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4장, 의전(醫戰) (1)
한의사라면 누구든 협회에 가입해야 한다.
이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사항이다.
한지호도 한의사 면허를 발급 받은 시점부터 자연스레 대한 한의사 협회에 가입이 되어 있었다.
원화 한의원을 개원한 뒤에는 협회비를 내라는 공문이 날아와 자동 이체도 시켜 놓았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한지호는 협회에서 무슨 일을 하건 관심 자체가 없었다.
협회에서 한 자리 하는 한의사들은 주로 정치적인 야심을 가지고 있다.
한지호의 야심도 만만찮게 크지만, 권력욕과는 방향이 다르다.
대부분의 한의원 원장들이 한지호처럼 협회 내부 사정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꼬박꼬박 협회비를 내고, 한의사들의 단체 행동이 필요할 때는 협회가 총대를 메고.
딱 그 정도의 관계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의사 협회가 유명무실한 단체는 아니었다.
엄연한 전문 의료인 단체로 국회와도 교섭을 진행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협회에서 누구를 잘 되게는 못 해줘도 마음먹고 수를 쓰면 한 사람을 묻을 수는 있다.
공식적으로 제명을 당하면 한의사 사회에서 왕따가 된다.
한의원만 잘 되면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세상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협회에서 제명당한 한의사는 TV나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방송국도 협회라는 거대한 단체와 원활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명당했다는 소문이 나면 환자들도 해당 한의사를 이상하게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뭔가 문제가 있으니 협회에서 제재를 받았다고 알아서들 추측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협회의 윤리위원회에 안건이 올라간 건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분명 한지호를 제명 시킬 명분은 없다.
그건 명백한 무리수다.
하지만 징계라도 받게 되면 한지호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된다.
가짜 백수오 사건 이후 국민 한의사 소리를 듣는 이미지에 금이 갈 게 뻔했다.
원화 한의원을 찾는 VIP 환자들은 신경도 안 쓸 테고, 병원 매출에도 큰 영향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명성에 오점을 남기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한지호가 카지노의 의료자문이 됐다는 사실이 거론된다는 것 자체가 마이너스다.
보나마나 김영찬 교수는 언론에 이야기를 흘릴 게 분명하다.
한지호가 협회의 윤리위원회에 제소가 됐고, 카지노의 의료자문을 맡는다는 사실만 알려져도 흠집을 내는데 성공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설령 협회로부터 징계를 받지 않아도 승승장구하는 한지호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니 만족할 터였다.
“정식으로 공문이 왔습니다, 원장님. 협회 윤리위원회 출석을 요구하는 공문입니다.”
사무장 박우식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지호와 박우식, 그리고 조기운 세 사람은 원화 한의원에 모여 대책을 의논하는 중이었다.
기분 좋게 황만금을 만나서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던 한지호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느낌이었다.
김영찬과 악연이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치졸하게 물고 늘어질 줄은 몰랐다.
“끝을 내야죠.”
한지호가 돌연 마음에 있는 말을 꺼냈다.
박우식과 조기운이 동시에 그를 쳐다봤다.
끝을 낸다.
듣기에 따라서 무척 위험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말이다.
한지호는 자신이 뱉은 말의 의미를 축소 시키지 않았다.
“이미 일은 터졌고,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면피만 하고 끝내지는 않을 겁니다. 이 일을 계기로…… 김영찬 교수를 한의학계에서 완전한 낙오자로 만들겠습니다. 더 이상 내 발목을 잡지 못하도록.”
황만금의 저택에서 전화를 받는 순간부터 마음을 굳혔다.
김영찬은 끈질긴 인간이다.
한지호에게 악감정을 품은 그는 끈질기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시비를 걸고 있다.
문제만 해결하고 놔둔다면 화근을 크게 키우는 꼴이다.
한국 한약 협회장이었던 김일은을 완전히 무너트리고, 협회까지 산산조각 냈던 것처럼 본 때를 보여줘야 할 타이밍이 왔다.
타겟은 김영찬과 그가 한의학계에서 누리는 지위다.
대한 한의사 협회와는 굳이 척을 질 필요도 이유도 없다.
물론 김영찬의 뒷배경은 협회라는 거대한 단체 못지않다.
오히려 실질적인 권력은 훨씬 더 강하다.
“형님, 일단 윤리위원회에 안건이 올라간 이상 어느 정도 타격은 불가피합니다. 기자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기사가 나가는 것부터 막겠습니다.”
조기운이 당장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불리한 기사가 터지는 걸 최대한 막는 게 급선무다.
하지만 한지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어적으로 대응해선 싸움에서 이길 수 없어.”
“네?”
뜻밖의 말에 조기운이 어리둥절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안 좋은 일이 터졌을 때 기사를 막는 건 기본적인 위기 관리법이다.
박우식 역시 한지호의 생각을 짐작하기 어려운 눈치였다.
“피해를 입지 않는데 초점을 맞추면 상대에게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겠지. 김영찬 교수가 싸움을 걸었고, 전쟁은 이미 시작됐어. 우리도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해야 돼.”
그는 더 큰 맥락에서 김영찬과의 분쟁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 이미지 손실을 막는데 급급해서는 뿌리를 잘라낼 수 없다.
한지호가 말을 계속했다.
“이미 내가 카지노의 의료자문을 맡았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상, 이미지가 훼손되는 건 각오해야지. 대신 우리가 살을 내줬으면 김영찬 교수의 뼈를 가져와야 하는 거 아니겠어?”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병법의 오랜 격언이다.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상대방의 급소를 물어 완전히 제압한다는 뜻이다.
한지호는 국민 한의사 이미지에 손상이 가는 걸 각오했다.
그 대가로 한의학계의 로열 패밀리로 기세등등한 김영찬을 완전히 쓰러트릴 작정이었다.
“형님, 아시겠지만 협회 윤리위원회는 김영찬 쪽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제법 한의학계 사정에 밝아진 조기운이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박우식도 반론을 보탰다.
“원장님 마음은 알겠지만…… 이럴 때는 일이 최대한 조용히 넘어가도록 숙이고 있는 게 최선입니다. 기사를 막고, 윤리위원회 심사 준비를 철저히 해서 징계를 받지 않으면 곧 잠잠해질 것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조기운과 박우식 모두 상황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둘이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있다.
바로 김영찬 교수의 캐릭터다.
그는 윤리위원회 제소로 만족할 위인이 아니었다.
K대 한의대는 물론이고 한의학계 내부에서 김영찬은 언제나 왕자 대접을 받아왔다.
그런데 한지호라는,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제자가 국민적인 인기를 누리며 강남에서 잘 나가는 원장이 된 것이다.
게다가 건방지게 자신의 지시를 무시하고 이빨을 드러냈다.
김영찬으로서는 평생 처음 겪는 일이었고, 한지호를 향한 악감정이 깊어질 대로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엔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지만, 안전하고 높은 성 안에서 귀족처럼 살아온 김영찬의 멘탈은 다르다.
그는 카지노 의료자문 이후에도 틈만 나면 집요하게 한지호를 공격할 것이 뻔했다.
한지호는 김영찬의 속성을 파악했기에 살을 내주더라도 뼈를 취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윤리위원회 제소 안건은 박 사무장님이 준비해주세요. 예상 질문과 쟁점, 답변 준비까지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기운아, 넌 기자들에게 전화 돌려서 기사 막고. 그래봤자 딱히 막히진 않을 거다. 내가 보도 자료 써줄 테니까 한의원 공식 입장으로 발표해. 그렇게 급한 불부터 끄자.”
“네, 형님. 그럼 김영찬 교수를 공격하는 건 유보하시는 겁니까?”
한지호가 박우식과 조기운에게 각각 알맞은 지시를 내렸다.
언뜻 봐서는 두 사람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사태를 수습하는데 집중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조기운의 질문을 받은 한지호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말했잖아. 김영찬 교수의 뼈를 취할 거라고. 이 바닥에서의 발언권을 완전히 빼앗을 테니 두고 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분명한 건, 한지호가 아무렇게나 허풍을 치는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박우식과 조기운은 한지호가 내뿜는 기세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로서 확실해졌다.
한지호와 김영찬.
떠오르는 젊은 한의사와 든든한 배경과 세력을 가진 중견 한의사.
두 사람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이 시작됐다.
전쟁터의 병사가 아닌 의료계 한의사들의 싸움이지만, 피가 튀기는 실제 전투 못지않게 치열할 것 같았다.
아마도 이번 싸움에서 패배한 사람은 상상 이상으로 많은 것을 잃을지 모른다.
방송과 한의원 운영, 카지노 투자의 성공까지 승승장구하던 한지호 앞에 김영찬이라는 시험대가 놓인 셈이다.
김영찬을 떠올리는 그의 눈빛이 무척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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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운이 노력을 했지만, 기사가 터지는 걸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백수오 파동의 영웅, 한지호 원장. 카지노와 무슨 관계? 제목 한 번 자극적으로 잘 뽑는군요.”
한지호는 포털 사이트 메인에 뜬 헤드라인을 읽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기자들의 제목 뽑는 능력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다.
제목만 보면 한지호가 카지노에서 거액의 불법 도박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가 국내 두 번째 내국인 카지노인 블랙문의 의료 자문을 맡았다는 기사는 포털 사이트 메인에 올랐고, 검색어 순위권도 장식했다.
당연히 한지호를 비난하는 네티즌들도 나타났다.
이때다 싶으면 우르르 몰려들어 온갖 비난을 늘어놓는 게 네티즌들의 본성이다.
VIP 한의원으로 부자들만 치료할 때부터 알아 봤다느니, 돈에 눈이 멀어 비도덕적인 짓을 하고 다닌다느니, 별별 말들이 많았다.
한지호 측의 입장을 설명하는 반론 기사도 뉴스 포탈 상위권에 떴다.
거기에는 또 한지호를 이해할 수 있다는 내용의 댓글들이 주류를 이뤘다.
기사 내용에 따라 한쪽에서는 한지호를 비난하고, 한쪽에서는 그를 이해하는 네티즌 반응이 생성된 것이다.
이게 인터넷의 본질이다.
냄비처럼 쉽게 끓고 쉽게 가라앉는 것.
한지호는 여론을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완벽에 가까웠던 이미지에 흠집이 나면서 옥의 티가 생겼지만, 작은 티끌 하나 있어도 옥은 옥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의료자문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하나의 해프닝으로 정리가 될 것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한지호는 정장을 갖춰 입고 협회 건물 앞에 서있었다.
사무장 박우식이 옆에서 그를 보좌하는 중이었다.
오늘이 협회의 윤리위원회에 참석하여 안건에 대해 소명을 하고, 심사를 받는 날이기 때문이다.
제소를 한 김영찬도 윤리위원회에 출석한다.
오늘부터가 진짜 전면전의 시작이다.
“들어가시겠습니까, 원장님.”
박우식이 낮게 깔린 음성으로 말했다.
기업체의 CEO 출신으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박우식도 약간 긴장한 것 같았다.
오히려 당사자인 한지호의 발걸음이 더 가벼워 보였다.
“걱정되지는 않으십니까? 잘못하면 징계 처분이 내려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무리 약한 징계라도 받게 되면 지금보다 더 큰 후폭풍이 몰아칠 겁니다.”
“사무장님.”
한지호가 차분하게 고개를 돌렸다.
박우식의 두 눈을 바라본 그가 또박또박 자신의 생각을 뱉어냈다.
“이건 위기가 아닙니다.”
“네? 그 말씀은…….”
“기회입니다. 떳떳하게 블랙문 카지노의 투자자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 김영찬 교수라는 눈엣가시를 빼낼 수 있는 기회, 그리고 한의학계에 새로운 세력을 만들 수 있는 기회.”
아무렇게나 하는 말이 아니었다.
박우식은 한지호의 말을 듣고 그가 큰 그림을 설계했다고 직감했다.
한지호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협회의 간판을 쳐다봤다.
“들어가시죠. 그리고 즐기시죠.”
“네, 원장님.”
한지호와 박우식이 함께 협회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 이름도 딱딱한 윤리위원회 소명 심사.
힘이 아닌 머리로 하는 전쟁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