크 소리가 울렸고, 익숙한 얼굴의 딜러가 침 케이스를 건네준 뒤 사라졌다.
“시간 끌지 말고 시작해봅시다.”
조준혁이 입을 열었다.
특별한 게임을 제안한 그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왼손을 높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텍사스 홀덤을 플레이했던 테이블은 단단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지하 2층 VIP 공간의 프라이빗 룸답게 게임 테이블도 격이 달랐다.
그렇기에 왼손을 내려쳐 고의로 부상을 입히기 충분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니 제법 배짱이 두둑한 사람이라도 자해(自害)를 하기 어렵다.
멀쩡한 손을 대리석에 내려쳐서 다치게 만드는 건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범인의 선을 넘어버린 사람들은 하나같이 정상이 아닌 것인지, 한지호가 김해수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조준혁도 팔을 휘둘렀다.
부웅-
퍽! 빠각!
어설픈 내려치기가 아니었다.
조준혁은 풀스윙으로 팔을 내려쳤고, 그의 왼손과 부딪친 게임 테이블이 흔들거렸다.
“읍.”
그도 사람인지라 신음을 흘렸다.
대리석에 손을 갖다 박았는데 아프지 않으면 인간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비명을 지르지 않고 신음을 흘리는 정도에서 그쳤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어도 조준혁의 정신력은 일반인의 경계를 한참 초월한 것 같았다.
“이거 정말 장난이 아닌데요.”
흥분해있던 첸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조준혁의 얼굴은 피가 쏠려 새빨개졌고, 왼손은 터질 것처럼 퉁퉁 부었다.
한지호는 굳은 표정으로 케이스를 열고 침을 손에 잡았다.
그는 조준혁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저를 시험하고 싶었다면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차라리 제가 스스로를 다치게 한 뒤 치료하라고 해도 되고 말입니다.”
한지호의 질문을 받은 조준혁이 씨익 웃었다.
왼손이 부서진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와중에도 입꼬리를 말아 올린 것이다.
내내 무표정이던 그의 미소는 보는 사람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 무엇도 믿을 수 없으니까. 난 나밖에 안 믿는 사람입니다.”
조준혁의 본심이 튀어나왔다.
한지호는 이제야 그가 어떤 인물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자기 자신 외에는 누구도 믿지 않는 사람, 그래서 모든 걸 경험하며 스스로를 완벽하게 만들어가려 애쓰는 사람.
그는 인상만 닮은 게 아니라 성향까지 삼국지 시대의 효웅 조조를 닮아 있었다.
전생에서 조조는 규호의 사부인 화타를 죽였다.
하지만 현대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한지호는 조준혁이 쌓아올린 위천 한방병원의 아성을 위협하는 루키가 됐다.
그리고 지금, 서로를 시험하는 게임을 하는 중이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얼마든지.”
한지호가 퉁퉁 부어 보기 흉해진 조준혁의 왼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단전에 깃든 오금희의 기운은 손끝을 거쳐 침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몇 개의 침으로 즉시 놀라운 치료 효과를 보여야 한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에 조준혁과 첸은 배팅을 했다.
그 불가능함을 뛰어 넘으면 한지호가 게임에서 승리하게 된다.
김해수 앞에서 자기 손을 치료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긴장감이 느껴졌다.
“후우-.”
심호흡을 마친 한지호가 첫 번째 침을 놓았다.
비밀의 공간에서 펼쳐진 비밀스러운 게임의 결과가 곧 나타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