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01화 (101/255)

# 101

9장, 모두의 사연 (2)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는 분위기였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전쟁을 묘사하지만, 실제로 전쟁터에 떨어지면 다들 패닉에 빠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TV 속에는 가난한 집안의 극단적인 상황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광경을 직접 보면 어둡고 침침한 공기에 압도당하고 만다.

뭐 하나 제대로 갖춘 게 없는 작은 방에 낡은 이불이 깔려 있었고, 작고 마른 중년 여인이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그 여인이 바로 황태수의 부인이다.

피부는 햇빛을 받지 못한 사람처럼 창백했고, 긴 머리카락은 정리가 안 된지 오래다.

젊었을 적에는 꽤 미녀였을 것 같은 이목구비지만 생기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황태수의 아내를 보자마자 귀신이 들렸다는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점쟁이나 무당이 단순히 굿을 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만 그런 말을 한 게 아닌 것 같았다.

입 밖으로 꺼낼 이야기는 아니지만, 누워있는 황태수의 아내는 귀신 들린 게 아니라 귀신처럼 보였다.

방의 조명도 밝지 않아 더욱 우중충한 분위기가 형성 돼 있었다.

“지금은…….”

한지호가 어렵게 운을 띄웠다.

황태수는 사람들이 들어와도 계속 누워있는 아내를 보며 대답했다.

“어젯밤에 발작이 있어서 탈진해 있는 상태입니다. 부끄럽습니다, 원장님.”

“한 번 발작을 하면 얼마나 잠들어 있습니까?”

“짧으면 반나절, 길게는 이틀씩 못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발작을 하지 않을 때는요?”

“기운도 없고, 말도 거의 안 하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있습니다. 자기도 발작을 하면 이상하게 변하는 걸 아니까 만사를 포기해버린 것 같습니다.”

“좋지 않네요.”

한지호는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누워있는 사람의 외관만 보고도 대략적인 몸 상태를 가늠할 수 있다.

한의학에서는 이를 망진(望診)과 문진(聞診)이라 한다.

망진은 눈으로 환자의 외관을 보고 판단을 내리는 것이고, 문진은 목소리와 숨소리를 듣고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지금 한지호는 황태수의 아내를 지켜봤고, 그녀가 잠든 상태에서 내는 숨소리를 들었다.

물론 확실한 판단을 위해서는 직접 환자의 몸을 만지는 절진(切診)이 필요하다.

그녀가 앓고 있는 난치병이 무엇인지 알려면 다양한 방법으로 진맥을 거듭해야 할 것이다.

다만 신체적 건강 상태는 망진과 문진으로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황태수의 아내는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하다고 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평범한 사람이 크게 화를 내도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기 마련이다.

귀신이 들렸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격하게 발작을 하면 기초대사량의 몇 배에 달하는 에너지를 소모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지쳐 쓰러져 죽은 듯이 누워있고, 정신을 차리면 멍하게 시간을 보낸다.

십중팔구 제대로 영양 섭취를 할 리 없다.

에너지를 썼으면 반드시 충전을 해줘야 한다.

그러나 황태수의 아내는 막대한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충전은 쥐꼬리만큼 하는 패턴이다.

영양실조 증세부터 시작해 온몸의 기력이 빠지고, 각종 증상들이 연달아 터지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발작 증세를 알아보고 치료하기 전에 영양부터 챙겨야 할 것 같습니다만.”

“무슨 말씀인지 아는데 안사람이…….”

“네?”

“힘이 나면 발작을 할 때 더 말리기 힘들어지는 것 아니냐면서, 차라리 아무 기운도 없어야 자기를 말리기 쉬울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식사도 자주 거르고 영양제도 기피하고 있습니다.”

황태수의 말을 들으니 한지호도 한숨을 내뱉고 싶어졌다.

종합적으로 여러 문제들이 겹쳐 태산을 만들어 놓은 격이다.

방안의 퀴퀴한 냄새가 한지호의 머리를 더 어지럽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피할 수는 없다.

치료가 가능할지 몰라도 최선을 다해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강원도 태백까지 달려온 것이다.

한지호는 황태수를 쳐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지금 사모님을 깨워도 되겠습니까?”

“네. 제가 깨워보겠습니다. 너무 오래 잠들어 있을 때 죽이라도 먹이려고 억지로 깨우기도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한지호는 조기운과 함께 방 밖으로 나왔다.

누추한 판잣집이지만 걸터앉을 수 있는 마루 공간이 있었다.

음울한 기운으로 가득찬 방보다는 찬바람이 통하는 바깥 마루가 훨씬 나았다.

밖으로 나온 조기운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형님,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최선을 다하신 겁니다. 혹시 너무 마음을 쓰실까 염려 되어서요.”

“처음 보는 유형의 환자이긴 하네. 정신 질환과 관련된 쪽이고, 여러 환경도 안 좋고.”

“네. 큰일 앞두고 계신데 무리하실까봐 걱정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일단 진맥부터 다시 해봐야지. 판단은 그 뒤에 내려도 될 것 같다.”

한지호는 조기운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의술이 뛰어나다고 해서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건 아니다.

규호의 의술을 습득한 한지호는 한의학의 한계를 넘어섰다.

그래도 만병통치(萬病通治)라는 말을 감히 쓸 수는 없다.

특히 정신병과 같은 질병은 해당 분야의 전문의가 아니면 손을 쓰기 힘들다.

그렇기에 조기운은 한지호가 공연히 너무 많은 심력을 쏟아 부을까봐 염려하는 것이다.

세상 누구보다 한지호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충신(忠臣)이자 오른팔다운 말이었다.

드르륵-

그때 방문이 열렸다.

황태수가 아내를 깨우고 마루로 데려 나온 것이다.

“원장님, 여기 제 안사람입니다.”

그는 쭈뼛거리며 뒤이어 나온 아내를 소개했다.

누워있을 때보다 더 수척해보이는 인상의 중년 여인이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멀리서 오셨다고 들었어요. 죄송합니다.”

황태수보다는 어리겠지만 그녀도 최소 40대 후반은 되어 보였다.

나이로 따졌을 때 한지호의 어머니 뻘은 아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저자세인 모습, 게다가 기력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는 모습이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

“황 선생님께서 걱정을 많이 하셔서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맥을 잡아봐도 되겠습니까?”

그녀는 한지호가 서울에서 유명한 한의사라는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한지호와 조기운, 황태수와 그의 아내는 바람이 드나드는 마루에 다 같이 앉았다.

다행히 황태수의 아내는 크게 추위를 타지 않은 것 같았다.

스윽-

그녀가 느린 동작으로 팔을 내밀었다.

한지호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편안한 마음으로 가만히 계세요.”

한손으로는 맥을 잡고, 나머지 한 손은 언제나 그렇듯 목젖으로 가져갔다.

보통 사람은 한의사가 목젖을 만지면 깜짝 놀란다.

자주 겪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태수의 아내는 놀라지도 않고 가만히 목젖을 내어줬다.

목젖을 만지는 방식의 진맥을 경험해 봤을 리 없다.

아마 놀랄 힘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지호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의 맥박과 호흡을 느끼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맥은 약하고, 호흡 역시 마찬가지. 아주 불규칙한 상태……. 정신의 병이 육체를 갉아 먹고 있어. 시한부 환자나 마찬가지라고 봐야겠지.’

진맥을 마친 한지호가 손을 뗐다.

당장 발작과 정신 질환에 대해 판단을 내리긴 힘들었다.

정확하게 증상을 파악하려면 발작하는 현장을 지켜보고, 어렵더라도 발작이 일어나는 동안에 진맥을 다시 해야 한다.

현재 상태로는 전반적인 몸 상태를 체크하는 게 최선이었다.

황태수는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한지호만 쳐다보고 있었다.

정작 당사자인 그의 아내는 감정이 사라진 인형처럼 먼 곳만 바라볼 따름이었다.

“알고 있는 이야기겠지만, 아내분의 몸 상태가 많이 좋지 않습니다. 기력을 보하는 약을 써야겠습니다. 체력이 회복된다고 해서 발작 증세가 더 심해지는 건 아닙니다.”

한지호는 황태수에게 말을 건넸다.

어차피 그의 아내는 무슨 말을 들어도 신경을 쓰지 않을 것 같았다.

황태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얼굴로 경청하고 있었다.

그는 아내를 위해 인생 전부를 던져 버렸다.

이제 마지막 지푸라기인 한지호만 남았다.

황태수는 아내를 치료할 수 있다면 한지호가 죽으라고 해도 당장 죽을 사람으로 보였다.

한지호는 절박한 황태수의 눈빛을 마주보며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말씀드려 이런 질환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려 합니다. 황 선생님, 사모님과 함께 당분간 서울로 와서 지내실 수 있겠습니까? 필요한 비용과 거처는 제가 마련하겠습니다.”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황태수는 얼떨떨한 얼굴로 한지호를 바라봤다.

옆에 앉아있던 조기운도 눈을 크게 떴다.

“워, 원장님. 어째서 이렇게까지…….”

“한의사로서 도전 의식이 생겼다고 할까요.”

“네?”

“진짜 의사라면 치료하기 어려운 질병을 발견했을 때 도전의식이 생기는 게 당연합니다. 게다가 황 선생님 부부의 사연은 이상하게 제 마음을 울렸고.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돕고 싶습니다.”

“저희가 드릴 게 아무 것도 없는데 이런 호의를 받아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막무가내로 우리 병원에 전화하셨을 때처럼 절박한 마음만 유지하고 계시면 됩니다. 치료할 수 있다고 확언을 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포기할 때 포기하더라도 할 수 있는 걸 다 해보겠습니다.”

한지호의 솔직한 말이 끝내 황태수의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다.

모진 고초를 겪으며 오랜 세월 외롭게 싸워온 황태수의 눈가에 투명한 방울이 맺혔다.

남편의 마음을 아는 것일까.

영혼이 떠나간 사람처럼 먼 곳을 보던 그의 아내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황태수의 아내가 입을 열어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한지호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눈을 쳐다봤다.

초점이 풀린 눈, 불안하게 흔들리는 동공.

강렬한 발작의 여파는 평상시에도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 게 분명하다.

한지호는 옆에 앉은 조기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오늘 당장은 힘들 거고, 내일 이 친구가 두 분을 모실 겁니다. 숙소는 제가 준비해 놓겠습니다.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매일 사모님의 상황을 체크하도록 하죠. 혹시 발작이 시작되면 즉시 연락을 주세요. 바로 달려가서 발작 도중에 진맥을 하려고 서울로 모셔오는 겁니다.”

“원장님, 이 은혜는 앞으로 평생 갚겠습니다. 밑바닥에서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저희 부부를 도와주시는 것… 정말 잊지 않겠습니다.”

황태수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한지호는 그를 만류하며 말을 계속했다.

“이러지 마세요. 감사 인사는 사모님을 치료하고 난 뒤에 받겠습니다.”

“아닙니다. 이미 저희 부부에게 다시 희망을 주신 은인이십니다.”

“같이 찾아가보죠. 그 희망이란 녀석을.”

+++

해가 떠나고 달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한지호는 터미널에서 버스 시간을 기다리며 조기운과 나란히 앉아있었다.

조기운은 태백에서 하루를 머물고, 내일 날이 밝으면 황태수 부부를 서울로 데려올 것이다.

그들이 묵을 숙소를 정하는 것 등 자잘한 일도 조기운이 맡았다.

한지호는 월요일 아침 진료 때문에 늦게라도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값비싼 외제차의 경우 주문을 해도 차가 나올 때까지 대기 시간이 꽤 긴 편이다.

아우디 A5를 조기운에게 줬기 때문에 당분간 뚜벅이로 살아가는 한지호는 고속버스를 탈 수밖에 없었다.

“잘 부탁한다, 기운아. 서울 숙소는 가급적 한의원 근처로 잡아두고. 발작이 시작하면 내가 바로 가봐야 하니까.”

“네, 형님. 그런데 한 가지만 여쭤보고 싶습니다.”

“뭐든 물어봐.”

“강원도로 오신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황태수 씨 부부를 서울까지 데려가면서 살펴보려는 건, 정말 단순하게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이신지 궁금합니다.”

한지호는 조기운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세상을 경험하며 성장하고 있는 동생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사실 자신도 왜 이렇게까지 노력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떠오르는 대로 진솔하게 답을 해주고 싶었다.

“요즘 세상에 황태수 씨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아픈 아내를 위해 직장도, 재산도 버릴 사람이. 서울에서 태백의 달동네까지 밀려왔어도 아내를 포기하지 않고 전화를 돌리며 지푸라기를 잡으려는 사람이 말이야. 게다가 오늘 황태수 씨의 눈빛을 봤어?”

“눈빛… 말씀이십니까?”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도 아내를 바라볼 때 조금도 원망하는 눈빛이 아니었어. 오히려 걱정과 염려, 그리고 애정이 가득한 눈빛이었지.”

“그런…….”

“남자가 여자를, 아니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뭘까. 물론 나도 연애를 하고 있지만, 황태수 씨의 눈빛에서 차원이 다른 뭔가를 느꼈어. 그래서 이러는 걸지도 모르겠다. 괜히 지켜주고 싶어서.”

부우우웅-

때마침 서울로 향하는 고속버스가 터미널 정류장에 들어왔다.

한지호는 생각에 잠긴 조기운의 머리를 장난스레 헝클어트리며 일어섰다.

“먼저 간다. 내일 서울에서 보자.”

“조심히 가십시오, 형님.”

창가 쪽 좌석에 앉은 한지호가 손을 흔들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조기운도 어린 아이처럼 손을 흔들었다.

더 높은 곳을 향해 함께 달리던 한지호와 조기운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을 돌아본 날, 둘의 우애는 더욱 깊어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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