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6장, 팔부능선 (2)
한지호의 말에 마창우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의식 없이 병상에 누워있는 허충욱과 한지호를 번갈아 쳐다보며 질문을 계속했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사람이 나무로 변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한의학의 질병 분류와 현대 의학의 병명이 정확히 일치하지만은 않습니다. 목화 현상은 굳이 따지자면 파킨슨병과 증세가 비슷합니다. 말 그대로 사람이 나무처럼 변해 뻣뻣하게 굳어가는 현상을 뜻하는 것입니다.”
“파킨슨병과 비슷한 증상이라……. 그렇다면 답이 없다는 소리로 들립니다.”
마창우가 인상을 썼다.
목화 현상이 파킨슨병과 비슷한 것이라면 허충욱이 일어날 가능성은 극히 낮기 때문이다.
파킨슨병은 뇌의 흑질(substantia nigra)에 분포하는 도파민의 신경세포가 점차 소실되어 발생하는 질병이다.
주요 특징은 떨림, 경직, 운동성 둔화 및 자세 불안정성이고, 종내에는 알츠하이머와 비슷한 증세까지 유발하는 신경계의 만성 퇴행 질환이다.
특별한 원인을 찾아내기도 힘들고, 조기에 발견해도 완치가 어렵다.
목화 현상이 정확이 무엇인지 몰라도 파킨슨병과 비교할 정도면 심각한 질병인 게 분명하다.
마창우는 어두운 안색으로 천천히 입술을 뗐다.
“이대로 허 위원장님을 포기해야 하는 겁니까, 한 원장님?”
“제가 언제…….”
한지호가 입을 열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마창우의 눈을 마주보며 나머지 말을 완성시켰다.
“포기해야 한다고 했습니까?”
순간 마창우는 닭살이 돋는 걸 느꼈다.
연장을 들고 대기하고 있던 수십 명의 조폭들 앞에서도 의연한 사람이 마창우다.
그러나 한지호의 물음은 그에게 전율을 선사했다.
무기 하나 들고 있지 않은 젊은 한의사가 주먹 세계의 전설을 놀라게 만든 것이다.
“말씀드린 것처럼 치료가 쉽지 않을 겁니다. 완치는 더더욱. 하지만 의식을 회복하게 만들고, 사리분별이 가능한 정도로 상황을 개선시키는 건 가능합니다.”
“위원장님이 그 정도까지만 회복 돼도 공개 입찰 심사에 참여할 수 있을 겁니다.”
“주어진 시간이 길지는 않겠군요. 게다가 제가 치료를 주도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한지호의 말처럼 시간이 촉박하다.
적어도 일주일 안에는 허충욱이 병상에서 일어나 일상 생활을 소화해야 한다.
그래야만 공개 입찰 심사에 배제되지 않고, 원래대로 참석할 수 있을 것이다.
파킨슨병과 비슷한 증세로 의식을 잃은 환자를 일주일 안에 회복시키는 것.
완치는 아니더라도 그만한 증세 호전을 이끌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목화 현상이 파킨슨병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파킨슨병의 경우 급작스럽게 쓰러져 의식을 잃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두 가지 경우 모두 쉽게 호전되지 않는 질병이라는 점은 똑같다.
“어차피 여기 의사들이 뾰족한 수를 찾아내지 못하면 한 원장님밖에 대안이 없습니다. 책임지고 치료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습니다.”
“네, 제가 한의원 진료를 끝내고 매일 와서 위원장님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주일. 일주일입니다. 그 기한을 넘기면 일이 어려워집니다.”
“알겠습니다. 전력을 다할 겁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한지호는 반드시 일주일 안에 허충욱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회복시키겠다고 다짐했다.
일주일을 넘기면, 회복 경과가 더디면 품안에 들어왔던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다른 둥지로 날아갈지 모른다.
“상세를 파악하고 진맥을 마쳤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죠.”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달려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 일이기도 한데 당연히.”
한지호는 마창우의 인사를 받으며 고개를 저었다.
영종도 내국인 카지노 사업은 더 이상 마창우만의 일이 아니다.
투자자로 참여하기로 확정 된 한지호에게도 무척 중요한 사업이다.
사업의 성사 여부에 따라 재정적으로 몇 계단을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새해를 맞이하는 파티를 뒤로하고 인천으로 달려올 이유가 충분했다.
그는 미약한 숨소리만 내고 있는 허충욱을 한 번 더 쳐다보고 몸을 돌렸다.
아마 오늘은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
해가 뜨면 본격적으로 새해의 첫날, 1월 1일이 시작된다.
다행히 휴일이라 하루 종일 집에 틀어박혀 목화 현상에 대해 연구해도 될 것이다.
‘거의 다 왔어.’
영종도 내국인 카지노 사업의 성공이 목전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라 생각했는데 예기치 못한 곳에서 암초가 터졌다.
그러나 한지호는 자기 손으로 허충욱을 일으키고 팔부능선을 넘어 목적지에 도달하리라 마음먹었다.
공교롭게도 한의사로서의 능력이 카지노 사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 셈이다.
이런 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일까.
한지호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의술이다.
결국 의술을 바탕으로 천하를 얻는 것이 그가 가야 할 길이다.
서른이 된 첫 날, 한지호는 인천에서 다시금 자신의 운명을 깨달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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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우리 요즘 너무 못 보는 거 같아.”
“그러게. 연말연시라 나도 계속 정신이 없네.”
“나 일주일 뒤에 한국 들어가는데…….”
“이번엔 얼마나 있어?”
“삼일? 이틀은 방송 촬영이고 하루 남으니까 그때 꼭 같이있자.”
“그래. 체크해두고 스케줄 다 빼 놓을게.”
“꼭이야, 꼭!”
전화기 너머 이지은이 애교를 떨었다.
한지호는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와 통화를 마쳤다.
지금 이지은은 일본을 거쳐 중국과 동남아 투어를 하는 중이다.
그녀의 소속사 가수, 배우들과 함께 월드 투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다.
만약 이지은이 한국에 있었어도 한지호의 얼굴을 자주 보진 못했을 것이다.
잘 나가는 여자 가수 못지않게 한지호도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이지은이 귀국한다는 날을 스마트 폰 달력에 체크해뒀다.
정확히 일주일 뒤.
그때까지 쓰러진 허충욱을 회복시키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지은과 데이트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폰을 내려놓은 한지호는 불과 몇 시간 전에 봤던 허충욱의 모습을 떠올렸다.
원래 허충욱은 환갑을 넘긴 노인이다.
하지만 나이에 비해 활기가 넘치는 정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제 본 허충욱은 완전히 달랐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몸에서 생기(生氣)가 빠져나간 것 같았다.
피부는 수분 없이 말라있었고, 그 사이 살도 꽤 빠진 모양이었다.
목화 현상이라는 한지호의 진단처럼 바싹 마른 한 그루 나무로 변하고 있었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건 그동안 눌려있던 병세가 폭발하며 생긴 일시적 현상이겠지. 그렇기에 눈을 뜨게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아.”
한지호는 전생과 현생의 기억을 더듬으며 목화 현상에 대한 분석을 이어나갔다.
허충욱이 쓰러진 것 자체는 크게 놀랄 일이 아니다.
그가 갖고 있던 지병과 체질, 생활 습관 등이 목화 현상을 촉발시켰다.
허충욱의 몸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던 목화 현상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고, 그로인한 충격으로 의식을 잃게 된 것이다.
정밀 검사를 해도 별다른 점이 발견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가만히 놔두고 수액과 영양제만 주입해도 오늘이나 내일 쯤 의식을 회복할 확률이 높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의식을 회복해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한지호의 진단이 확실하다면, 허충욱은 의식을 회복한 이후에도 상당한 운동 능력을 잃을 게 분명하다.
다리를 절거나 최악의 경우 침대에서 일어서지 못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손이나 팔을 떨거나 안면 경련에 시달릴 가능성 역시 충분하다.
의식(意識) 자체도 문제다.
눈을 뜨고 정신을 찾는다고 해서 온전한 의식 회복이라 볼 수는 없다.
목화 현상도, 파킨슨병도 종내에는 알츠하이머와 비슷한 형태로 발전한다.
갑자기 쓰러질 정도로 목화 현상이 심각하다면 허충욱의 정신이 온전하지 않을 확률이 낮지만은 않다.
기껏 의식을 회복해도 몸과 정신이 불완전한 상태면 공개 입찰 심사에 참여하기 힘들 것이다.
인천 시청과 정부 관계자들이 봤을 때 허충욱이 정상에 가까운 상태라고 판단하게 만들어야 한다.
“생기를 불어넣어 마른 나무가 아닌 푸른 잎을 피워내는 나무로 만들어야 해. 문제는 정신인데…….”
한지호는 허충욱의 몸을 회복시키는 건 자신 있었다.
사실 한 번 시작된 목화 현상은 완치시킬 수 없다.
파킨슨병처럼 목화 현상도 뚜렷한 질병이라기보다는 노화(老化)의 한 갈래이기 대문이다.
그러나 생기를 북돋으며 기운을 보하면 증상을 늦출 수 있다.
안면 경련이 올 것을 손 떨림 수준으로 막을 수 있고, 못 걷는 환자를 다리를 절뚝이는 정도로 완화시키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정신은 아예 다른 영역이다.
만약 의식을 회복한 허충욱이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면 난감해진다.
한의학에서건 현대 의학에서건 정신 이상을 개선시키는 건 난공불락(難攻不落)의 미션으로 여겨지고 있다.
허충욱이 멀쩡하게 걷게 되어도 정신이 온전치 않으면 당연히 입찰 심사에서 배제될 것이다.
확실히 쉬운 치료는 아니다.
한지호가 진맥을 마치고 마창우에게 했던 말은 진심이었다.
포기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상황을 낙관할 수도 없다.
냉정하게 말하면 무척 낮은 확률에 기대어 도박 아닌 도박을 해야 한다.
물론 위험한 도박이라면 한지호의 전공이라고 할 수 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한지호는 뭔가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켰다.
방구석에 앉아서 고민만 할 바에는 몸을 움직이며 해결책을 찾으려는 것이다.
오랜만에 최치우의 명징 약초로 찾아가서 이것저것 뒤져볼 작정이었다.
약초들을 손으로 만지고, 그 향을 맡다보면 뾰족한 수가 떠오를지 모른다.
남들은 모두 쉬는 1월 1일, 한지호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주인이 되기 위해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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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창우는 약속을 지켰다.
한지호가 편안하게 허충욱을 치료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준 것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백성필 부시장도 적극적으로 나서준 결과였다.
어차피 대학 병원의 교수들은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한지호는 진료를 마치고 저녁마다 특별 면회를 하게 됐다.
특별 면회 시간에는 의사와 간호사, 보호자 모두 병실에 들어올 수 없다.
오직 한지호만 허충욱이 누워있는 특실에 들어가 치료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한지호는 1월 1일을 보내고, 2일이 되어 정상적으로 원화 한의원에서 진료를 했다.
진료가 끝나면 곧장 인천으로 이동해 특별 면회를 빙자한 치료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오후에 뜻하지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허충욱이 눈을 떴다는 낭보(朗報)였다.
한지호가 예상한 것처럼 저절로 의식을 회복한 것이다.
그러나 비보(悲報)도 함께 날아왔다.
눈을 뜬 허충욱은 안면 경련과 손 떨림은 물론이고, 제대로 걷기 힘들 정도로 하체 운동 능력이 손상됐다.
게다가 말을 심하게 더듬으며 판단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고 한다.
몸과 정신에 걸쳐 우려하던 최악의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의식을 회복했다는 게 결코 다행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진료 중에 소식을 접한 한지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인천으로 달려가 허충욱이 상태를 직접 보고 싶었지만, 소중한 시간을 내어 원화 한의원을 찾아준 환자들을 뒤로 할 수는 없다.
그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충실하게 진료에 임하며 저녁이 오기를 기다렸다.
어둠을 뚫고 인천의 병원으로 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 그곳에서 더 큰 어둠을 마주하게 되겠지만, 결국에는 의술로 빛을 찾아낼 것이다.
이제껏 늘 그래왔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