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8장, 도박이란 (2)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좋은 일이 생기면 그만큼 안 좋은 일도 연달아 생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지호는 미리 액땜을 했기 때문인지 좋은 소식만 연달아 듣고 있었다.
허충욱이 목화 현상으로 쓰러진 게 워낙 큰일이었다.
그 고비를 넘긴 후에는 준비하던 일들이 술술 풀렸다.
우선 인천시와 정부의 공개 입찰 심사에서 영종도 내국인 카지노의 사업자로 블랙문 코퍼레이션이 선정 됐다.
이미 결과가 정해진 상태에서 심사를 한 것이기에 짜고 치는 고스톱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허충욱이 심사위원에서 빠졌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한지호는 자기손으로 만들어낸 심사 결과에 쾌재를 불렀다.
그뿐만 아니라 마창우와 백성필도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했다.
당연한 일이다.
카지노 사업에 걸린 이권이 얼마인가.
마창우는 순식간에 한국 암흑가 최고의 부자로 우뚝 설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인천시 경제부시장 백성필은 대놓고 카지노에 투자하거나 돈을 받을 수는 없다.
대신 다음 선거에서 확실한 후원자를 챙겨 놓은 셈이다.
그는 부시장을 넘어 인천시장을 노리고 있다.
지금의 시장은 이번 임기를 끝으로 정계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었다.
인천시장, 나아가 경기도지사라는 큰 꿈을 꾸는 백성필에게 블랙문 코퍼레이션은 든든한 정치자금줄이 되어줄 것이다.
정치인에게 있어 확실한 후원 세력을 만드는 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돈이 없으면 선거를 치를 수 없고, 얼마나 많은 자금을 확보했느냐에 따라 선거 판도가 바뀌기 때문이다.
영종도 내국인 카지노 사업권을 확보한 마창우의 블랙문 코퍼레이션은 음지와 양지를 아우르며 백성필의 천군만마가 될 예정이었다.
한지호도 틈이 날 때마다 행복한 상상을 했다.
백성필은 50억 원의 투자금이 1년 안에 100억 원 이상으로 불어날 거라고 단언했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1년 뒤에 지분 가치가 딱 100억 원만 되어도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동안의 은행 이자는 병원 운영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1년 뒤에 지분을 판매한다고 치면 원금을 은행에 갚고 나도 50억 원 이상이 남는다.
10억 원의 초기 자금으로 원화 한의원을 열었으니 다른 지역에 한의원 다섯 곳을 열 수 있는 돈이다.
원화 한의원은 임대료 비싸기로 유명한 강남 역삼역에 자리 잡고 있다.
임대료 등을 따지면 50억 원으로 비슷한 규모의 한의원을 10개 차리는 것도 가능하다.
전국을 장악한 위천 한방병원처럼 프랜차이즈 한의원으로 발돋움을 할 수도 있다.
한지호는 100억이 넘는 목돈이 들어오면 어떻게 활용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지금부터 미리 계획을 정해둘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사람인 이상 1년 후를 그리며 즐거운 고민을 하기 마련이다.
로또만 사도 당첨금으로 무엇을 할지 생각하게 된다.
당첨 될 확률이 거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그에 비해 한지호는 당첨 확률이 확실한 로또를 손에 넣은 셈이었다.
당연히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청사진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한의학의 본토인 중국으로 진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는 규호가 누비고 다녔던 대륙을 떠올렸다.
한의학으로 중국을 평정하면 천하통일을 이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섣불리 도전할 일은 절대 아니다.
그래도 가슴 한 구석에 중국이란 글자가 박혔다.
규호와 자신의 의술을 결합하여 중국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면 그야말로 동양의학 세계의 정점에 서는 격이다.
굳이 동양의학만 따지지 않아도 중국은 떠오르는 태양이다.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태풍의 핵이고, 어마어마한 내수 시장을 보유하고 있다.
삼국지 속 전설로만 여겨지는 화타의 자(字)를 딴 원화(元化) 한의원이 베이징과 상하이에 깃발을 꽂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한지호를 흥분시키는 좋은 소식은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카지노 사업이 확정된 것 외에도 소소한 기쁨들이 그의 일상을 빛나게 만들어줬다.
최고의 여자 솔로 가수인 이지은과의 관계에서는 여전히 깨가 쏟아졌고, 천사원 아이들도 안정된 환경에서 무럭무럭 성장하는 중이었다.
특히 유초아는 D대학교의 연극영화과에 합격했다.
한지호로서도 무척 놀라운 일이었다.
서울 장충동 인근에 위치한 D대학은 종합대학으로서 순위는 그렇게 높지 않다.
인서울 4년제 중에서 중위권 정도로 분류된다.
하지만 연극영화과는 왕년의 1인자인 C대학을 제치고 전국 최고의 자리를 굳혔다.
유명한 연예인과 배우들을 수도 없이 배출했고, 서울 중심이라는 학교 위치 덕분에 매년 입학 경쟁률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어떤 측면에서는 공부해서 S대에 들어가는 것보다 D대 연극영화과에 합격하는 게 더 힘들지 모른다.
그런데 연기를 정식으로 배운지 몇 달밖에 안 된 유초아가 D대학에 붙었으니 놀라운 일이었다.
점점 물이 오르는 유초아의 특별한 미모, 그리고 그녀의 내면에 감춰진 가능성이 면접관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한지호는 등록금 같은 건 걱정하지 말라고 미리 일러두었다.
마리아 수녀와 다른 아이들까지 자기 일처럼 유초아의 대학 합격을 축하해줬다.
부모 없는 아이들이 모인 천사원에서 한지호에 이어 두 번째 대학생이 나온 것이다.
그 자체로 다른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사건이었다.
서른살.
예전에는 막연히 두려워했던 30대의 시작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허충욱이 갑자기 쓰러지면서 아주 제대로 액땜이 된 모양이다.
어쩌면 용기 있게 가짜 백수오의 진실을 고발해서 하늘이 상을 내려주는 것일까.
어찌 됐건 한지호는 30대의 문을 멋지게 열었다.
K대 한의학과에 합격하고도 등록금 걱정에 밤을 지새워야했던 20대의 시작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만족하기엔 이르다.
10년 뒤에 또 다른 차원에서 40대를 맞이하기 위해 누구보다 뜨거운 30대를 보낼 것이다.
중국으로 진출하는 상상도 괜히 하는 게 아니다.
한지호는 즐거운 소식들을 곱씹으며 미래를 정조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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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님.”
진료실 데스크와 연결 된 인터폰으로 조민주가 말을 걸어왔다.
한지호는 꽉 찬 진료 예약 때문에 겨우 10분 남짓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웬만해선 이 시간에 조민주가 말을 걸지 않는다.
수간호사 출신의 그녀는 기가 막히게 한지호의 기분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폰을 사용한 건 중요한 용건이 있다는 뜻이다.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던 한지호가 인터폰 버튼을 누르며 대답했다.
“벌써 다음 환자 볼 시간이 됐나요?”
“그게 아니라 안내 데스크에서 올라온 소식을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데스크에서?”
“네, 원장님. 주희 씨가 이상한 연락을 받았는데 그래도 알려드려야 할 것 같다고 하네요.”
“말해보세요.”
“부인이 난치병을 앓는다는 전화가 왔다고 해요. 그동안 재산을 다 털어 병원을 다녔지만 낫지 않았다면서, 원장님이 마지막 희망이라고 꼭 뵙고 싶다고 계속 사정을 했다고 해서요.”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은 의료 봉사하는 날에 내원하라고 안내하지 않습니까?”
한지호의 말대로 원화 한의원은 한 달에 하루를 정해 의료 봉사를 한다.
지역의 노인과 소외 계층을 대상으로 진료를 봐주고 선물도 주는 날이다.
그날에는 되도록이면 찾아온 환자들을 전부 진료하려 노력한다.
굳이 의료 봉사를 하는 날을 기다려서 원화 한의원에 오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사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화를 해서 하소연을 했다는 사람도 날을 맞춰서 부인을 데려오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조민주가 살짝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도저히 아픈 부인을 데리고 내원할 수 있는 사정이 아니래요. 주희 씨가 알아듣게 타이르려 해도 계속 전화를 해서 울먹인다고 하네요. 목소리로 듣기엔 나이가 꽤 있는 사람 같다던데. 어떻게 할까요? 안타깝지만 원칙대로 응대 하라고 데스크에 말을 해야겠죠?”
한지호는 바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사실 사무장 박우식에게 말하면 간단히 처리 될 문제였다.
하소연을 늘어놓은 번호를 수신 차단하면 끝난다.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어도 받는 족족 차단을 하면 제풀에 꺾일 것이다.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여지도 거의 없다.
원화 한의원의 의료 봉사 정책은 여러 언론에서 칭찬을 받았다.
극성스러운 한국 네티즌들도 의료 봉사를 미담(美談)으로 여긴다.
VIP 전문 시스템에 반감을 가진 사람도 많았지만, 한지호가 가짜 백수오 사건으로 영웅이 되면서 여론이 확 바뀌었다.
거기에 더해 의료 봉사까지 앞장서니 여론이 호의적일 수밖에 없다.
안타까운 사연을 일일이 다 들어주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한지호는 당연히 원칙대로 처리하라고 지시를 내리는 게 맞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웬일인지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인이 난치병을 앓아서 치료하느라 재산을 다 날렸다고 한 거죠?”
“네. 주희 씨 말에 의하면 그런 거 같아요, 원장님.”
“흐음……. 그 분 번호는 안내 데스크에 저장 되어 있습니까?”
“시스템 상 저장이 되어 있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일단 보류해두고, 나중에 사무장님과 다시 이야기 할게요. 상황은 파악했습니다.”
“그럼 따로 데스크에 원장님 지시를 내리지 말까요?”
“내가 잘 들었다고, 조금 더 생각해 본다고만 말해줘요.”
“알겠습니다, 원장님.”
의외의 반응이었지만 조민주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한지호가 무슨 결정을 내려도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곁에서 보좌할 따름이었다.
확실히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수간호사 출신이기에 자기 역할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다음 환자 보내줘요.”
“네.”
뜻밖의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정해둔 휴식 시간이 다 지나갔다.
꿀 같은 휴식 시간을 소모한 게 아쉬웠지만 별 수 없다.
진료를 받는 사람들은 예약과 상담을 거치며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한지호에게 진료를 받기 위해 원화 한의원이 까다로운 절차를 따라준 환자들이다.
값비싼 진료비와 약값을 내서 VIP이기도 하지만, 환자들이 보인 성의와 노력만 따져 봐도 VIP로 대우해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진료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방송 출연이나 사업 투자 등 모든 일은 가지치기다.
원화 한의원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는 건 뿌리에 해당되는 일이다.
뿌리가 흔들리면 가지가 많고 무성해봐야 소용이 없다.
결국 나무가 거목(巨木)이 되기 위해서는 뿌리가 굳게 중심을 잡아야 한다.
똑똑-
“원장님. 김재현 환자님 들어가셔요.”
조민주가 노크를 하고 진료실 문을 열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등산복 차림의 중년 남자가 보였다.
길거리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스타일의 중년 아저씨다.
그런 아저씨가 한지호를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한 원장님. 3주를 기다렸는데 이렇게 뵐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예약부터 코디네이터 상담을 거쳐 진료까지 무려 3주가 걸린 환자다.
짜증을 낼 법한데 한지호를 만났다는 것 자체에 너무 기뻐하고 있다.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도 아니고, 등산복을 입고 다니는 중년 아저씨가 아이돌을 만난 소녀팬처럼 행동했다.
그만큼 한지호가 유명해진 것이고, 그에게 거는 환자들의 기대가 크다는 말이다.
한지호는 고개를 저으며 앉을 것을 권했다.
“아닙니다. 많이 기다려주셨는데 제가 감사하죠. 어디가 안 좋아서 오셨습니까?”
초진이라고 해도 환자의 증상은 상담 리스트에 상세하게 적혀 있다.
그러나 한지호는 환자가 직접 자신의 상태를 설명할 수 있도록 질문을 던졌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의사 앞에서 자기 입으로 증상을 말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의사가 더 꼼꼼하게 진료를 해줄 거라 믿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김재현 역시 더욱 환하게 웃으며 안 좋은 곳 여기저기를 늘어놓았다.
아픈 곳을 말하는 환자의 표정이 이렇게 밝은 것도 참 아이러니한 광경이다.
아마 원화 한의원이 아니면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일 것이다.
한지호는 김재현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과장이 섞인 말이라도, 상담 리스트에 다 기록된 내용이라도 환자의 입에서 언제 중요한 단서가 나올지 모른다.
무엇보다 좋은 의원은 병만 고치는 게 아니라 마음까지 어루만지는 법이다.
한지호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대화로 원화 한의원을 찾은 환자들의 마음을 만지고 있었다.
철저하게 돈과 성공, 야망을 쫓는 한의사이면서 동시에 의술이 곧 인술(仁術)임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았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참으로 신기한 노릇이다.
이렇게 그는 영역을 넓히고 경지를 높이며 부지런히 스스로를 담금질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