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00화 (100/255)

# 100

9장, 모두의 사연 (1)

한지호는 사소한 것도 꼼꼼하게 기억하는 편이다.

타고난 암기력이 없었다면 보육원 출신으로 K대 한의학과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K대 한의학과는 전국의 모든 한의대 중에서 합격 커트라인이 제일 높다.

학과에 따라서는 S대나 지방 의대보다 더 들어가기 힘든 곳이다.

한지호가 과외나 학원 하나 제대로 다니지 못하며 합격한 건 눈물겨운 노력의 결과지만, 동시에 기억력이 워낙 좋은 덕분이기도 하다.

전생을 각성한 후에는 오금희를 익히며 모든 능력이 범인의 한계를 초월해버렸다.

단전에 내공이 쌓이며 육체 능력만 좋아진 게 아니다.

규호의 의술을 습득하고,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며 지력(智力)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런 한지호가 한 번 받은 보고를 까먹을 리 없었다.

부인이 난치병에 걸려 재산을 다 날렸고, 도저히 원화 한의원에 올 형편이 못 된다는 남자의 전화는 한지호의 머릿속에 단단히 각인됐다.

직접 전화를 받은 게 아니지만 계속해서 마음이 쓰였다.

한지호는 사무장 박우식에게 남자의 사연이 진짜인지 알아보라고 지시를 내렸었다.

안내 데스크에 저장된 전화번호가 있기에 상대의 신원과 사연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대한민국은 개인정보 보호가 취약하기로 소문이 난 국가이다.

공공장소의 치안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반대로 정보 보안은 동남아의 개발도상국과 비교 될 정도다.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만 알면 거의 모든 정보를 빼낼 수 있다.

작정하고 나서면 핸드폰 번호 하나로도 사람 한 명을 탈탈 터는 게 가능하다.

한지호의 지시를 받은 박우식은 이틀 만에 결과물을 가지고 왔다.

만약 박우식이 어려움을 겪으면 팀 DK의 오대경에게 일을 맡기려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이름은 황태수. 50대 중반이고, 강원도 태백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진짜 아픈 아내가 있던가요?”

“네. 무슨 병인지는 모르겠지만…… 집안에 누워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아내를 간병하느라 직장도 그만두고 재산을 다 날린 이야기가 동네에서 꽤 유명한 모양입니다.”

“거짓말은 아니고, 진짜 절박한 사연이 있는 건 맞았군요.”

“그런데 원장님, 이렇게 관심을 기울이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박우식이 무감정한 얼굴로 한지호를 쳐다봤다.

평소 한지호는 나이답지 않게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한의원을 운영해왔다.

한 달에 하루씩 의료 봉사를 하는 것도 VIP 전문 한의원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함이라 생각했다.

원화 재단을 만들어 천사원을 후원하는 건 고향집에 대한 애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재단 덕분에 절세 효과까지 누리니 일석이조다.

하지만 이번에 박우식이 조사한 황태수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황태수는 그저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털어 놓은 생면부지의 남일 뿐이다.

딱한 사연이 안타깝지만, 전국에 그만큼의 안 된 사연을 가진 사람은 황태수만 있는 게 아니다.

찾으려고 나서면 수백 명은 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지호가 직접 지시까지 내리며 황태수에 대해 알아보라 한 이유는 무엇일까.

원화 한의원의 운영을 담당하는 박우식은 한지호의 의중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질문을 받은 한지호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을 헤아리기 힘든 표정이었다.

그는 딱딱한 포커페이스 대신 부드러운 웃음으로 속내를 감출 줄 알았다.

노회한 정치인들이나 부릴 수 있는 테크닉이 몸에 체화 된 것이다.

“박 사무장님이 보기에는 내가 마냥 계산적이고, 이득만 쫓는 사람 같은가 봅니다.”

“그건 아니지만… 항상 결과를 보면 이유가 있는 냉정한 판단을 내리신다고 생각해왔습니다.”

“항상 그러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고 싶을 때도 있으니까요. 이제껏 계산적으로만 살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겁니다.”

한지호의 말은 진심이었다.

만약 그가 이것저것 따지면서 머리를 굴렸다면 지금쯤 월급을 받는 페이 닥터가 되는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위험을 피하지 않고, 심장이 뛰면 무모하게 달려들었기에 지금의 한지호가 있다.

천사원을 재건하고 아이들을 후원하는데 적지 않은 돈을 쓰는 것도 계산적인 행동은 아니다.

절세 혜택으로 아끼는 돈보다 쓰는 돈의 규모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황태수의 사연은 한지호의 신경을 긁어 놓았고, 아픈 아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요즘처럼 이혼이 흔해진 시대에 난치병에 걸린 아내 때문에 직장도 재산도 다 날려버린 남자.

그런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원화 한의원에 전화를 걸었고, 젊은 여자 직원에게 하소연을 거듭했다.

그 모든 과정이 함축되어 짤막한 보고로 전해진 것이다.

한지호는 이유 모를 감정의 동요에 몸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강원도 태백.

멀긴 해도 차가 안 막히면 서울에서 서너 시간밖에 안 걸린다.

주말에 바람을 쐴 겸 들러본다고 해서 크게 손해를 볼 것 같진 않았다.

생각을 정리한 한지호가 입을 열었다.

“호구가 되어 이리저리 휘둘리고 싶진 않습니다. 그럴 일이 없을 거라는 건 박 사무장님이 더 잘 알 겁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도움을 주고 싶네요. 가끔씩은 대가 없이 좋은 일도 해야 의원이라 자부할 자격이 생기는 거 아니겠습니까.”

“원장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저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주희 씨 통해서 다시 전화를 걸라고 하세요. 주말에 찾아갈 테니 자택 주소를 알려달라고 하고. 우리가 따로 조사를 한 건 당연히 말할 필요가 없겠죠.”

“알겠습니다. 태백에는 혼자 가실 예정이십니까?”

“아시다시피 내가 타고 다니던 차를 기운이에게 줬잖아요. 내가 주문한 차는 아직 나오지 않았고. 기운이 데리고 가야죠.”

“네.”

박우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큰 손해나 위험을 감수할 일이 아니기에 말릴 명분이 없다.

한지호의 말처럼 가끔 선의를 베푸는 건 좋은 일이다.

거창하게 세상을 바꾸고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정치인들은 대부분 사기꾼이다.

이렇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로 주위에 작은 도움이라도 베푸는 보통 사람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주인공이다.

깔끔하게 결정을 내리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사실 수요일에는 촬영이 있고, 토요일 오전 진료를 하면 온전하게 쉬는 날은 일요일 하루밖에 없다.

그렇게 귀중한 휴일에 아무 상관없는 황태수를 보러 태백까지 가려는 것이다.

다른 의사나 한의사들은 선뜻 이해하기 힘들지 모른다.

하지만 한지호는 대화를 시작하기 전보다 개운해진 기분이었다.

오늘도 수많은 환자들이 긴 기다림 끝에 한지호를 만날 것이다.

코디네이터들이 있는 1층의 상담실도 쉴 틈 없이 돌아갈 게 분명하다.

원화 한의원은 이미 성공 궤도에 올랐고, 한지호는 더 높은 곳을 보면서도 주위까지 살피는 큰 그릇임을 몸소 증명하고 있었다.

한지호는 높이 올라갈수록 낮은 곳을 돌아보라는 옛말을 굳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아서 깨달은 것 같았다.

+++

“거의 다 왔지?”

“네, 형님. 곧 보일 것 같습니다.”

조기운이 땀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봄이 오려면 멀었고, 한국에서 제일 추운 강원도임에도 땀방울이 맺혔다.

체력 좋은 조기운이 땀을 흘릴 정도의 가파른 길을 쉬지 않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황태수는 태백의 달동네에 살고 있었다.

길이 너무 좁고 구불구불해서 자동차를 끌고 들어올 수 없는 동네다.

언덕 아래에 차를 세워둔 조기운과 한지호는 두 다리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저곳입니다!”

그때 조기운이 집 한 채를 가리켰다.

달동네의 빼곡한 판잣집 사이에 위치한 단독 주택이다.

말이 좋아서 단독 주택이지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판잣집이었다.

황태수의 집은 태백 달동네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언덕 밑에 있는 슈퍼라도 다녀오려면 매일 등산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그러나 동네가 불편하다고 해서, 또 집이 안 좋다고 해서 마냥 불쌍하게 여겨선 안 된다.

이런 환경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터전을 일방적으로 가엽게 여기는 건 싸구려 동정이다.

담담하게 있는 그대로의 환경을 받아들이며 똑같이 대하는 게 진짜 어른스러운 대처다.

한지호는 그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학창시절 내내 보육원 출신으로 설움을 많이 받았었기 때문이다.

대놓고 고아라고 무시하는 사람들도 그를 힘들게 했지만, 때로는 과한 친절과 동정으로 마음에 상처를 준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마치 서울의 평범한 주택가를 찾은 듯한 표정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계십니까?”

대문이라 부르기 민망한 곳에서 목소리를 높이자 인기척이 느껴졌다.

덜그럭-

“누구…… 으어억!”

문을 열고 나온 중년 남자가 귀신을 본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한지호의 얼굴을 바로 알아본 것이다.

매주 TV에 나오고, 9시 뉴스에도 자주 등장하는 유명인이니 얼굴을 아는 게 놀랍지 않았다.

황태수는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 듯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힘든 것 같았다.

한지호 옆에 나란히 서있던 조기운이 대신 그를 진정시켰다.

“황태수 선생님, 오늘 찾아오겠다고 전화 드렸던 조기운입니다. 아시겠지만 원화 한의원 한지호 원장님 모시고 왔습니다.”

“이, 이게 대체 뭔 일인지……. 전화는 받았지만 그래도 진짜로 원장님이 여기가지 오실 줄은 모, 몰랐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린 황태수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50대 중반이지만, 반쯤 벗겨진 머리와 남루한 행색 때문에 환갑이 넘어 보인다.

입고 있는 옷도 언제 세탁을 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한지호는 그를 향해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원화 한의원의 한지호입니다. 말씀 전해 듣고 찾아왔습니다.”

“아이고, 아이고. 이거 정말 제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될 거 같습니다.”

황태수는 말뿐이 아니라 진짜 몸을 굽히려했다.

한지호와 조기운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문을 열고 들어가 그를 말렸다.

“인사를 받으려고 온 게 아닙니다. 그보다 사모님은 어디 계세요?”

“지금 방안에 있긴 한데…… 상태가 좀 안 좋습니다.”

황태수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아내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세상을 다 산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진심으로 아내를 걱정하는 게 분명했다.

50이 넘은 남자가, 아내의 병수발로 직장과 재산까지 다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걱정을 그치지 못하고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초라하고 가진 거 없어 보이는 황태수지만 아내를 향한 마음만큼은 특별한 것 같았다.

“황태수 선생님. 지호 형님께서, 아니 원장님께서 아내 분을 봐주시려고 여기까지 오셨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조금 놓으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먼 곳까지 와주셨으니 목숨이라도 내어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의사들이 못 고치는 병을 척척 고치시는 명의라고 들어서 제가 염치불구하고 전화로 직원분들께 떼를 썼습니다. 그런데 저희 아내는…….”

황태수가 쉽게 말을 끝맺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한지호는 그의 아내가 난치병에 걸렸고,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치료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정확한 병명이나 증상은 아직 모른다.

유수의 병원에서 해결이 안 된 난치병이라면 병명 자체를 찾지 못했을 가능성도 높다.

곧이어 머뭇거리던 황태수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희 아내는 한 번 발작을 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나머지 시간에는 기운을 잃고 누워만 있습니다.”

“음…….”

“최고로 좋다는 병원에서도 해결책을 못 찾았고, 정신병동에 몇 달씩 입원도 시켜봤지만 상태가 더 악화되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갑니다……. 그러면서 직장을 그만두고, 재산도 날리고, 서울에서 벗어나 여기 태백 탄광촌의 달동네까지 밀려오게 됐습니다.”

느린 어조로 지난 시간을 설명하는 황태수의 목소리에서 울음기가 느껴졌다.

울먹거리지는 않지만 음성 깊이 서려있는 슬픔이 전해지는 것이다.

“오죽 답답했으면 용하다는 무당과 점쟁이들도 찾아가서 별 짓을 다했습니다. 귀신이 들렸다면서 굿을 해야 한다는데 효과는 없고, 돈은 많이 들고…. 그냥 다 놓아버릴까 하다가 마지막으로 원화 한의원에 연락을 드려 본 것입니다. 용감하게 가짜 백수오 업체와 맞서 싸우는 분이라면 혹시 도와주시지 않을까 해서 염치없는 짓을 했습니다.”

말을 마친 황태수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 한숨에 담겨 있는 한(恨)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마음이 무겁기는 한지호와 조기운도 마찬가지였다.

선의를 가지고 태백까지 온 한지호는 마음이 아파지는 것과 동시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황태수의 아내가 보이는 증상은 뭐라고 정의 내리기가 어렵다.

점쟁이들이 귀신에 들렸다고 말했다는 게 이해가 될 지경이었다.

이제는 하다하다 귀신 들린 것 같은 환자까지 봐야 하는 것인가.

정신과 전문의들도 손을 놓은 황태수의 아내를 감당할 수 있을까.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한지호는 피하지 않았다.

설령 진짜 귀신이 들렸다면 또 어떤가.

진짜 의원은 환자를 두고 등을 돌리는 법이 없다.

태백의 달동네.

한지호는 한의사로서 전기(轉機)를 맞이하는 계기가 될 환자를 만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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