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10장, 귀신 (1)
- 황태수 씨 부부와 함께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역삼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M 호텔에 모셨습니다, 형님. -
월요일 오전 진료를 하고 있던 한지호는 메시지를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기운이 황태수와 그의 아내를 태백에서 서울로 데려온 것이다.
M 호텔이면 원화 한의원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한 특급 호텔이다.
만약 황태수의 아내가 발작을 일으키면 언제든 달려가서 확인할 수 있는 거리다.
- 고생했다. 오늘은 푹 쉬어. -
조기운에게 답장을 보내준 한지호는 편한 마음으로 진료 스케줄을 체크했다.
오늘 예약된 환자 중에서 화급을 다투는 중환자는 없다.
간혹 마창우의 경우처럼 해결하기 힘든 중병이나 난치병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찾아온다.
그러나 원화 한의원의 주 고객층은 건강한 다이어트를 원하는 강남 사모님들과 특급 보신을 원하는 사장님들이다.
어떤 환자인지와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지만, 중환자가 아닌 경우 아무래도 에너지 소모가 덜 한 편이다.
원화 한의원의 경우 환자들이 넘치는 것에 비하면 손쉽게 수익을 올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한지호는 어려운 환자를 만나면 호승심을 불태우게 되는 것 같았다.
의원으로서 고치기 힘든 질병은 반드시 정복해야 할 벽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는 돈과 성공을 좋아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만 살아가는 건 아니었다.
의원으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했고, 그 신념을 따르다보니 지금의 부와 명예를 자연스레 이룬 것이다.
똑똑-
“원장님. 말씀드린 환자분 모시겠습니다.”
“그래요.”
진료실 문을 두드리는 간호사 이해나의 목소리가 한지호의 상념을 일깨웠다.
수간호사인 조민주가 쉬는 날이기에 이해나가 신입 간호사와 함께 2층 업무를 돌보고 있었다.
한지호는 진료 차트를 검토하며 새로운 환자를 맞이했다.
황태수 부부가 신경 쓰이지만, 지금은 진료 환자들에게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황태우의 아내가 발작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의식적으로 생각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어서오세요. 처음이시죠?”
“네, 선생님. 그런데 TV보다 실물이 훨씬 더 잘생기셨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요즘 수면장애에 시달리신다고……?”
“수면제를 처방 받아도 통 효과가 없어서요.”
그는 프로답게 진료실로 들어온 새 환자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한지호가 문진을 하는 모습에서 잡생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원화 한의원을 찾은 환자들은 100% 진심을 다하는 한지호에게 만족하고 단골이 된다.
진료를 할 때는 세상에서 유일한 주치의가 된 것처럼 성심껏 임하는 게 한지호의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손을 뻗어 진맥을 하며 또 한 사람의 환자를 마음에서부터 사로잡고 있었다.
또 다른 일주일의 시작이다.
한지호는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주어진 책임을 소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
오후 진료도 끝나가기 직전이었다.
한지호는 침대에 엎드려있는 환자의 등에서 침을 뽑았다.
“다 끝났습니다. 지어드린 약을 꾸준히 복용하시면 2주 뒤에는 차도가 있을 겁니다.”
“정말 좋아지겠죠?”
“확신합니다. 성인들의 여드름은 피부 자체보다는 몸 내부의 문제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독한 약을 쓰면 당장 효과는 좋아도 피부와 내부 장기가 손상을 입습니다. 자연적으로 체질을 개선하면 더 오래 건강한 피부를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한지호의 설명을 들은 환자가 상의를 입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은 여드름 투성이었다.
사춘기 소년보다 더 심한 상태로 사회 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였다.
이 환자는 잘 나가는 로펌의 변호사지만 여드름 때문에 대인 관계에 자신감이 떨어져 고민이라고 했다.
꿀릴 게 없는 스펙이지만 여드름이 자신감을 뺏어가서 여자친구도 없다고 한다.
당연히 피부과에서 안 받아본 치료가 없는 환자다.
특별 관리와 약물 치료는 물론이고, 레이저 박피까지 받았지만 효과는 그때뿐 시간이 지나면 다시 여드름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러다가 TV에 나와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한지호를 보고 원화 한의원까지 찾아온 것이다.
한지호는 즉각적인 효과를 내는 자극적인 요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믿고 따라오면 자연적으로 체질을 개선해서 여드름이 재발하지 않게끔 치료하겠다고 말했다.
그동안 치료와 재발의 반복에 지쳐있던 환자로서는 한지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 이번에는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아직도 여드름으로 씨름하고 있으려니 마음이 참…….”
옷을 다 입고 일어선 환자가 자조적인 말을 내뱉었다.
그는 누구 못지않게 잘 나가지만 한낱 여드름을 해결 못해서 자존감이 낮아졌다.
대형 로펌의 변호사라는 직업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남들은 고작 여드름이 무슨 문제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어떤 질병이건 환자 입장에서는 사소한 문제가 생사를 가르는 큰 문제처럼 여겨지기 마련이다.
한지호는 눈앞에 선 남자 환자의 여드름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의 인생과 자존감을 치료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2주 뒤에 또 뵙죠. 그때는 지금보다 마음이 편해지실 겁니다.”
“네. 오늘 감사했습니다, 원장님.”
오늘이 첫 치료였기에 아직 깊은 신뢰가 생기지는 않았다.
한지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가는 환자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비싼 진료비를 내고 또 효과가 없는 게 아닐까 두렵겠지만…… 몇 달 뒤에는 나를 은인으로 여기게 될 겁니다.’
그는 혼자만의 내기를 시작했다.
가벼운 병이건 큰 병이건 치료를 해내는 것, 그리하여 환자의 마음을 얻는 것.
그게 바로 의원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이다.
“수고하셨어요, 원장님. 마무리하겠습니다!”
환자가 나가고, 간호사 이해나가 들어와 인사를 했다.
예약 진료가 전부 끝났으니 2층의 각 방들을 정리하고 퇴근 준비를 하려는 것이다.
“고생했어요.”
한지호는 이해나에게 대답을 해주고 침술실에서 나와 원장실로 이동했다.
퇴근하기 전에 방금 치료한 환자의 차트를 정리해야 한다.
일을 뒤로 미루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우우웅- 우우우웅-
차트 파일을 열고, 여드름 때문에 고생하는 환자의 특이 사항을 입력하려는 찰나 스마트 폰이 울렸다.
사복 자켓 안주머니에 넣어둔 폰의 진동이 꽤 크게 들렸다.
한지호는 컴퓨터 앞에서 일어나 옷걸이로 걸어갔다.
자켓 안에 손을 넣어 폰을 잡은 그는 액정 화면부터 확인했다.
쓸데없는 전화라면 짜증이 치솟을 것 같았다.
“어?”
화면을 확인한 한지호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주저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한지호입니다.”
“원장님! 원장님… 어서 여기로…… 아, 아내가!”
전화기 너머로 황태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대로 말을 하기 힘들만큼 다급한 상황인 것 같았다.
굳이 질문을 더 할 필요가 없었다.
한지호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타이밍이 좋게도 진료가 다 끝난 시점에 황태수의 아내가 발작을 시작한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황태수 부부를 서울로 데려왔던 것이다.
“바로 가겠습니다. 나가지 말고 거기서 기다려주세요!”
한지호는 전화를 끊고 급히 자켓을 걸쳤다.
차트 기록이고 뭐고 지금은 황태수 부부가 묵고 있는 M 호텔로 달려갈 때다.
발작이 일어났을 때의 증상을 눈으로 살펴보고, 억지로라도 진맥을 해야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한지호는 원장실에서 뛰쳐나오며 이해나에게 지시를 내렸다.
“급한 일이 생겨서. 정리 부탁!”
평소처럼 말을 높이지도 않고 단어만 내뱉었다.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단숨에 뛰어넘은 한지호는 집에 불이 난 사람처럼 전력으로 질주했다.
퇴근 준비를 하던 코디네이터들과 직원들, 사무장 박우식도 깜짝 놀랐지만 한지호를 붙잡을 겨를이 없었다.
그는 이미 한의원 건물을 벗어나서 역삼역을 지나치고 있었다.
M 호텔까지는 걸어서 5분 거리다.
성인 남자가 죽어라 달리면 3분 안에 도달하는 게 가능하다.
한지호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오금희 조공(鳥功)을 펼쳤다.
뜨거운 화기(火氣)가 그의 심장을 부지런하게 만들었다.
심장에서 퍼져나간 기운이 두 다리를 지탱했고, 국가대표 육상 선수 부럽지 않은 속도가 터져 나왔다.
거리의 사람들이 비현실적인 능력을 체감할 정도는 아니지만, 깜짝 놀란 표정으로 한지호를 쳐다볼 만큼 폭발적인 스피드였다.
순식간에 M 호텔 앞까지 다다른 한지호는 숨을 몰아쉬며 로비로 들어섰다.
호텔 직원들이 친절하게 안내를 하려했지만 대꾸를 해줄 틈도 없었다.
그는 조기운에게 받아 놓았던 객실 넘버를 떠올리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발작 순간을 놓치면 안 되는데…….’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시간마저도 아깝게 느껴졌다.
띠잉-
한지호는 고급 호텔과 어울리지 않게 총알처럼 몸을 날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양 옆으로 다 갈라지기도 전에 틈을 비집었다.
복도를 가로지른 그는 황태수의 객실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황 선생님, 한지호입니다!”
방음이 완벽하게 되는 특급 호텔이라 안쪽에서 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지호는 노크를 하는 동시에 오금희 녹공을 펼치며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녹공으로 감각을 극대화시키면 수백미터 밖에서 벌어지는 일도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황태수가 벌컥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원장님!”
그의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어제 태백에서 봤을 때만 해도 이 정도로 힘겨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금방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표정이었다.
“사모님은?”
“아, 안에 있습니다. 지금 제가 어찌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한지호는 겁에 질린 것 같은 황태수를 지나쳐 호텔 방 안으로 들어섰다.
특급 호텔의 방이기에 스위트 룸이 아니라도 제법 넓었다.
안온하고 호화스러운 방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한지호는 자기 눈으로 발작 현장을 목격하고 말았다.
황태수의 아내는 예상했던 것처럼 무지막지하게 난동을 피우고 있지는 않았다.
대신 보는 사람을 질리게 만들었다.
“으으…… 으으으으으…….”
그녀는 쉴 새 없이 이상한 소리를 읊조리며 호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단순히 누워서 소리만 내는 게 아니었다.
양 손으로 새하얀 이불을 잡아 뜯고 있었다.
이미 침대 시트와 베개가 보기 흉하게 찢겨져 있었다.
웬만한 악력으로는 시트와 이불을 찢을 수 없다.
가녀린 체구의 그녀가 괴력 아닌 괴력을 발휘하는 게 미스테리했다.
그러나 믿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부우욱-
황태수의 아내가 누운 채로 이불에 상처를 냈다.
이대로 두면 침대 시트와 베개에 이어 이불까지 누더기가 될 것 같았다.
한지호는 잠자코 그녀를 지켜봤다.
눈동자에서 검은자가 거의 사라졌다.
공포영화에 나오는 귀신처럼 흰자가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억지로 힘을 쥐어짜느라 온몸의 핏줄이 뚜렷하게 일어섰다.
그야말로 괴기스러운 광경이다.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며 난동을 피우는 것보다 훨씬 섬�한 모습이었다.
황태수가 어째서 두려움에 질린 표정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주기적으로 이런 꼴을 보고도 아내에 대한 염려와 애정을 잃지 않다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사랑이다.
한지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누워있던 황태수의 아내가 몸을 뒤집었다.
“끄으어어…!”
몸을 뒤집어 웅크린 그녀가 본격적으로 이불을 찢기 시작했다.
그리 빠르지도, 난폭하지도 않은 동작이었지만 음울한 에너지가 넘실거렸다.
부욱- 부우욱-
이불이 찢기는 소리가 고막을 때리며 기분을 한없이 다운시켰다.
누구라도 지금 황태수의 아내를 본다면 비슷한 감정을 공유할 것이다.
귀신이 들린 여자다.
무당과 점쟁이들의 평가는 괜한 말이 아니었다.
처억.
한지호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걸음을 내딛었다.
진짜 귀신이 들린 것이라도 상관없다.
소름 끼치게 발작하고 있는 황태수의 아내에게 다가가 진맥을 해야 한다.
귀신보다 더 무서운 병마(病魔)와 싸워 이기는 게 의원이다.
한지호가 마음을 굳게 먹고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