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17화 (117/255)

# 117

6장, 돌풍 (2)

스스슥-

네 명의 한의사들이 서류에 사인을 마쳤다.

단순한 계약서에 서명을 한 게 아니었다.

한지호에게 힘을 보태서 김영찬 교수를 찍어냈던 젊은 한의사 13명 중 네 명이 모였다.

그들이 모여서 모종의 서류에 사인을 한 장소는 다름아닌 원화 한의원이다.

동석한 사무장 박우식이 젊은 원장들의 서명이 날인된 서류를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한지호는 원장들 한 명 한 명에게 일일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최 원장님, 김 원장님, 박 원장님, 이 원장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해봅시다.”

“우리야 한 원장만 믿고 따르는 거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아래에서 덕담이 오고갔다.

한지호는 뜻을 모았던 13명의 젊은 원장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해왔다.

그 중에서 특히 마음이 잘 맞고 사람이 괜찮은 네 명과 힘을 합치기로 했다.

협회 내부의 소장파 세력을 형성할 뿐 아니라 실질적인 한의원 운영도 함께 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오늘은 업무 협약 계약을 정식으로 체결한 날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위천 한방병원처럼 프랜차이즈 형태를 구축한 건 아니다.

업무 협약을 맺은 네 명의 젊은 원장들은 지금처럼 각자 한의원을 운영하면 된다.

한의원 이름을 바꾸지도 않고, VIP 전문이라는 독특한 경영 방식을 획일적으로 적용하지도 않는다.

다만 총 5곳의 한의원이 네트워크를 맺었음을 선포하고, 다양한 방식의 교류를 통해 서로의 장점을 배우면서 도움을 주고받게 될 것이다.

39살의 최 원장 같은 경우 무려 세 명의 부원장을 고용할 정도로 제법 큰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이제 필요에 따라 최 원장 밑의 부원장들이 원화 한의원에 와서 수련도 받고, 일손을 도울 수도 있게 됐다.

한지호도 가끔씩 4곳의 한의원을 돌아다니며 특별 진료를 실행할 계획이었다.

힘을 모아 시너지 효과를 만들고, 프랜차이즈는 아니지만 믿음이 가는 브랜드를 구축하는 것.

그것이 젊은 원장들과 업무 협약을 체결한 이유였다.

사실 한지호는 중국 대륙 진출의 꿈을 늘 마음 한 구석에 품고 있었다.

그가 중국에 힘을 쏟게 되면 상대적으로 국내의 원화 한의원 운영에는 공백이 생긴다.

그때를 대비해 네트워크가 필요한 것이다.

한지호가 한국에 없을 때, 네트워크에 소속된 젊은 원장들이나 새롭게 키운 부원장들이 원화 한의원을 맡아줄 수 있다.

물론 한지호가 직접 진료할 때와 비교해서 비용은 저렴해질 것이다.

어쨌든 다양한 방법으로 한의원 운영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이점이 된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 이름부터 특별한 느낌이 팍팍 온다니까. 그렇지 않은가, 다들?”

최 원장이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동의를 구했다.

다른 원장들도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지호는 고심 끝에 원화 정의 네트워크라는 브랜드 네임을 정한 것이었다.

원화라는 이름이 가장 먼저 나와서 한지호가 중심이 되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게 했다.

그 뒤에 붙은 정의라는 단어는 중의적으로 쓰인다.

사람들이 흔히 쓰는 정의롭다의 정의이면서 동시에 정의(正醫)라는 뜻도 된다.

바른 의원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원화 한의원을 중심으로 모인 바른 한의사들의 네트워크.

이것이 바로 원화 정의 네트워크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문장이다.

한지호는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대표 원장으로 브랜드의 신뢰 구축을 위해 앞장 설 것이다.

네트워크의 브랜드 가치가 높아지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거대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한지호의 머리에는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설립은 그러한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계기가 될 것 같았다.

“오늘을 기념하기 위해 역삼동에서 제일 맛있는 식당을 수배해 놓았습니다.”

“한 원장님의 초이스이니 기대 많이 하겠습니다.”

“우리 다섯이 먹다 넷이 죽어도 모를 겁니다.”

계약서 작성을 마쳤으니 뒤풀이를 할 차례다.

한지호와 네 명의 원장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우식은 따로 남아서 언론사에 보낼 보도 자료 정리를 할 것이다.

그는 원화 한의원의 사무장인 동시에 5개 한의원의 연합인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총괄 이사가 됐다.

네트워크의 전체적인 경영과 교류 현황을 챙기며 실무를 책임지는 자리에 박우식보다 나은 적임자가 없었다.

당연히 책임감이 커진 만큼 그만한 대우를 약속 받은 것은 물론이다.

박우식은 과거 잘 나가던 CEO 시절 부럽지 않은 연봉과 권한을 부여받게 됐다.

무명의 젊은 한의사였던 한지호에게 인생 역전의 기회를 걸었던 것이 맞아 떨어진 셈이다.

황만금이 추천을 받아서이지만, 그때의 선택 덕분에 박우식의 인생 2막이 화려하게 열렸다.

앞으로 한지호가 잘 되면 잘 될수록 그의 지위도 계속해서 올라갈 것이다.

한지호는 누구보다 빠르게 성공가도를 밟아가고 있지만 혼자서 달리지는 않았다.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람들도 더 높이 오르게 만들어준다.

그렇기에 일단 한 번 한지호와 일을 시작하면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마무리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사무장님. 이제 그냥 이사님이라고 불러드릴까요?”

밖으로 나가기 전, 한지호가 혼자 남아 일을 더 할 박우식을 챙겼다.

이런 사소한 마음 씀씀이도 그의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포인트다.

박우식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호칭이야 원장님께서 편하신 대로 불러주십시오. 저는 보도 자료를 각 언론사에 발송시키고 들어가겠습니다.”

“네. 따로 체크하지 않아도 잘 만드실 거라 믿고 있겠습니다.”

“다른 원장님들과 편한 시간 보내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한지호와 박우식은 서로의 눈을 마주보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서로가 서로를 든든하게 느끼며 신뢰하는 사이에서만 나오는 표정이다.

아직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곧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일을 마친 한지호는 네 명의 원장들을 이끌고 예약해둔 식당으로 갔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

이 이름이 조만간 한의학계의 이슈로 떠오를 게 분명해 보였다.

+++

“모자란 놈 같으니라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네가 역정을 냈다.

목소리만 높인 게 아니었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탁자를 내리쳤다.

쾅!

탁자 위에 진열 돼 있던 명패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꾸로 뒤집힌 명패에는 멋들어진 한자 필기체가 새겨져 있었다.

K대 한의학과 명예교수 김병근.

학과장을 역임하고, 은퇴 이후에도 명예교수로 K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한의학계의 거물이 김병근이다.

그가 이토록 역정을 내는 상대는 누구일까.

다름 아닌 하나밖에 없는 아들, 김영찬이었다.

기득권 갑질이 상징으로 떠올라 국민적인 지탄을 받고, 협회와 대학으로부터 징계를 당한 김영찬이 고개를 푹 숙이고 서있었다.

이미 여러 번 질책을 당했지만 여전히 김병근의 얼굴을 볼 때마다 욕을 들어먹는다.

그래도 싸다.

단순히 김영찬 개인이 아니라 가족의 명예를 실추시켰기 때문이다.

노인답지 않게 뜨거운 숨을 내뿜은 김병근이 분노를 가라앉혔다.

김영찬은 권위적이고 거만한 교수가 아니라 중년임에도 아버지에게 혼나는 볼썽사나운 아들이 돼 있었다.

“그래서… 네놈의 덜 떨어진 짓 덕분에 한지호가 원화 정의 네트워크라는 한의원 연맹을 만들었다고? 협회 내에서 젊은 놈들을 규합해 소장파 세력을 형성한 걸로도 모자라서!”

“벌써 기사가 쫙 나갔습니다, 아버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대부분 믿을 만한 한의원 브랜드가 생겼다고 반기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겠지. 그 기회를 멍청한 네놈이 준 것이고-!”

“죄, 죄송합니다.”

김영찬이 우물쭈물 대답했다.

죄송하다는 말을 벌써 몇 번째 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김병근의 기백은 도저히 노인의 것이라 믿을 수 없었다.

현역인 김영찬보다 훨씬 기가 센 양반이었다.

단지 김영찬이 궁지에 몰렸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보아하니 김병근은 원래부터 집안을 꽉 잡고 불호령을 떨어트리며 사는 독불장군 스타일이었다.

그 와중에 김영찬이 집안 망신을 시켰으니 분위기가 험악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한지호가 원화 정의 네트워크를 설립했다는 소식까지 전해졌다.

한의원 네트워크는 많은 사람들이 시도했지만 성공한 케이스가 몇 없다.

그러나 한지호가 주도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는 국민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고 있는 한의학계의 블루칩이다.

한지호의 이름 덕택에 네트워크에 참여한 한의원들이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시너지 효과가 증명되면 점점 더 많은 한의원들이 원화 정의 네트워크에 들어오려 할 것이다.

자칫하면 대한민국 한의사회의 패러다임을 이제 고작 서른 살이 된 한지호가 좌우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오래도록 한의학계의 꼭대기에서 군림해온 김병근으로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네트워크라, 네트워크. 어린놈이 방송 몇 번 타서 유명해지더니 끝을 모르고 건방진 행보를 걷는군.”

“제가 드리고픈 말씀이었습니다, 아버지. 한지호 그놈이 얼마나 건방진지…….”

“넌 닥치거라! 이 모든 일이 네놈의 멍청함 때문이지 않느냐!”

김병근이 다시 화를 쏟아냈다.

김영찬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아버지 앞에서 기를 못 폈다.

곧이어 씩씩거리던 김병근의 입에서 의미심장한 말이 흘러나왔다.

“네놈이야 내 아들이지만 이미 한의사회에서 이름을 날리고 살아가긴 글렀고. 다만 어린놈들이 모여서 쓸데없이 바람을 일으키는 건 막아야지.”

“어, 어떻게 복안이라도 있으십니까?”

“한의원 네트워크는 어찌 보면 위천 한방병원에 대한 도전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조 이사장님과 유 병원장에게 이야기를 해 봐야지 않겠느냐. 아마 상당히 거슬려 하고 있을 게다. 한지호 그놈, 적당히 해야지 인기를 얻었다고 너무 설치지 않았느냔 말이다.”

가볍게 흘려들을 수 없는 발언이었다.

내내 주눅이 들어있던 김영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위천 한방병원은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한의원 체인이다.

김병근이 언급한 이사장과 병원장은 한의학계 내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정점 중의 정점이다.

위천 한방병원의 분점은 수십 곳이 넘는다.

한 지역에 치우치지 않고 전국에 골고루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렇듯 거대한 한의원 프랜차이즈의 오너인 이사장 조준혁은 재벌에 버금가는 재력을 보유한 인물이다.

조준혁은 어린 나이에 가업을 물려받아 기적과 같은 성장을 일궈냈다.

지금의 위천 한방병원도 그가 놀라운 사업 수완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그렇기에 이제 갓 40대에 접어든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의학계의 원로인 김병근조차 조준혁을 어려워한다.

병원장인 유우선은 또 어떤 인물인가.

그는 TV 방송을 통해 이름을 알렸던 스타 한의사 1세대다.

위천 한방병원의 병원장이 된 후 방송 출연을 자제하고 있지만, 나이 지긋한 어른들은 여전히 한의사라고 하면 유우선을 먼저 떠올린다.

한의학 연구로도 대단한 업적을 쌓아서 대한민국 최고의 한의사로 인정받고 있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전설 두 명이 위천 한방병원과 한국 한의학계의 꼭대기에 서있다.

김병근은 자기 아들을 몰락시킨 한지호라는 성가신 존재를 가만 둘 생각이 아니었다.

비록 못난 아들이지만 아비로서 복수는 해야할 것 아닌가.

이대로 한지호를 놔두면 주체 못할 정도의 거물이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도 크게 작용했다.

싹은 더 크기 전에 밟아야 하는 법.

사실 싹이라고 하기엔 한지호가 너무 커버렸다.

그렇기에 조준혁과 유우선이라는 살아있는 전설들과 상의해서 일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과연 위천 한방병원의 이사장과 병원장이 움직일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김병근, 김영찬 부자(父子)의 외가쪽 친척이 바로 병원장 유우선이다.

그 어떤 인맥보다 강하다는 혈연으로 엮인 사이다.

이른바 한의학계의 로열 패밀리로 불려왔기에 유우선이 직접 나설 가능성도 충분하다.

한지호를 필두로 한 젊은 한의사들의 연합이 위천 한방병원의 아성을 위협할 싹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병근은 움직이기로 작심했고, 공은 위천 한방병원으로 넘어갈 것이다.

이 모든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김영찬이 먼저 한지호에게 훼방을 놓았고, 한지호가 그를 무너트리며 세력을 형성했다.

그로인해 하늘 위의 하늘인 위천 한방병원까지 무대로 불려나오게 생겼다.

한지호가 일으킨 돌풍이 정체되어 있던 한의학계를 요란하게 뒤집기는 할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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