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07화 (107/255)

# 107

2장, 도약 (1)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손에 땀이 났다.

이보다 더 긴장되는 순간이 언제였는지 손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황만금의 태자병이 회광반조 현상을 보이던 날, 또는 김해수의 구음절맥을 음양교합의 원리로 치료하던 날 정도를 제외하면 단연 최고로 긴장되는 순간이다.

한지호의 눈앞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아있었다.

황태수와 그의 아내는 한지호가 지어온 약을 방금 막 받아들었다.

이제 황태수의 아내가 처음으로 약을 먹을 차례였다.

독사의 천적인 사슬로 만든 한약이다.

인체에 유해한 독성을 최대한 증발시키고, 사독에 대항하는 약효만 남겼지만 그래도 보통의 한약과 비교할 수는 없다.

어마어마하게 독성이 높은 약이고,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황태수의 아내가 약의 힘을 이겨내지 못할 가능성도 농후하다.

한지호는 이미 평생 남을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고 경고를 해두었다.

그럼에도 황태수와 그의 아내는 약을 먹겠다고 결심했다.

지금처럼 살아도 산 게 아닌 삶을 살며 죽어가느니 한 가닥 희망에 모든 것을 걸어 보려는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만약 약이 잘못되어 황태수의 아내가 뇌사 상태에 빠지거나 심한 중독 증상을 보인다면 어떻게 될까.

황태수도 사람이기에 이제까지의 은혜를 잊고 원망의 화살을 한지호에게 쏘아댈 것이다.

누구나 극한의 상황에서는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들기 마련이다.

한지호는 이러한 원리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법적으로든 인간적으로든 자신이 엄청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의원이 책임질 것을 두려워해서 치료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한지호는 의성(醫聖)으로 추앙받았던 규호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전생의 규호처럼 우직하고 미련하게 살 생각은 없지만, 의원으로의 신념만은 똑같았다.

처음 한의대에 합격하고 선서를 하던 순간의 초심을 저버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K대학의 강당에서 히포크라테스 선서 대신 허준 선서를 하던 스무살의 한지호는 서른이 되었어도 같은 마음으로 환자를 대하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어 망설이는 황태수의 아내를 안심시켰다.

“약을 드시는 순간부터 책임은 우리 모두 함께 져야 합니다. 의원으로서 감당해야 할 몫을 회피하지 않겠습니다.”

그리 특별한 말은 아니었다.

자신을 믿으라거나 약을 먹으면 무조건 나을 거라는 보장도 아니다.

그저 의원으로서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담담한 말이었다.

하지만 거기 담긴 진심이 황태수의 아내를 안심시켰다.

허황된 말로 자신을 포장하는 사람들은 널리고 널렸다.

그러나 안 좋은 결과가 나와도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는 진솔한 다짐을 밝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중년을 넘긴 황태수와 그의 아내도 한지호 같은 의사를 찾기 힘들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황태수의 아내가 낮은 음성으로 느리게 말을 했다.

태백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한지호가 제법 익숙해졌기에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한지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약을 지은 한의사가 긴장한 기색을 보이면 환자는 더 불안해질 것이다.

황태수는 말없이 아내의 허벅지에 손을 올려 놓았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한지호의 눈에도 보였다.

꿀꺽-

약을 먹는 소리보다 황태수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그의 아내는 한지호가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어낸 약을 남김없이 마셨다.

한 포를 그릇에 담아 깨끗하게 비운 것이다.

한지호는 땅꾼 이인형 덕에 얻은 사슬로 보름 분량의 약을 지었다.

하루에 두 번, 보름이면 무려 서른 포의 약이다.

독성이 강한 약이기에 절대 적은 양이 아니었다.

한지호는 약이 통한다면 보름 안에 사독을 몰아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당장 첫 번째 포를 복용했다고 해서 드라마틱한 변화가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과 내일이 다르고, 하루가 지날수록 발작의 강도와 빈도가 줄어들 거라 믿었다.

“많이 쓰죠?”

“괘, 괜찮습니다.”

“약을 다 드실 때까지는 계속 M 호텔에 머무세요. 작은 변화라도 발생하면 지금처럼 바로 연락을 주셔야 합니다.”

“네, 선생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황태수의 아내가 직접 고마움을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모든 의사 표현을 남편에게 맡기던 때보다 많이 발전한 모습이었다.

황태수는 기대와 염려가 섞인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원장님, 일단 이 약만 잘 먹으면 되는 것입니까?”

“네. 아마 몇 번 더 발작이 있겠지만 그때마다 달라진 게 보이는지 체크해보겠습니다. 그리고…….”

한지호는 어려운 말을 꺼내기 전 잠시 뜸을 들였다.

하지만 시간을 끌수록 황태수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아 곧바로 말을 이었다.

“전에 말씀드린 부작용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모릅니다. 색다른 증상이 보이면 놀라지 마시고 제게 알려주세요.”

“그러겠습니다. 아내의 지긋지긋한 발작을 치료할 수만 있다면 감수하지 못할 게 없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원장님.”

세상의 풍파를 모질게 겪은 황태수가 연신 고개를 숙였다.

한지호는 큰 삼촌 뻘인 그의 손을 가만히 잡아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니 하늘이 돕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남은 보름이 무척 더디게 흘러갈 것 같았다.

+++

“어떻습니까?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마창우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비정상적으로 넓게 벌어진 어깨를 쫙 펴고 서있었다.

한지호는 마창우의 손끝을 따라 쫙 펼쳐진 영종도 국제 특구의 공사 현장을 바라봤다.

목화 현상으로 갑자기 쓰러졌던 추진위원장 허충욱을 치료해낸 덕분에 내국인 카지노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마창우의 블랙문 코퍼레이션은 H 호텔 지하에 들어서는 내국인 카지노 사업권을 따냈다.

강원도 정선에 이어 국내에 두 번째로 유치되는 카지노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엄청난 세금 수입을 기대하고 있는 인천시에서도 카지노 사업을 팍팍 밀어주고 있었다.

정선보다 훨씬 더 좋은 위치, 거기에 최신 시설과 압도적인 규모로 승부수를 띄웠다.

망하고 싶어도 망할 수가 없는 사업이 바로 영종도에 들어설 내국인 카지노다.

한지호는 50억 원의 현금을 투자한 투자자이자 사업을 성사되게 만든 VIP다.

사실 50억 원이라는 투자 규모는 내국인 카지노 사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진 않는다.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수백 억 원 이상의 투자자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지호가 블랙문 코퍼레이션의 대표인 마창우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는 이유는 명확하다.

다름 아닌 그의 신통한 의술 때문이다.

한지호는 마창우를 괴롭히던 잘린 손가락 부위의 환상통(幻想痛)을 치료하며 투자 기회를 잡았다.

뿐만 아니라 허충욱을 일주일 만에 일어서게 만들어 입찰을 성사시키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다.

자칫 놓칠 뻔 했던 내국인 카지노 사업권을 한지호가 원래 궤도로 돌려놓은 것이다.

그렇기에 마창우는 그를 누구보다 중요한 투자자로 대우했다.

사실 이런저런 이해득실을 따지기 전에 한지호의 의술에 순수하게 감탄한 것도 한 몫을 하고 있었다.

“공사는 언제 끝나는 거죠?”

“다음 달이면 H 호텔에서 투숙객을 받기 시작합니다. 이미 중국 관광객과 내국인 고객들로 예약이 꽉 차있습니다.”

“호텔 오픈과 동시에 카지노도 오픈을 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물론 VVIP만을 위한 특별한 이벤트는 따로 있습니다.”

마창우가 그냥 흘려 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한지호는 반색하며 질문을 계속했다.

“VVIP를 위한 특별한 이벤트라면?”

“전야제입니다. 세계 어느 축제를 봐도 전날밤의 파티가 가장 화려합니다. 중국과 일본, 홍콩, 그리고 한국의 VVIP들을 특별히 초청해 전야제를 열 계획입니다.”

“카지노에서 전야제를 연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봅니다만…….”

“외부에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외국의 카지노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그렇군요.”

“한 원장님도 참석하셔야 합니다.”

“제가요?”

“당연한 말씀을! 블랙문 카지노의 가장 중요한 일원 아니십니까. 그날 모이는 VVIP들을 만나면 원장님께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마창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VVIP들도 모이겠지만, 그보다 중국과 동남아에서 초청 받은 손님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거부일 것이다.

그들과 안면을 트고 인사를 나누는 기회는 돈으로 살 수 없다.

게다가 한지호는 당장은 아니라도 중국에 진출해서 한의학으로 중의학을 누를 생각을 하고 있었다.

블랙문 카지노의 전야제에 올 중국의 거부들은 훗날 소중한 발판이 될지도 모른다.

특히 돈이 많은 부자들 중에는 성인병이나 지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꽤 있다.

아무래도 기름진 음식과 방탕한 생활을 즐기다보면 건강이 나빠지기 마련이다.

한지호는 전야제에서 뜻밖의 기회를 얻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블랙문의 투자자로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이겠습니다.”

“그러실 겁니다. 한 원장님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마창우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남들이 보기에 이상할 정도로 한지호를 인정하고 있었다.

물론 신기에 다다른 한지호의 의술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지만, 본능적으로 강자(强者)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마창우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전국 주먹 세계의 전설이다.

맨주먹으로 칼과 야구방망이를 든 상대 조직원 수십 명을 때려눕힌 일화는 주먹 세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렇기에 보통 사람과는 다른 직감을 가지고 있다.

그런 마창우의 직감과 본능이 한지호를 볼 때마다 요동을 치는 것이다.

의술도 의술이지만 알 수 없는 위험한 뭔가가 있는 사람임을 내심 짐작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대화를 나누던 한지호가 품안에서 스마트 폰을 꺼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원장님.”

“그럼.”

고개를 돌려 발신자를 확인한 한지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스마트 폰 액정 화면에 황태수의 이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슬로 만든 약을 그의 아내에게 건넨지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은 아무 부작용이 없었고, 발작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영종도 현장에 나와있을 때 전화가 온 것이다.

한지호는 서늘하게 가라앉은 기분으로 스마트 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한지호입니다.”

“워, 원장님.”

“말씀하세요.”

“아내가 다시 발작을… 발작을 시작했습니다.”

“평소처럼 가만히 지켜만 보고 계세요. 제가 지금 인천이라 가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호텔 객실 밖으로만 나가지 못하게 막으시고, 평소와 다른 모습이 보이면 바로 알려주세요. 최대한 빨리 가겠습니다.”

“네, 네.”

황태수는 당황한 것 같았지만 한지호의 말을 잘 알아들었다.

그동안 원화 한의원 근처에 머물면서 상황이 많이 안정 됐기 때문에 침착함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한지호는 궁금해 하는 마창우에게 양해를 구했다.

“마 이사님, 죄송합니다만 급한 환자 때문에 서울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아주 위중한 환자인 것 같은데 얼른 가보십시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먼저 생각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요즘에는 한 원장님 같은 의사들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다음에는 전야제에서 뵙겠습니다.”

“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한지호와 마창우는 블랙문 카지노의 전야제를 기약하며 악수를 나눴다.

짧고 굵게 인사를 나눈 한지호는 바로 큰 길가의 택시를 잡았다.

영종도 국제 특구로 올 때도 택시를 이용했다.

비즈니스 때문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큰 길에는 택시들이 즐비했다.

택시에 탄 한지호가 다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님, 역삼역 M 호텔로 부탁합니다. 30분 안에 도착하면 20만 원을 드리겠습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멀쩡한 택시를 총알 택시로 만든 한지호가 주먹을 꽉 쥐었다.

사슬로 만든 한약이 제대로 통하고 있는지, 대략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순간이 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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