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8장, 도박이란 (1)
“커허억!”
침을 꽂은 채 추궁과혈을 받던 허충욱이 기침을 했다.
단순히 마른 기침을 뱉어낸 게 아니었다.
주먹만한 크기의 핏덩어리를 토해낸 것이다.
한지호는 양손을 등에 붙인 채 계속해서 기운을 주입하며 상황을 주시했다.
허충욱이 토해낸 핏덩이가 환자복과 병상의 새하얀 이불을 적셨다.
붉은색보다 검은색에 훨씬 가까운 핏덩이는 마치 종양 덩어리처럼 보였다.
그만큼 질기게 뭉쳐 있었다.
핏덩이의 정체는 명확했다.
허충욱의 몸 안 곳곳에 흩어져 있던 어혈(瘀血)이 덩어리가 되어 나온 것이다.
죽은 피가 혈도를 꽉 막고 기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었다.
피를 토해낸 허충욱은 놀란 것 같았지만, 한지호는 추궁과혈이 제대로 진행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하나하나 위험하기 짝이 없는 혈도에 깊이 꽂힌 침, 그리고 전력을 다해 쏟아붓고 있는 오금희의 기운.
한 치의 실수가 한지호와 허충욱의 운명을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 있다.
주화입마(走火入魔)라는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둔 한지호는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불태웠다.
단전에서 치솟은 다섯 가지 기운이 밖으로 흐르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허충욱의 꽉 막힌 혈도를 뚫어내려 애썼다.
쏴아아아아-
이윽고 특실 안을 휘몰아치던 모든 소리가 잠잠하게 잦아들었다.
허충욱의 몸에서 나던 뭔가가 끊어지는 소리 역시 더 이상 나지 않았다.
한움큼의 피를 토해낸 그는 말없이 가만히 앉아있었다.
한지호는 허충욱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추궁과혈을 하느라 등에 붙여놓았던 두 손을 뗀 한지호가 이마를 닦았다.
적어도 한지호는 부작용에 휘말리지 않았다.
기력을 쏟아내 탈진 할 것 같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과연 허충욱은 어떠할까.
한지호의 바람대로 위험을 무릅쓴 보람이 있을 것인가, 아니면 몸 안이 뒤엉켜 상황이 더 악화 됐을 것인가.
무엇 하나 장담하거나 확신하기 힘들었다.
한지호는 떨리는 마음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위원장님. 괜찮으십니까?”
털썩-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허충욱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대로 기절하듯 쓰러진 것이다.
한지호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위험한 치료가 실패한 게 아닐까.
무모한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고, 허충욱이 예전처럼 병상에서 꼼짝달싹 못하는 마른 나무로 변한 게 아닐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기껏 걸을 수 있게 만들어 놓았어도 치료 실패의 책임은 한지호 혼자 뒤집어쓰게 될 것이다.
더불어 영종도 내국인 카지노 사업이라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 역시 다른 둥지로 날아가 버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불과 1초에서 2초 사이에 온갖 상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앞으로 넘어졌던 허충욱이 몸을 부르르 떨며 자기 팔로 병상을 짚고 일어났다.
기절한 게 아니라 과열된 치료 때문에 지쳐서 잠시 쓰러졌던 것이다.
한지호는 급히 정신을 수습하고 허충욱의 정수리와 목 뒤, 척추 부위에 꽂힌 침을 일일이 뽑았다.
조심스럽지만 신속하게 침을 뽑자 몸을 일으킨 허충욱이 천천히 움직였다.
스으윽-
동작 하나하나가 매우 느렸지만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힘없이 고꾸라졌던 허충욱이 스스로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한지호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곧이어 한지호와 허충욱은 서로 마주보고 앉게 됐다.
병상 위에 젊은 남자와 늙은 남자가 불편한 자세로 마주 앉아있는 기묘한 광경이었다.
손에 침을 쥐고 있는 한지호는 허충욱의 얼굴부터 살폈다.
“……!”
놀랍게도 쉴 새 없이 경련을 일으키던 입술이 멀쩡해졌다.
살짝 살짝 꿈틀거리긴 하지만 예전처럼 정신 사나울 정도로 입술 떨림이 심하진 않았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때 귀를 의심케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 물 좀 주게.”
허충욱이 입을 열어 말을 했다.
지난 일주일 내내 어버버 거리는 게 고작이던 허충욱이 말을 한 것이다.
발음이 정확하진 않지만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한지호는 아랫배에서부터 설명하기 힘든 환희가 치솟는 걸 느꼈다.
육체적 쾌락과는 다른 차원의 쾌감이 온몸의 세포를 타고 짜릿한 느낌을 선사했다.
“치료가 성공했습니다, 위원장님!”
“무… 물을…….”
“알겠습니다!”
후다닥 병상에서 내려온 한지호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왔다.
한 컵 가득 물을 따라 허충욱에게 건넸다.
허충욱은 단번에 물을 다 마셨다.
그가 빈 컵을 한지호에게 돌려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말이, 말이 나오고 있네. 몸 안에서 폭탄이 터진 것 같더니 말이 나와…….”
“입술 떨림과 안면 경련도 거의 멎었습니다.”
“대, 대체 무슨 치료를 어떻게 한 겐가?”
“기가 흐르는 중심 혈도를 강하게 자극한 상태에서 강제적으로 제 기운을 주입했습니다. 무척 위험한 시도였지만 덕분에 꽉 막혀있던 위원장님의 혈도가 뚫리고, 목 위까지 정상적인 기의 흐름이 통하게 된 것이죠.”
“그럼 이제 다 나은 건가?”
“전에도 설명 드렸지만, 목화 현상은 평생 안고 가야 합니다. 급격한 증상 악화를 막았을 뿐, 어느 정도의 불편함은 감수하시면서 꾸준히 치료를 받으시는 게 좋습니다.”
“알겠네, 그래도 한 선생이 아니었다면……. 내 오늘부로 한 선생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겠네.”
허충욱은 완치가 아니라는 말에 살짝 실망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한지호가 없었다면 그는 아직까지 병상에서 자기 힘으로 일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걷는 것도 힘들어하던 상태에서 일주일 만에 이만큼이나 회복된 게 기적이다.
생소한 목화 현상 말고, 비교적 익숙한 파킨슨병이라고 생각해보면 한지호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쉽게 체감할 수 있다.
허충욱 역시 자신이 기적의 체험자임을 모르지 않았다.
대학 병원의 날고 기는 교수들이 손도 못 썼다는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남은 인생 내내 다리를 약간 절고, 항상 목화 현상이 심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살아야겠지만 지난 일주일과 비교하면 지옥에서 천국으로 승천한 격이다.
한지호도 잠깐이나마 지옥의 맛을 보다가 천국으로 올라온 기분이었다.
추궁과혈이 끝나고 허충욱이 앞으로 고꾸라졌을 땐 정말 지옥불에 떨어진 것 같았다.
대신 허충욱의 입에서 온전한 말이 나오던 순간의 짜릿한 기쁨은 피부에 각인 됐다.
황만금의 태자병과 김해수의 구음절맥을 치료했을 때처럼 잊지 못할 극적인 순간이었다.
한지호는 컵 대신 물병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찬물을 마셨다.
물병을 다 비워버린 그는 기진맥진한 가운데 피어나는 묘한 힘을 느꼈다.
침을 놓고 추궁과혈을 하느라 체력과 내공이 바닥까지 소진됐지만, 의원으로서 또 한 사람을 치료했다는 뿌듯함이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한지호는 30대의 첫 고비를 의술로 넘겼다.
그는 전생의 규호가 얻었던 의성(醫聖)이라는 호칭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것 같았다.
+++
“수고가 많았소, 한 원장. 어서 들어와 잔을 받아야지!”
인천시청의 실세인 경제부시장 백성필이 한지호를 반겼다.
처음 만났을 때 간을 보며 시험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지호가 쓰러진 허충욱을 치료했기 때문이다.
외부와 차단된 호화스러운 방 안에는 마창우도 함께 있었다.
마창우 역시 백성필처럼 한지호를 반갑게 맞이했다.
“손가락 통증을 낫게 해주셨을 때부터 알았지만 한 원장님은 과연 대단한 분입니다.”
“이번엔 좀 위험했습니다.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지만.”
한지호는 솔직한 감상을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가 앉자마자 백성필이 직접 술잔을 건네주며 샴페인을 따랐다.
“일잔 한 잔 받고 이야기 하는 게 좋겠소. 한 원장은 내 잔을 받을 자격이 있소.”
“감사합니다.”
부글부글 샴페인 거품이 투명한 글래스를 가득 채웠다.
백성필과 마창우의 잔에는 이미 같은 종류의 샴페인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한 원장의 기적 같은 의술을 위하여!”
“위하여!”
백성필이 한지호를 칭찬하는 건배사를 외쳤다.
한지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잔을 부딪쳤다.
목으로 넘어가는 샴페인이 오늘따라 더 달콤한 것 같았다.
샴페인을 마치 소주처럼 원샷한 백성필은 한지호와 마창우를 돌아보며 상황을 설명해줬다.
“시장님과 의원님께서 허충욱 위원장님의 병실을 찾았고, 예정대로 공개 입찰 심사에 참여하는데 무리가 없겠다는 결론을 내리셨소. 일정과 인원 변화 없이 원안대로 심사가 진행 될 것이오.”
“더 이상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마터면 예측 못 할 변수가 생길 뻔 했지만 한 원장 덕분에 모두 해결됐소.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영종도가 우리의 보물섬이 되어주지 않겠소!”
백성필은 평소보다 들뜬 표정이었다.
딱히 문제될 건 없었다.
그의 말처럼 한지호가 허충욱을 치료하면서 변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장애물이 나타난 팔부능선을 한지호 혼자 힘으로 넘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요즘 말로는 한지호가 게임을 캐리(carry)를 한 것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샴페인을 마신 한지호는 마창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투자금은 언제든 준비 돼 있습니다.”
“한 원장님의 50억이 들어올 자리는 1순위로 비워뒀습니다.”
“넉넉잡아 1년이면 회수가 되겠지요?”
한지호의 물음에 백성필이 웃음을 터트렸다.
마창우 대신 그가 대답을 해줬다.
“으허허, 우리 한 원장이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구만. 50억 투자금이 1년 안에 회수가 될 거냐고 물었소?”
“그렇습니다.”
“1년이 아니라 세 달, 한 계절이면 50억이 회수되고도 남을 것이오. 내 장담하리다.”
“내국인 카지노의 수익이 그 정도입니까? 투자자가 저 혼자인 것도 아닌데.”
“정선의 카지노가 하루에 얼마를 쓸어 담는지 계산하면, 그보다 훨씬 더 좋은 입지의 영종도의 수익률도 대충 예측이 가능하지 않소. 괜히 황금의 섬, 황금 알을 낳는 거위라는 표현을 쓸 리가 없지. 한 원장의 50억은 1년 안에 100억이 넘는 돈이 될 거요.”
100억.
말은 쉽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평생 만져보기 힘든 돈이다.
아니, 평생 꿈을 꾸기도 힘든 액수가 바로 100억이다.
백성필은 50억이 금방 100억이 될 거라 말했지만, 실은 그보다 더 큰 규모의 대박을 확신하는 것 같았다.
마창우도 마찬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최소 정선 카지노만큼의 수익만 나와도 영종도 내국인 카지노의 지분 가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파르게 상승할 것이다.
한지호는 새삼 자신이 거물들의 세계에 들어왔음을 체감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50억이나 100억은 목표가 아니다. 그저 밤하늘의 별처럼 닿을 수 없는 꿈일 뿐이다.
그러나 한지호는 50억 원이라는 자금을 마련해 투자할 수 있는 사람이 됐다.
게다가 그 수익으로 100억 이상을 바라는 게 현실적인 목표였다.
이미 방송 출연과 청우단 판매, 원화 한의원 운영으로만 한 달에 억이 넘는 돈을 벌고 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점은 어디였을까.
이상한 힘과 반복되는 꿈에 몸을 맡기고 자기 몸에 13 개의 침을 꽂은 게 시작이었다.
십삼대혈범(十三大穴法)을 시전한 건 그야말로 무모한 도박이었다.
하지만 그 도박에 몸을 던졌기에 전생을 각성했고, 이제는 더 큰 도박을 일삼으며 천하제일의(天下第一醫)가 되기 위해 달릴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은 도박이다.
누구나 아는 말이지만, 모험을 해야 할 때 도박을 하듯 도전을 선택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잃을 게 두려워 도박판에 앉지 못하는 사람에게 반전은 일어나지 않는다.
한지호는 인생이란 도박의 자리에 앉았고, 그의 게임은 절정을 향해 진행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