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3장, 전야제(前夜祭) (3)
“다들 밝은 얼굴인데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계셔서요. 파티의 호스트 중 한 명으로서 부족한 점이 있다면 무엇인지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한지호가 정중하게 운을 띄웠다.
구석에서 아웃사이더처럼 가만히 있던 첸에게 말을 건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첸은 그제야 살짝 미소를 지었다.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오르자 완전히 다른 얼굴이 됐다.
대만의 영화배우 주걸륜을 연상시킬 정도로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무표정일 때는 한없이 시니컬하게 보였었는데 말이다.
“훌륭한 파티입니다. 그냥 미녀들이 아니라 통역이 가능한 인텔리들을 파티 걸로 만든 아이디어도 대단하고, 블랙문 카지노의 내부 역시 마카오의 여느 카지노 못지않게 화려합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도 다들 쟁쟁하고……. 즐겁지 않을 이유가 없어요.”
“말씀과 달리 즐거워 보이지는 않으셔서. 실례가 됐다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전혀. 사실 대부분의 파티가 이렇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고 오지는 않았어요.”
첸은 또다시 시니컬한 표정을 지었다.
한국의 가장 화려한 카지노에서 열린 비밀스러운 파티는 그를 조금도 만족시키지 못한 것 같았다.
VVIP를 위한 특권, 최고의 샴페인과 음식, 눈부시게 빛나는 아름다운 여자들, 그리고 말이 통하는 비슷한 클래스의 국제적인 부자들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었지만 첸은 무관심한 티를 냈다.
대체 문제가 무엇일까.
파티를 즐기지 않을 거라면 첸이라는 남자는 왜 전야제 파티에 참석한 것일까.
한지호의 궁금증을 풀어 주려는 듯 첸이 입술을 달싹였다.
“앞으로 놀 만한 곳인지 확인하러 왔을 뿐입니다.”
“네?”
“다행히 내부 공사를 잘해 놨으니 게임을 즐기기 편할 것 같습니다.”
한지호는 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카지노의 존재 이유, 도박.
첸은 오직 게임을 플레이할 생각밖에 없는 것 같았다.
전야제 파티에 참석한 것도 여흥을 즐기고,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블랙문 카지노가 게임을 즐기기 적합한 공간인지 눈으로 확인하러 온 것이다.
한지호는 짧은 대화를 통해 첸이 어떤 성향의 인물인지 파악했다.
의학적으로도 분류가 가능하다.
도파민 중독이다.
도파민(Dopamine)은 감정을 조절하는 신경물질이다.
흔히 사람을 흥분시키고, 집중력을 고조시키는 호르몬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도파민이 과다하게 분비되면 조울증이나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을 일으키고, 반대로 도파민 분비가 줄어들면 우울증(Clinical Depression)에 걸릴 수 있다.
도파민 분비를 촉진시키는 법은 매우 간단하다.
담배를 피우면 니코틴이 도파민을 활성화시킨다.
니코틴 중독은 곧 도파민 중독이기도 해서 흡연자들이 쉽게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이다.
위험 약물로 분류되는 마약도 도파민의 분비를 촉진시켜 환각과 쾌락을 일으킨다.
이처럼 도파민에 과하게 중독된 사람은 담배나 마약에 중독된 것과 마찬가지 증상을 보인다.
영국식 고급 영어를 구사하는 깔끔한 미남 첸은 마약 대신 도박을 통해 도파민 과다 분비를 즐기는 게 분명했다.
‘위험해.’
한지호의 눈빛이 달라졌다.
도파민 중독자들은 평소에는 멀쩡해도, 자극이 부족하거나 과다하게 분비될 때 이상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한 이상 반응이 상상을 초월하는 형태로 발현되기도 한다.
한지호는 무심하게 아웃사이더 역할을 하고 있던 첸이 생각보다 위험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만큼 흥미가 깊어지기도 했다.
그저 그런 도박 중독자였다면 결코 전야제에 초대받지 못했을 것이다.
마창우가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초대 명단에 속할 정도로 영향력이 큰 인물이면서, 동시에 카지노 게임을 즐기는 도파민 중독자.
이보다 더 흥미로운 캐릭터를 찾기 힘들 것 같았다.
“다음에 게임을 즐기러 오시면 꼭 연락해 주시겠습니까? 어떻게 게임을 하시는지 보고 싶습니다.”
한지호가 품에서 명함을 꺼내 첸에게 건네줬다.
첸은 명함을 받으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죠. 미안하지만 내 명함은 없어요. 홍콩에선 내 이름이 곧 명함이니까.”
“역시 홍콩에서 오셨군요.”
“영국 영어를 쓰는 중국계 부자라면 홍콩일 수밖에. 꽤나 전형적이죠.”
첸이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홍콩인이었다.
한지호는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눈앞의 남자가 실은 더 엄청난 사람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명함이 필요 없을 정도라고 자기 입으로 말하다니, 허풍쟁이거나 진짜 거물일 것이다.
물론 허풍쟁이라면 전야제에 초대받았을 리가 없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더 이상은 지루해서.”
“다음에 뵙기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게임하러 올 때 꼭 연락하죠.”
자리에서 일어난 첸이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는 정말 전야제 파티가 열리는 카지노 밖으로 빠져나갔다.
한지호는 왠지 첸이 곧 연락을 해 올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면 다른 일을 마다하고 달려와 첸의 게임을 관전할 생각이었다.
저벅저벅.
그때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인기척을 감지한 한지호가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떡 벌어진 어깨의 마창우가 턱밑을 쓰다듬으며 서 있었다.
“마 이사님?”
“한 원장님, 혹시 방금 전까지 대화를 나눈 분과 아시는 사이였습니까?”
마창우가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한지호는 의문스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처음 본 사람입니다. 홍콩에서 온 첸이라고 하던데, 누구입니까?”
“아… 모르셨습니까. 그분이 오늘 모신 손님들 중에서 가장 큰손입니다.”
마창우의 말에 한지호가 눈을 크게 떴다.
거물이라고 예상했지만 동년배의 젊은 남자가 전야제의 수많은 VVIP들 중에서도 제일 부자라니,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홍콩 칭화그룹의 2세입니다. 듣기로는 삼합회도 칭화그룹 밑에 있다고 합니다.”
“칭화그룹이라면 홍콩 금융계와 의료계를 장악하고 있는 그……?”
“맞습니다. 홍콩의 병원 중에서 칭화그룹 소유가 아닌 것을 찾는 게 힘들다고 하지 않습니까. 금융인의 10퍼센트는 칭화의 돈을 받았다고들 하고. 그곳의 유일한 후계자입니다. 실제로 올 줄은 몰랐는데 와서 놀랐습니다. 불편해하는 것 같아 감히 말을 걸기 힘들었습니다만, 한 원장님께서 대화를 나누기에 아는 사이인가 했습니다.”
한지호는 첸이 걸어 나간 길을 응시했다.
칭화그룹은 금융으로 유명하고, 삼합회와의 스캔들로도 뉴스에 자주 오르내린다.
하지만 의료인들 사이에서는 홍콩 의료계를 꽉 잡고 있는 큰손으로 더 유명하다.
언젠가 한의학으로 중국 대륙에 깃발을 꽂겠다는 목표를 세웠던 한지호로서는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첸과의 짧은 만남이 그저 우연이었을까.
그러고 보니 주걸륜을 빼닮은 잘생긴 얼굴이 익숙한 누군가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칭화그룹의 첸. 기억해 두겠어.’
세상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전야제의 화려한 파티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미녀들의 웃음소리와 거물들의 끈적끈적한 눈빛이 어지럽게 얽히며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그 한편에서 한지호는 거대한 운명의 흐름을 느끼며 오롯이 서 있었다.
***
“껄껄껄! 그래그래. 아주 기가 막힌 일이로구만.”
황만금이 허리를 꺾으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평창동 저택에서 오랜만에 조우한 한지호와 황만금은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지호는 미소를 머금은 채 이야기를 계속했다.
“자카테크의 에단에게서는 따로 연락이 왔습니다. 다음 달에 한국에 온다고, H 호텔에서 만나 식사를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그가 자카르타에서 제일 잘나가는 IT인이었다니, 세상에는 참 대단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자네가 그만한 위치에 올랐으니 대단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는 게지. 고만고만한 위치에 있으면 주위에 온통 고만고만한 놈들밖에 안 보이는 법이야. 그래서 옛말에도 유유상종이라고 하지 않았나.”
“끼리끼리 노는 법이라는 뜻이시죠?”
“아무렴, 그렇고말고. 괜히 한국의 어설픈 놈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일이네. 나도 한국 바닥을 벗어나는 데 실패했지만 사내가 국제적으로 놀아야지.”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한지호는 황만금의 조언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아직 그는 강남 바닥에 자리를 잡은 한의원의 원장일 따름이다.
TV 방송과 굵직한 사건들을 통해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었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국내용이다.
하다못해 국내 최대의 한의원 체인이라 할 수 있는 위천 한방병원과 비교하면 잘나가는 원화 한의원도 초라해진다.
전국에 체인점을 낸 브랜드와 일개 한의원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한지호는 미리부터 더 큰 꿈을 꾸고 있었다.
블랙문 카지노에 투자하면서 거대한 야망을 현실로 만들 기회를 잡았다.
막연하게 그려 봤던 해외 진출.
그것이 더 이상 망상만은 아니다.
한지호는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한 걸음씩 준비를 해 나갈 작정이었다.
“회장님께서 투자해 주신 10억은 두 달 안에 완전히 갚겠습니다.”
“그렇게나 빨리? 빨라도 내년, 아니면 그 후년까지 예상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이자도 없는 돈이니 더 갖고 있는 게 낫지 않은가?”
황만금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의 이마에 떠오른 주름이 한층 짙어졌다.
10억 원은 원화 한의원을 개원하는 데 쓰라고 투자해 준 금액이다.
말이 투자이지, 공짜로 빌려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지호는 태자병을 치료해 주고 받은 신용증으로 10억 원을 유치했다.
황만금의 말대로 이자가 없는 수준이기에 굳이 일찍 갚을 필요가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지호는 두 달 안에 무려 10억 원을 완전히 상환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그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뉴스에서 보셨겠지만, 블랙문 카지노가 기대 이상의 수익을 올리고 있습니다. 원화 한의원의 매출도 완전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지난번 가짜 백수오 파동 이후로 예약이 한 달 가까이 꽉 차 있을 정도입니다. 여력이 안 되면 모를까, 회장님께 진 신세부터 갚고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싶습니다.”
“자네의 마음이 정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인 게지.”
“회장님 덕분에 원화 한의원을 열 수 있었습니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겠습니다.”
“그런 말 말게. 내가 은혜를 베푼 게 아니라 자네가 정당한 대가를 받아 간 것이니. 한 원장이 없었다면 내가 이리 멀쩡할 수 있었겠나. 아직도 태자병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었을 것이네.”
황만금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묻어 나왔다.
둘의 만남이야말로 한 편의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폭력 사건에 휘말려 무적(無籍) 상태의 한의사였던 한지호가 황만금을 만나서 난치병을 치료한 스토리는 웬만한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했다.
잠시 과거를 회상한 황만금이 예리한 눈빛으로 한지호를 쳐다봤다.
황만금은 날카롭고 깐깐한, 그러나 누구보다 현금을 잘 굴린다고 알려진 평창동의 큰손다운 질문을 던졌다.
“수익으로 따지면 계속 카지노에 돈을 묶어 놓는 게 현명하겠지만, 자네의 목적은 그게 아니겠지?”
“카지노는 거쳐 가는 과정입니다. 실탄을 확보하기 위한 보급소일 뿐이죠.”
“보급소라. 재밌는 표현이네만, 그렇게 확보한 실탄으로 어디부터 조준할 텐가?”
“두 가지 방안을 놓고 고민 중입니다.”
“두 가지나?”
“위천 한방병원처럼 국내 한의학계를 주름잡는 체인을 세울지, 아니면 바로 중국으로 넘어가 대륙에서 승부를 볼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흐으음……. 둘 다 쉬운 길은 아니로구만. 하나 자네답게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원대한 꿈일세.”
“올해가 끝나 가기 전에는 결정을 내려야죠.”
담담하게 말했지만 대화 내용은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황만금은 남들은 꿈조차 꾸기 힘든 목표를 설정하고 현실로 만들어 가는 한지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눈앞의 젊은 한의사라면, 그가 아는 한지호라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이뤄 낼 것만 같았다.
우웅- 우웅-
그때 한지호의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울음을 토해 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회장님.”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받게.”
한지호는 몸을 살짝 돌리고 전화를 받았다.
그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동생 조기운의 전화였다.
조기운은 한지호가 황만금을 만나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화를 한 걸 보면 중요한 일인 것 같았다.
“무슨 일이야?”
(형님, 김영찬 교수가 일을 냈습니다.)
“뭐?”
(형님께서 블랙문 카지노의 의료 자문이 됐다는 걸 문제 삼아 한의사 협회 윤리위원회에 안건을 올렸습니다. 가짜 백수오 파동 때와 달리 이번에는 윤리위원회에서 안건을 심각하게 다룰 것 같습니다.)
“그 양반이 기어코 일을 내는군.”
안 좋은 소식이었다.
그러나 한지호는 차분하게 반응했다.
또다시 발목을 거는 김영찬 교수의 행태에 화가 치솟았지만 이럴수록 더 냉정해져야 하는 법이다.
그의 눈빛에서 싸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비로소 외나무다리에 올랐다.
한의학계의 로열패밀리인 김영찬 교수와 한지호, 둘 중 한 명은 나무 아래로 추락해야만 끝날 싸움이 시작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