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08화 (108/255)

# 108

2장, 도약 (2)

쿠당탕탕!

떠들썩하게 복도를 뛰어온 한지호가 객실 문을 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문이 잠겨있지 않아 곧바로 방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황 선생님?”

“하, 한 원장님…….”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서자 바들바들 떨고 있는 황태수가 보였다.

영종도에서 전화를 받고 시간이 꽤 지났지만 아직 발작이 진행 중인 모양이었다.

한지호는 고개를 돌려 침대 쪽을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황태수의 아내가 기괴한 자세로 몸을 비틀며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평소에는 말수 적고 온순한 중년 여인이지만, 지금은 흰자를 까뒤집고 이상한 소리를 내는 광녀(狂女)였다.

다행히 그녀는 침대 위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예전처럼 베개 시트나 침대 이불을 집어 뜯고 있지만, 한지호에게 덤벼들었던 때처럼 폭력성을 강하게 표출하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한지호는 그녀를 자극하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춰서 황태수에게 질문을 했다.

“좀 어땠습니까?”

“약을 먹기 전보다는 훨씬 얌전해진 것 같았습니다.”

“다른 변화는 없었고요?”

“아내가 한 쪽 눈이 잘 안 보이는 것 같다고…….”

“알겠습니다. 아직 발작 중이니 진맥을 해보겠습니다.”

한지호의 말에 황태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전에도 발작 중에 진맥을 하려다 그의 아내가 난동을 피웠고, 한지호가 제압을 하는 과정을 괴롭게 지켜봤었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망설임 없이 황태수의 아내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광전증으로 발작을 하는 동안 어마어마한 괴력을 뿜어내는 걸 이미 경험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광전사가 되어도 오금희를 수련한 한지호 앞에서는 어린 아이와 마찬가지다.

그는 이번에도 어렵지 않게 황태수의 아내를 제압하고 진맥을 하리라 생각했다.

스으윽-

한지호가 침대 가까이 다가섰다.

낯선 기척을 느낀 것일까.

기이한 자세로 발작을 하고 있던 황태수의 아내가 경계하는 태세를 보였다.

한지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팔을 뻗었다.

두 팔에는 오금희 웅공의 힘이 실려 있다.

곰처럼 강력하고 우직한 힘으로 그녀를 제압한 뒤 진맥을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원래대로라면 황태수의 아내는 미친 듯이 반항을 하며 달려들어야 한다.

웬만한 성인 남성은 우습게 여기는 괴력이 터져 나왔어야 했다.

하지만 보통의 중년 여인들처럼 힘없이 손을 휘젓는 게 고작이었다.

‘응? 이거……?’

한지호는 그녀의 손짓을 너무 가볍게 피해내며 눈을 크게 떴다.

발작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게 힘이 줄어들었다.

광전사다운 모습은 전혀 없고 그저 정신이 나간 아주머니일 뿐이다.

꽈악-!

한지호는 일부러 힘을 세게 줘서 그녀의 팔을 잡았다.

“아아악!”

그의 악력을 견디지 못하고 황태수의 아내가 비명을 질렀다.

광전증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에서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통증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광전증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

“워, 원장님…….”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황태수는 애가 탔다.

한지호가 오늘따라 유독 그의 아내를 거칠게 다루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평소와 똑같은데 황태수의 아내가 발작 시에 예전보다 유약해진 것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황 선생님.”

한지호는 황태수를 진정시키며 진맥을 시작했다.

힘없이 제압당한 그녀의 맥에 손을 가져갔다.

손끝으로 맥박이 느껴지며 생생한 정보를 전해줬다.

호흡과 눈빛, 달라진 힘의 세기까지 어느 하나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똑같은 시공간에 있지만 한지호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관찰하며 한의학적으로 분석한다.

털썩-

한지호가 황태수의 아내를 밀어냈다.

그녀는 맥없이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굳이 혈도를 짚어 기절을 시킬 필요도 없었다.

제풀에 지친 그녀는 다시 일어설 생각을 못하고 침대 위에 멍하니 누워 있었다.

눈동자를 보니 아직 발작이 풀리지 않았지만 전혀 위험한 상태가 아니었다.

지금 같은 힘이라면 황태수도 그녀를 제압할 수 있을지 모른다.

“괜찮습니다, 황 선생님. 약효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지호는 고개를 돌려 황태수를 바라봤다.

아내의 오랜 발작으로 인생이 망가진 중년 남자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간 한지호가 조심스레 어깨를 두드렸다.

나이는 한참 어리지만 황태수의 아내를 책임지는 한의사로서 보호자를 진정시키는 것이다.

이 역시 의사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약이… 잘 듣고 있는 것이지요, 원장님?”

“네.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곧 사모님의 발작이 끝나고 잠이 드실 겁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1층 카페에 내려가서 나누시죠.”

“알겠습니다. 오늘도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황태수가 한지호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한지호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 이들 부부에게 새로운 인생이 열릴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의술이 누군가의 새 삶을 여는 열쇠가 된 것 같아 기뻤다.

황태수 부부에게 더 바라는 건 없었다.

세상에 다시없을 진정한 사랑을 보여준 황태수가 부인과 행복하기만을 바랄 따름이었다.

+++

“오늘도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같이 알려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좋은 소식만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M 호텔 1층의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한 한지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황태수가 앉아 있었다.

황태수는 발작을 끝내고 잠든 아내를 확인한 후 부랴부랴 1층으로 내려왔다.

약효와 치료 경과에 대해 설명을 듣기 위해서였다.

“좋은 소식이 있다니 다행입니다. 원장님을 만나기 전에는 온통 나쁜 소식밖에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아마 오늘은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한지호는 테이블 위에서 피어나는 커피 향을 음미하며 자신있게 말했다.

분명 나쁜 소식도 함께 전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 전할 좋은 소식은 이제까지의 뉴스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황태수의 그늘진 얼굴에도 미소가 번질 거라고 생각했다.

“황 선생님, 사슬로 만든 약이 제대로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평소보다 발작의 강도가 약해진 게 보이지 않으셨습니까? 괴력도 줄어들었고, 난폭한 공격성도 많이 완화됐습니다. 발작 도중의 맥과 호흡도 정상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맥이 빠르지만, 지난 번 발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속도가 줄었습니다.”

“그… 그 말씀은…….”

“맞습니다. 사모님의 광전증이 치료가 되고 있습니다.”

한지호가 말을 마치자마자 황태수의 눈가에서 굵은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마치 배우들이 연기를 위해 안약을 넣은 것처럼 순식간에 눈물 줄기가 터졌다.

지난 세월 내내 쌓여있던 울화가 풀린 것일까.

치료 되고 있다, 는 말을 듣기 위해 인생을 걸었던 황태수다.

드디어 그 말을 듣게 된 것이다.

그로인한 감동을 다른 사람이 쉽게 짐작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호텔 카페의 다른 사람들이 이상한 눈길로 쳐다봤지만 개의치 않았다.

한지호는 황태수가 감정을 정리할 때까지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다.

1년, 2년에 걸친 아픔이 아니다.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시간 동안 응어리진 아픔이 눈물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원장님. 나이 먹어서 이런 추태를…….”

“아닙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지호가 테이블 위의 티슈를 황태수에게 건넸다.

눈이 빨갛게 충혈 된 황태수는 티슈로 남아있는 눈물을 닦아냈다.

곧이어 그가 뜨거운 커피를 단숨에 마셨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인지 뜨거움을 느끼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괜찮으세요?”

“네, 원장님. 이제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너무 감정이 차올라서 그만.”

“더 우셔도 됩니다. 저도 사모님의 맥을 짚고 울컥했으니까요.”

“그럼 이대로 약을 계속 복용하면 완치도 되는 것입니까?”

“발작이 완전히 없어질 걸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주 가끔, 굉장히 미약한 발작은 일어날 가능성도 존재합니다만… 예전과 같은 괴력과 폭력성은 사라질 겁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원장님. 앞으로 평생 은인으로 모시겠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어흐흐흑.”

연신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던 황태수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한 때는 아내의 치료를 간절히 원했었지만, 언젠가부터는 희망도 사라져갔다.

완치는 꿈에서나 가능할까 싶었다.

죽지 못해 살아가며 마지막으로 잡아본 동아줄이 TV에서 본 한지호였다.

막무가내로 전화를 걸어 떼를 쓰면서도 설마 한지호가 자신을 찾아올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꿈이 현실이 됐다.

한지호가 태백으로 찾아와 진료를 봤고, 서울에 있는 호텔에 묵게 해주며 어려움 끝에 치료를 해냈다.

황태수는 지난 몇 주가 꿈처럼 느껴졌다.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고, 신혼의 단꿈에 젖어있던 시기를 제외하면 인생에서 가장 벅찬 날이었다.

완전히 사라지는 것 같았던 희망을 다시 발견하고, 그 희망이 실현되는 걸 체험했기 때문이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황태수가 손을 뻗어 한지호의 두 손을 잡았다.

한지호는 그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손을 통해 전해지는 따뜻한 체온이 마음까지 뜨겁게 데우는 것 같았다.

“어떻게 갚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원장님.”

“황 선생님은 제게 사랑이란 무엇인지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원장님…….”

“그보다 이제 안 좋은 소식을 전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치료가 되고 있는데 다른 소식은 무엇이든 괜찮습니다.”

황태수가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지호는 이미 부작용에 대해 경고를 해뒀다.

평생 장애가 남을 가능성도 높다고, 심지어 뇌사 상태에 빠질 확률도 있다고 단단히 일러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태수와 그의 아내는 사슬로 만든 약을 복용했다.

다행히 치료 효과가 나타나고 있으니 뇌사에 빠질 염려는 없다.

다만 한지호가 경고한 부작용은 감수해야 했다.

사슬은 독사의 천적으로 분류되는 독충이다.

위험한 맹독으로 약을 만들었으니 인체에 무해(無害)할 수는 없다.

이독제독은 한의학에서도 함부로 시도하는 치료법이 아니다.

환자의 생명에 영향을 끼치지 않고 치료 효과를 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후우-.”

한지호가 한숨을 들이마셨다.

광전증을 치료했다는 것은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소식이었다.

그러나 부작용에 대해 말하는 건 의사 입장에서 유쾌할 수 없다.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다스린 그가 입을 열었다.

“사모님은 한 쪽 눈은… 영영 시력을 잃게 될 것 같습니다.”

“실명…… 인 것입니까?”

“사슬의 독이 몸 안의 뱀독을 이겨냈지만, 대신 눈으로 올라갔습니다. 머리로 올라가는 최악의 경우는 피했다는 사실로 위로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의원으로서 제 한계입니다. 죄송합니다.”

“죄송이라니요, 그 말씀 거둬주십시오. 원장님이 아니었으면 우리 부부는 절망 속에서 죽어갔을 것입니다. 아내도 기뻐할 겁니다. 눈을 다 잃은 것도 아니고, 제가 아내의 한 쪽 눈이 되어 살아가겠습니다.”

이번에는 황태수가 한지호를 위로했다.

한지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광전증을 치료하며 한의사로서 또 한 단계 벽을 뛰어넘은 것 같았다.

돈이나 대가를 떠나서 순수하게 치료에 몰입했던 시간이었다.

한계는 있지만 불가능은 없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한지호는 스스로의 의술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경계 너머를 엿보고 돌아온 기분이었다.

의술로 누군가의 인생을 새롭게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은, 사나이의 뜨거운 눈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온 마음을 다한 감사 인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때로 금은보화보다 더 값진 보상이 된다.

카지노 사업이 대박이 나고, 앞으로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거물이 되더라도 의원이라는 정체성은 한지호의 마음 깊이 새겨져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서른 살의 한의사, 한지호.

또 한 번 성장한 그의 보폭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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