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10장, 귀신 (2)
“사모님께서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진맥을 시작하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힘으로 제압을 하는 경우도 발생할 것 같습니다.”
한지호는 호텔 구석에 석상처럼 서있는 황태수에게 말을 건넸다.
어차피 황태수의 아내는 실성한 것과 마찬가지다.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부, 부탁드리겠습니다.”
황태수의 허락을 받은 한지호는 망설이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그녀는 여전히 침대 위에 엎드린 채 이상한 소리를 내며 이불을 잡아 뜯고 있었다.
마치 한 마리 짐승이 먹잇감의 내장을 갈라내고 있는 것처럼 섬뜩한 광경이었다.
우우우웅-
오금희 웅공의 기운이 한지호의 몸을 가득 채웠다.
흔들림 없이 단단한 내공 덕분인지 담력도 일취월장한 것 같았다.
한지호는 무서움을 느끼지 않고 팔을 뻗어 그녀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 순간, 이제껏 혼자 소리를 내며 기이한 행동을 하던 황태수의 아내가 돌변했다.
낯선 타인의 손이 몸에 닿자마자 한 마리 맹수처럼 몸을 뒤집으며 이빨을 드러낸 것이다.
“끼야아아-!”
하이톤의 울음소리에 노골적인 적의(敵意)가 담겨 있었다.
아무리 방음이 잘 된 특급 호텔이라고 해도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을까 걱정 될 정도였다.
단순히 소리를 지른 것만이 아니다.
송곳니를 드러낸 그녀는 하얗게 변한 눈동자를 번뜩이며 한지호를 노려봤다.
가만 놔두면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한지호를 죽이려 들 것 같았다.
슈웅-!
황태수의 아내가 공격을 시도했다.
손톱을 날카롭게 세우고 한지호를 향해 휘두른 것이다.
간발의 차로 피하지 않았다면 흉한 상처가 생길 뻔 했다.
‘제압을 하는 수밖에 없겠군.’
한지호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난 채 판단을 내렸다.
보통 사람이면 중년 여성이 미쳐서 달려들면 겁을 먹을 것이다.
물리력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라도 제정신이 아닌 사람 앞에서는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지호는 시종일관 냉정하게 그녀의 증상을 파악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처음 호텔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사뭇 공격적으로 변한 지금까지, 그녀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입력했다.
오금희를 익히며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한지호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황태수의 아내를 제압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패턴으로 발작을 하는지 조금 더 지켜보고 싶었다.
그래야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타악!
한지호가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때렸다.
일부러 야성을 자극하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황태수의 아내는 더욱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다.
앙칼진 울음을 터트리며 한지호에게 달려든 것이다.
“끼야앗!”
마구잡이로 달려들며 양 팔을 휘두루는 모양이 심상치 않았다.
웬만한 성인 남성이라도 기가 질려 당할 것 같았다.
그러나 한지호는 능숙하게 모든 공격을 피해냈다.
쏟아내는 공격도 가지가지였다.
양손을 휘두르는 것은 물론이고, 입을 벌려 한지호의 목을 물어뜯으려는 시도도 했다.
깨무는 게 아니라 정말 물어뜯으려는 게 분명했다.
침대 시트와 이불을 찢어놓은 것처럼 살아있는 사람도 충분히 찢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으으… 으으으으…….”
한지호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자 분이 차오른 모양이다.
그녀의 신음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하이톤의 비명이 아니라 이불을 찢을 때처럼 저음으로 변한 것이다.
이쪽이 한층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이건? 살기다!’
한지호의 눈빛이 변했다.
황태수의 아내가 뚜렷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 정도 기운이라면 건장한 성인 남성의 다리 힘을 풀리게 할 수 있다.
의식적으로 살기(殺氣)를 뿜어내는 건 고도로 훈련 받은 무인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현대에서는 특전사 정도는 되어야 넘볼 수 있는 경지다.
그런데 평상시에는 힘없이 비실거리기만 하는 중년 여인이 발작 상태에서 진한 살기를 뿜어낸 것이다.
쉽게 생각 할 일이 아니었다.
확실히 단순한 간질 발작과는 차원이 다른 패턴이다.
정신과 전문의들이 마땅한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한 게 이해 됐다.
기존의 의학 상식으로는 풀 방법이 없는 특수한 발작이었다.
파박!
살기를 뿜어내던 그녀가 바닥을 박찼다.
순식간에 한지호의 코앞까지 다가와 두 팔을 뻗었다.
이전과는 다른 힘이 실려 있는 게 감지됐다.
만만하게 보고 맞았다간 꽤 심각한 상처를 입을 것 같았다.
‘때가 됐어!’
한지호가 왼손으로 그녀의 두 팔을 동시에 쳐냈다.
투두두둑!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살기 넘치던 황태수의 아내가 휘청거렸다.
이게 끝이 아니다.
남은 오른손이 그녀의 목을 틀어쥐었다.
그대로 목을 부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거친 동작이었다.
웅공의 묵직한 기운이 발휘되고 있기에 황태수의 아내는 단숨에 제압당했다.
“케… 케에에…….”
겨우 숨을 쉬는 게 고작이었다.
한지호는 그녀의 목을 잡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숨만 쉴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뒀다.
이 상태에서는 발작보다 더한 것을 해도 반항을 하기 힘들다.
황태수의 아내도 잠시 몸을 바둥거리다 말았다.
목적을 이룬 한지호는 왼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만졌다.
자세가 희한하지만 이렇게라도 맥이 뛰는 걸 느끼려는 것이다.
목을 움켜쥔 오른손을 통해서도 그녀의 체온과 호흡 강도를 체크하고 있었다.
‘제압을 당한 상태인데도 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어. 마음껏 날뛸 때였으면 보통 사람의 10배는 족히 넘겼겠어.’
왼손으로 대충 진맥을 했지만 그녀의 맥은 정상의 범주를 한참 넘어섰다.
이 정도 속도로 맥이 계속 뛰면 심장이 터질지도 모른다.
발작 시간이 길지 않아서 망정이지 몸에 무리가 갈 정도의 맥박이다.
황태수의 아내는 발작을 안 할 때도 기운 없이 멍하게 앉아있었다.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계속되는 발작에 지쳐서이기도 하지만, 인체의 모든 기운을 쏟아내고 나니 평상시에 힘이 남을 리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 맥이 빨리 뛸 수 있는 거지?’
원화 한의원을 개원하고 수많은 임상 경험을 쌓았지만 이렇게 맥이 빨리 뛰는 사람은 처음이다.
일요일 태백에서 진맥을 했을 때는 이렇지 않았었다.
결국 발작이 문제라는 뜻이다.
‘일단은 진정부터 시키자.’
한지호는 오른손에 힘을 더 줬다.
그녀의 목을 거쳐 전신에 가해지는 충격의 강도가 높아졌다.
이윽고 도저히 말려지지 않을 것 같던 황태수의 아내가 축 늘어졌다.
흰자로 번들거리던 눈이 감겼고, 빳빳하게 세워져있던 열 손가락도 자연스레 말렸다.
호흡이 모자라지면서 의식을 잃은 것이다.
강제로 그녀를 기절시킨 한지호는 그제야 오른손에 힘을 풀었다.
웅공의 기운이 워낙 강해서 절묘하게 파괴력을 조절하느라 애를 먹었다.
털썩-
기절한 그녀를 아수라장이 된 침대 위에 눕힌 한지호가 고개를 돌렸다.
숨소리도 제대로 못 내면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황태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의식을 잃은 것뿐, 사모님의 몸에 해를 끼치진 않았습니다.”
“네…… 고, 고생하셨습니다.”
“다른 때에도 발작을 시작하면 오늘 같은 행동을 보였습니까?”
“그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오늘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뭔가를 잡아 뜯거나 부수는 게 보통입니다.”
“말리려고도 해보셨겠군요.”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원장님께 덤볐듯이 난리가 납니다. 성인 남자 둘이 달려들어도 말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저 혼자서는 도저히……. 처음에는 계속 씨름을 하다가 상처도 많이 입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니 그냥 내버려두게 됐습니다.”
말을 마친 황태수가 고개를 떨궜다.
아내가 귀신이 들린 것처럼 발작을 해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남편의 자괴감이 느껴졌다.
한지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태백에서 황태수 부부를 봤을 때부터 골치가 아플 거라 생각했었다.
예상대로 그녀의 발작 증세는 상상을 초월했고, 신경과와 정신과 전문의들이 항복한 미지의 질병은 무척 끈질길 것 같았다.
영종도 내국인 카지노 사업이 확정됐고, 대규모 투자를 앞둔 시점에서 암초를 만난 것이다.
사실 한지호는 최선을 다했다.
이쯤에서 치료가 힘들다고 말하고 물러나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황태수의 눈빛이 계속 그의 마음을 잡아끌었다.
호텔방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기절한 아내를 바라보는 50대 아저씨의 눈빛.
염려와 연민, 애정이 뒤범벅이 되어 세상 누구보다 복잡한 심경을 담은 그 눈빛을 저버릴 수 없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조, 좋은 소식부터 듣고 싶습니다.”
황태수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한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좋은 소식을 말해줬다.
“사모님이 무슨 병을 앓고 있는지, 짐작 되는 게 있습니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짐작일 뿐이지만 확률이 높을 것 같네요. 확진을 하려면 몇 가지 테스트를 더 해봐야 합니다만.”
“원장님!”
황태수가 자기도 모르게 다가와 한지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 어떤 의사도 아내의 병명을 알아내지 못했었다.
간질이라는 진단은 오진이었고, 정신과 전문의들은 몇 달에 걸친 입원 끝에 원인불명의 정신분열이라는 뻔한 답만 내놓았었다.
조현증이라는 정신과 진단이 맞았다면 약물 치료가 통해야 하는데 조금의 차도도 없었다.
한지호의 진단도 틀릴지 모른다.
중요한 건 진단이 아니라 치료 경과다.
하지만 황태수는 뭔가 남다른 한지호의 말에 희망을 느낀 것 같았다.
“나쁜 소식도 남아있습니다, 황 선생님.”
“나쁜 소식은 어떤…….”
“치료법이 있습니다만, 반드시 부작용을 동반합니다. 그것도 평생 장애가 남는 부작용을.”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었다.
병명을 알아냈고, 치료법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평생 장애가 남는다면 과연 기뻐 할 일인가.
전쟁터에서 뼈를 주고 살을 취하는 것도 아니고, 일반인이 받아들이기엔 힘든 말이었다.
“잠시만 생각 할 시간을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한지호는 혼란에 빠진 황태수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가만히 서있었다.
아내의 발작, 그리고 한지호가 거칠게 제압하는 모습을 본 직후라 황태수도 많이 지쳐 있었다.
그런데 사뭇 충격적인 말을 들었으니 정신을 못 차리는 게 당연했다.
째깍, 째깍-
침묵 속에서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가 크게 울리고 있었다.
한지호는 황태수를 재촉하지 않았다.
정신적 패닉 상태에 빠졌을 때 사람을 잘못 건드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가 스스로 혼란을 수습하고 마음을 정리하길 기다리는 게 최선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의식을 잃은 황태수의 아내는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 편안해 보였다.
황태수도 머릿속을 가득 채운 잡념을 정리하고 겨우 입을 뗐다.
“이제 좀 진정이 됐습니다. 약한 모습 보여서 죄송합니다, 원장님.”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먼저 아내의 병명부터 알 수 있겠습니까? 원장님께서 어떻게 진단을 내리셨는지가 제일 궁금합니다.”
한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세월 제대로 된 병명도 파악하지 못하고 아내를 위해 인생을 바친 사람이 바로 황태수다.
부부를 괴롭힌 병의 정체가 무엇인지 가장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치료법과 무시무시한 부작용은 나중 문제다.
한지호는 뜸을 들이지 않고 대답했다.
“광전증(狂戰症)일 확률이 높습니다.”
“네?”
“베르세르크. 영어로는 버서커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처, 처음 듣습니다. 그게 제 아내의 병과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깊은 상관이 있습니다.”
한지호의 머릿속에서 삼국지 시대의 기억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는 전생에서 목격했던 장면들을 떠올리며 광전증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