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16화 (116/255)

# 116

6장, 돌풍 (1)

대한 한의사 협회의 윤리위원회는 한지호가 예상한 대로 판결을 내렸다.

심사 결과가 발표됐고, 김영찬 교수는 협회 이사회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사에서 제명시키는 꽤 강력한 징계지만, 실질적으로 잃는 것은 없다.

그러나 명예와 권력을 목숨처럼 생각하는 김영찬에겐 뼈아픈 징계일 것이다.

협회의 조치에 발 맞춰 K대학 한의학과도 추가적인 징계 절차를 밟았다.

윤리위원회에서 징계를 내렸는데 학교 당국이 가만히 있으면 제 식구 감싸기 논란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미 여론은 산불처럼 타올랐다.

뭐라도 하는 시늉을 하지 않으면 불똥이 K대 한의학과에도 튈 것이다.

최종적으로 학교에서 내린 징계는 한 학기 정직이었다.

한 학기 동안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게 됐고, 교수로서의 대우도 받지 못하게 됐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 교수는 가장 존경을 받는 직업 중 하나다.

김영찬은 그렇게 영광스러운 자리를 박탈당한 것이다.

겨우 한 학기인 해도 그가 느끼는 굴욕감은 상상을 초월할 게 분명했다.

게다가 K대 한의학과 교수 김영찬이라는 이름 석자가 만천하에 회자됐다.

김영찬이 한지호를 공격했다가 역으로 징계를 당한 이야기는 방송국 9시 뉴스에도 나왔다.

협회와 학교의 징계보다 더 결정적인 카운터 펀치는 바로 이것이었다.

이제 김영찬은 한의학계 내부에서 예전 같은 권력을 휘두르지 못할 것이다.

여전히 막강한 백그라운드를 바탕으로 교수직은 수행하겠지만, 학교에서의 발언권과 권위도 엄청나게 위축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국민적인 망신을 당하고, 기득권 갑질 한의사로 낙인이 찍혔는데 누가 그의 말을 존중하겠는가.

여론은 컨트롤이 불가능하지만 한 번 발휘되면 겉잡을 수 없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그러한 국민 여론의 직격타를 맞은 김영찬은 앞으로 평생을 숨죽인 채 과거의 영광만 그리워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김영찬을 넉다운 시키고, 젊은 한의사들을 주축으로 한 소장파 세력의 리더가 된 한지호는 봄날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봄과 가을이 짧아져 곧 여름의 무더위가 시작되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꽃 피는 계절의 정취가 남아있다.

그는 장충동 부근에 있는 D 대학교 캠퍼스를 거닐고 있었다.

모교인 K대가 아닌 D대에 온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D 대학 연극영화과 신입생이 된 유초아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한지호가 만든 원화 재단의 첫 번째 대학 장학생이 바로 유초아다.

천사원의 다른 아이들도 유초아처럼 자기 꿈을 찾아내면 두 번째, 세 번째 대학 장학생이 될 것이다.

한지호는 천사원 아이들이 자신처럼 학비에 쫓겨가며 대학 시절을 보내길 원치 않았다.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며 청춘을 누리게 해주고 싶었다.

천사원 아이들은 단순히 같은 보육원 출신이 아니라 그의 진짜 동생이자 가족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오빠!”

그때였다.

길 저편에서 유초아가 손을 흔들며 총총걸음으로 한지호에게 다가왔다.

한지호는 오랜만에 만난 유초아를 보고 멍하니 서있었다.

그가 알던, 그저 어리기만 하던 유초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른 대학생들처럼 옅은 화장을 하고, 짧은 청바지 위에 셔츠를 입은 모습이 한없이 낯설었다.

쉽게 말하자면, 더 이상 소녀가 아니라 한 명의 여자가 된 것 같았다.

원래부터 예쁜 얼굴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앳된 기색이 지워지면서 길에서 남자들의 눈빛 세례를 받는 인기녀로 거듭난 것이다.

실제로 유초아는 벌써부터 D대 연극영화과의 에이스로 불리고 있었다.

원래 연극영화과에 미남 미녀들이 많지만, 수많은 신입생들 중에서도 유초아의 미모는 독보적이었다.

“왜 그러고 서있어요?”

하얀 얼굴의 유초아가 큰 눈을 깜박이며 질문을 던졌다.

한지호는 살짝 고개를 젓고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려다 말았다.

이제 다 큰 유초아의 머리칼을 함부로 헝클면 안 될 것 같았다.

불편해진 건 아닌데 뭔가 괜히 조심하게 됐다.

“아니야. 그보다 너 너무 예뻐졌다? 못 알아보겠는데.”

“정말요? 오빠가 그렇게 말해주니 기분 좋아요.”

유초아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혔다.

한지호는 확연하게 느껴지는 여자의 향기를 맡았다.

둘은 누가봐도 한 쌍의 커플로 보였다.

10살 차이가 나지만, 요즘 세상에서 10살 차이는 흔하디 흔하다.

게다가 한지호는 나이에 비해 어려보이고, 눈을 강하게 치켜뜨지만 않으면 어딜 가도 잘생겼다는 소리를 듣는 깨끗한 얼굴이다.

벌써 지나가는 D 대학교 학생들이 한지호와 유초아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한지호는 워낙 방송에 자주 나와 알아보는 사람이 많은 유명인이다.

젊은 사람들보다는 주로 나이든 어르신들에게 인지도가 더 높지만, 그래도 꽤 많은 학생들이 그를 알아보고 있었다.

그가 뜬금없이 D 대학에 나타나 예쁜 유초아와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한지호는 사람들이 더 모이기 전에 자리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밥 먹으러 가자. 맛있는 거 사주기로 했으니까.”

“좋아요, 오빠!”

둘은 나란히 돌아서서 캠퍼스를 가로질렀다.

D 대학은 언덕 위에 캠퍼스를 세워 놓았다.

언덕을 내려오면 얼마 걷지 않아서 신라 호텔이 나온다.

한지호는 새로 뽑은 벤틀리 컨티넨탈을 신라 호텔에 주차시키고 걸어서 올라온 것이었다.

그는 유초아와 함께 산책도 할 겸 신라 호텔까지 느릿느릿 걸어갔다.

천천히 걷다보니 사람들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게 됐다.

오랜만에 만났기에 할 이야기가 많았다.

“학교 생활은 어때? 연극영화가 군기가 세다던데.”

“선배들이 무섭긴 해요. 그래도 진짜 진짜 재밌어요. 연기가 이렇게 깊이 있는 분야인지 알아가는 것만 해도 벅차지만요.”

“배우가 되고 싶은 마음엔 변함이 없는 거지?”

“네! 정말 좋은 연기를 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유초아의 눈동자에서 열정이 엿보였다.

한지호는 배우, 특히 여배우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잘 알고 있었다.

연예계 사정을 손바닥 들여 보듯 알 수 있는 위치가 됐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동생이나 마찬가지인 유초아가 연예계에서 고생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이미 꿈을 가졌고, 청춘의 꿈은 스스로 꺾기 전엔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롤 모델로 삼은 배우도 있겠네?”

한지호의 질문에 유초아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까지 보여준 가장 격한 반응이었다.

한지호는 웃음을 참으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누군데? 한국 배우야?”

“네, 오빠! 김해수 선배님이요. 김해수 선배님도 우리 과 출신이래요. 저도 그렇게 존재감 있는 여배우가 되고 싶어요. 아직은 한참 멀었지만……. 그래도 꿈은 클수록 좋으니까요.”

유초아의 주저 없는 대답에 한지호는 남몰래 머리를 긁적였다.

김해수.

그녀는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여배우 중 한 명이다.

다만 사적으로 한지호의 환자였고, 연애는 아니지만 가볍지 않은 관계를 꽤 유지했었다.

한지호가 이지은과 사귀게 되면서 깔끔하게 정리는 됐지만, 묘한 인연이기는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유초아가 김해수를 롤 모델로 여긴다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세상은 참 좁고, 사람 인연은 어떻게 풀릴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도 좋게 정리 됐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한지호는 김해수를 떠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어느덧 둘은 신라 호텔 앞에 다다랐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맛있는 스시 사줄게. 기대해.”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오빠?”

“괜찮아. 이 정도쯤이야.”

유초아는 여전히 소녀 같은 면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한지호에게 부담을 줄까봐 염려하는 모습이 기특하고 예뻤다.

‘시간은 계속 흐르는 거지. 초아도 대학생이 됐고, 나도 서른이고.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거니까.’

한지호는 유초아와 함께 신라호텔 일식 레스토랑인 아리아께로 들어가며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깊어졌다.

언제까지 유초아와 천사원 아이들의 든든한 오빠이자 형이 되어주고 싶었다.

+++

문전성시(門前成市)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한 때 국민 드라마라고 불렸던 허준의 장면처럼 누군가 한의원 문 앞에서 “줄을 서시오!”라고 외쳐야 할 것 같았다.

원래도 사람이 많이 몰리지만 오늘은 더했다.

한 달에 한 번, 의료 봉사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100% 예약제로 운영되기에 사람이 많아도 시장통 같은 분위기는 아니다.

하지만 의료 봉사는 100% 예약제로 운영할 수 없다.

강남구청의 도움을 받아 소외 계층과 노인들의 접수를 미리 받지만, 무작정 찾아오는 어르신들도 적지 않다.

웬만하면 무리를 해서라도 봉사 진료를 하려는 한지호의 의지 때문에 직원들도 죽어나갔다.

그러나 다들 지쳐도 짜증을 내지는 않았다.

사회를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아이고- 참말로 좋네. 우리가 이렇게 좋은 한의원에서 진료도 받아보고. 동네 병원도 부담 되가꼬 잘 못가는데, 이래 좋은 대접을 받아도 되는지 모르것다.”

“괜찮아요, 할머님. 원장님도 보람을 느끼고 계세요.”

“원장님이 진짜 난 사람은 난 사람이지. 이래 많은 노인네랑 아픈 사람들 공짜로 봐주겠다고……. TV에 나오는 양반이라 진료 받으려면 윽수로 비싸다던데, 고맙구로.”

구수하게 사투리를 쓰는 할머니가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대기실에 앉아있던 다른 사람들도 할머니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TV를 잘 안보는 사람들도 한지호가 매우 유명한 한의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더구나 원화 한의원의 인테리어에서는 럭셔리한 기운이 물씬 묻어나고, 봉사 진료를 받으러 온 환자들에게 쌀과 생필품 등을 나눠준다.

한 달에 한 번이지만,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노인과 소외계층에게 큰 힘이 되는 이벤트였다.

강남은 부자 동네라는 인식이 박혀있지만, 이곳에도 어려운 사람들은 적지 않다.

강남 3구라 불리는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는 엄청 넓은 지역이다.

여느 지역 못지않게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달동네도 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강남의 가난한 사람들은 도움의 손길을 못 받는 경우도 많다.

그렇기에 원화 한의원의 의료 봉사는 지역주민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었다.

“할머님, 위로 올라가세요. 순서 되셨어요.”

안내 데스크의 이주희가 웃음기를 회복하며 할머니를 안내했다.

힘들고 피곤해도 고마워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기운을 낼 수밖에 없다.

할머니는 드디어 한지호에게 진료를 받는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미소를 짓고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2층에 올라서면 조민주와 이해나, 그리고 신입 간호사들이 환자들을 맞이한다.

비록 최소한의 진료비를 내고 사은품을 듬뿍 받아가는 환자들이지만, 간호사들은 VIP 환자들을 대할 때와 똑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계단 오르느라 힘들지 않으셨어요?”

조민주가 자연스럽게 할머니를 맞이했다.

한의원 내부의 계단을 거슬러 올라온 할머니 환자가 힘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이 정도는 오를 수 있으니 걱정 말어. 그보다 선생님은 어디에 계시단가?”

“바로 안내해드릴게요.”

얼른 한지호를 만나고 싶어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수석 간호사인 조민주가 친근하게 할머니의 팔짱을 끼고 진료실로 걸어갔다.

똑똑-

“원장님, 다음 환자분 들어 가실게요.”

노크를 마친 조민주가 진료실 문을 열었다.

한지호는 하얀 가운을 잇고 환한 표정으로 할머니 환자를 맞이했다.

돈이 안 되는, 오히려 돈이 나가는 환자인데도 한 번에 수천만 원을 쓰는 VIP 환자를 대하는 것 같았다.

이러니 의료 봉사를 받아본 사람들이 칭찬을 할 수밖에 없었고, VIP 전문 한의원임에도 점점 사회적인 평판이 좋아지는 것이다.

“아이고, 선생님. TV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잘 생겼구만요.”

할머니 환자가 다짜고짜 한지호의 손을 덥썩 부여잡았다.

초면이지만 <건강백서, 진짜! 가짜!>를 통해 매주 만나던 반가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한지호는 손을 빼지 않고 기분 좋게 웃었다.

“하하하! 그렇죠? 다들 실물이 더 낫다고 하세요.”

“참말로 생긴 것도 어찌 이리 멋지게 생겼을꼬.”

“감사합니다. 오늘 어디가 불편하셔서 오셨어요?”

“내사마 허리가 아파서 잠을 못 자, 잠을.”

“제가 한 번 볼게요.”

한지호는 금방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진료를 할 때, 의술을 펼칠 때만큼은 세상 그 누구보다 진지하고 심각해진다.

그게 의원의 당연한 도리라 믿었다.

김영찬이라는 거물을 고꾸라트리고, 거칠 것 없이 질주하는 시기지만 그는 주위의 낮은 곳을 돌아보는 걸 잊지 않았다.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진심으로 봉사를 즐기게 된 측면도 있다.

이렇듯 한지호는 자신이 나고 자란 낮은 땅을 잊지 않으며 더 큰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젊은 한의사들 중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중이다.

머지않아 한지호를 필두로 대한민국 한의사회에 일대 혁신의 바람이 불 전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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