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6장, 팔부능선 (1)
마창우의 전화를 받은 한지호는 곧장 병원으로 가겠다고 밝혔다.
아직 송년 파티가 한창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허충욱의 상세를 직접 확인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개인적으로 50억 원을 투자하기 위해 자금을 끌어 모았다. 그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자금적인 부분에서 완전히 다른 레벨로 도약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한지호는 송년 파티에 모인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미 파티의 핵심 순서가 지나갔고, 본래 목적을 달성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사람들도 급한 환자가 생겨서 가봐야 한다는 한지호를 이해했다.
나머지 정리는 조기운이 맡아주기로 했다.
한지호는 마리아 수녀와 천사원 아이들, 그리고 직원과 그 가족들에게 다시 인사를 전하고 한의원 밖으로 나왔다.
그는 지하주차장에 세워진 A5에 올라타 급히 엑셀을 밟았다.
A5를 조기운에게 선물로 줬지만, 아직 새로운 차를 뽑기 전이라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이 워낙 급하기에 당장은 선물해준 차를 운전해서 가는 게 최선이다.
부우우웅-
한지호의 마음을 아는지 오늘따라 더 거친 배기음이 뿜어졌다.
새해를 맞이하느라 들뜬 사람들 덕분에 거리는 밝았지만, 자정을 넘긴 시간이라 차가 막히지는 않았다.
한지호는 강남에서 인천으로 가기 위해 고속도로를 탔다.
허충욱은 인천의 한 대학 병원에 후송되어 검사를 받는 중이다.
딱히 뚜렷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 의료진이 애를 먹는다고 했다.
전화를 걸어 소식을 알려준 마창우도 대학 병원으로 올 예정이었다.
서른이 된 새해 첫 날부터 예기치 못한 사건이 터졌다.
올해도 작년 못지않게 버라이어티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엑셀을 꽉 밟는 한지호는 왜인지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이유로 웃음이 흘러 나왔다.
한 치 앞을 모르는 다이나믹한 인생에 저도 모르게 쾌감을 느끼는 것일까.
새해의 어둠을 가르며 인천으로 달려가는 한지호는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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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병원에 도착한 한지호는 곧장 마창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짜고짜 허충욱이 누워있는 병상을 찾아봤자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영종도 국제 특구 추진위원장인 허충욱은 인천에서 알아주는 거물이다.
오밤중이라도 교수 급 의료진이 병원에 나와 검사를 하고 있을 터였다.
한지호가 그 틈에 끼어들어 허충욱의 상태를 진단하긴 힘들다.
그렇기에 마창우와 먼저 연락을 하려는 것이다.
그는 허충욱이 쓰러진 비상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한 원장님.”
“전 방금 도착했습니다. 오고 계십니까?”
“5분 안에 도착합니다.”
“그럼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간결한 통화가 끝났다.
한지호는 병원 주차장에서 마창우를 기다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두운 밤하늘을 보고 있으려니 새삼 심각한 사고가 터졌다는 게 실감났다.
만약 허충욱이 일어나지 못하면, 그가 공개 입찰에 참여해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내국인 카지노 사업권은 다른 업체에게 넘어갈 수도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투자한 돈이 없기에 손실이 발생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때때로 기회의 상실은 실제 손해보다 더 뼈아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손에 쥐었다고 생각했으나 아직 방심할 단계가 아니었다.
한지호는 허충욱의 상세에 대한 궁금증과 그로인한 초조함, 그리고 가슴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호승심을 갈무리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우우웅-
그때 주차장으로 검은색 차량이 들어왔다.
벤츠 S 클래스를 타고 온 마창우가 도착한 것이다.
직접 차를 몰고 밤거리를 달린 마창우는 운전석에서 내리자마자 한지호를 불렀다.
“한 원장님!”
“오셨군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정확한 상황을 알고 계십니까?”
“저도 백성필 부시장님께 전해들은 게 전부입니다.”
“지금은 의료진들이 허충욱 위원장님을 둘러싸고 있을 것 같아 여기서 기다렸습니다.”
“잘하셨습니다. 같이 들어가서 상황을 보고, 한 원장님께서 편하게 진맥을 하실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보겠습니다.”
마창우의 말을 들은 한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마창우도 꽤 당황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패닉에 빠지진 않은 모양이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다.
주먹 세계의 전설인 마창우는 바로 옆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꼴을 수없이 지켜봤다.
물론 영종도 내국인 카지노 사업의 성공 여부에 따라 블랙문 코퍼레이션의 운명이 좌우된다.
조직원 몇 명이 죽어나가는 것과 비교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마창우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이 바닥의 전설답게 냉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한지호와 마창우.
서로 다른 세계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둘은 묘하게 통하는 구석이 많았다.
저벅저벅.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대학 병원 입구를 꽉 채우는 것 같았다.
마창우는 병원 안내데스크 직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몇 시간 전에 입원하신 허충욱 위원장님,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네? 네……. 자, 잠시만요.”
당직을 서는 안내데스크 직원이 허둥지둥 거리며 컴퓨터에 뭔가를 입력했다.
마창우는 그저 데스크 앞에 서서 낮은 음성으로 질문을 했을 뿐이다.
특별히 위협을 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안내데스크 직원은 엄청난 위압감을 느낀 것 같았다.
한지호는 의식하지 않고 있지만, 마창우는 일반인들이 감당하기 힘든 존재감을 대놓고 풍기는 사람이다.
영화 속 조폭들처럼 껄렁거리지는 않아도 거인 같은 체구와 날카로운 눈빛, 몸에 쌓인 분위기만으로 웬만한 사람을 그냥 압도해 버린다.
오히려 마창우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한지호가 무척 독특한 케이스다.
만약 한지호가 내공을 모두 끌어올리며 오금희를 사용하면 마창우도 위축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서 내공을 사용할 일은 거의 없었고, 그는 훈남 한의사라는 겉모습 아래에 무인으로서의 진면목을 감추고 사는 셈이었다.
“지, 지금 특실에 계세요.”
컴퓨터에서 입원 기록을 찾는 직원이 입을 열었다.
마창우는 건조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특실?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안내 좀 부탁합니다.”
“본관 7층 복도 맨 끝에 있는 707호실이십니다.”
“검사는 다 끝났습니까?”
“네. 하지만 과장님 이하 의료진들께서 특별히 지켜보시는 환자분이라고 기록에 나와 있습…….”
“고맙습니다.”
마창우는 직원의 말을 끊고 돌아섰다.
그가 한지호를 쳐다봤다.
한지호는 직원과 달리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마창우의 눈빛을 받아넘겼다.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다.’
마창우는 속내를 감추며 한지호에게 말을 걸었다.
“가시죠, 한 원장님.”
“네.”
둘은 안내데스크 직원이 말해준 대로 7층에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복도의 분위기부터 달랐다.
특실들이 들어선 공간이라 그런지 뭔가 더 고급스럽고 깔끔한 느낌이었다.
특히 복도 끝 707호 앞에는 여러 명의 의료진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한지호의 예상대로 인천의 거물인 허충욱이 쓰러지자 대학 병원 교수들이 발 벗고 나선 것이다.
검사가 끝났어도 혹시 모를 비상사태를 대비해 레지던트 급 의사들을 대기시켜 놓은 모양이었다.
그만큼 허충욱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뜻이다.
마창우는 망설임 없이 의료진에게 다가갔다.
아직 젊어 보이는 의사 세 명이 피곤이 역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방 안에 허충욱 위원장님이 계시는 거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검사 결과는 어떻습니까.”
마창우는 레지던트 의사들이 질문을 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의 말에 젊은 의사들은 순순히 대답을 했다.
“교수님들께서 직접 검사를 했는데 특별한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지병으로 당뇨를 앓고 계셨지만 수치 상의 문제는 없었는데도… 일어나시질 못하셔서…….”
“우리가 잠시 병문안 좀 하겠습니다.”
“네? 하지만 교수님께서 허락을 하셔야 합니다.”
“괜찮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백성필 부시장님이 책임질 겁니다.”
마창우가 목소리에 힘을 담아 말했다.
밤을 새느라 녹초가 된 젊은 의사들은 자신들이 나설 자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쓰러진 허충욱은 오밤중에 과장급 교수를 달려오게 만들 정도로 거물이고, 정체는 모르겠지만 위압감을 풍기는 마창우는 부시장을 언급하고 있다.
어설프게 원칙을 들먹여 봐야 득이 될 게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제일 선배로 보이는 의사가 방문을 열어주며 당부를 했다.
“저희는 30분 뒤에 오겠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간호사를 호출해주십시오.”
마창우는 대답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지호도 그를 따라 707호로 발을 옮겼다.
허충욱이 입원한 707호는 대학 병원의 특실답게 호텔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게 눈에 들어올 상황이 아니었다.
병상 위에 눈을 감고 누워있는 허충욱의 모습을 보니 가슴에 돌덩이가 얹힌 기분이었다.
“한 원장님, 공개 입찰 심사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위원장님께서 일어나지 못하면…… 판이 뒤집힐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일으켜야겠군요. 허 위원장님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도.”
“백성필 부시장님이 힘을 쓰고 있지만, 혼자서는 한계가 있을 겁니다.”
“일단 제가 진맥을 해보겠습니다.”
“잘린 손가락의 통증, 모두가 고개를 내저었을 때 한 원장님만이 치료를 해냈습니다. 저는 한 원장님을 믿습니다. 대학 병원의 교수들이 원인조차 못 찾아내도 원장님이라면…… 해낼 수 있을 겁니다.”
마창우가 신뢰를 듬뿍 담아 한지호를 격려했다.
그는 한지호 덕분에 지긋지긋한 환상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신기(神技)에 다다른 한지호의 의술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한국 의료 서비스의 정점에 있는 대학 병원보다 한지호를 더 믿는 것이다.
한지호는 허충욱에게 다가갔다.
그 흔한 산소 호흡기도 부착하지 않았다.
다만 심장 박동을 측정하는 센서만 붙어있을 뿐이었다.
정밀 검사 결과 특별한 문제가 없기에 다른 장치를 붙이지 않은 것 같다.
한지호는 지난 번 술자리를 떠올렸다.
술잔을 쥘 때 떨리던 손, 깊은 미간의 주름, 귓구멍 안에서 길게 자라난 털.
그때도 좋지 않은 인상을 받았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분위기에 휩쓸려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쓰러진 허충욱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때 느꼈던 인상이 한층 강하게 와 닿았다.
스윽-
한지호는 축 늘어진 허충욱의 왼팔을 잡았다.
두 손가락을 손목에 붙여 맥을 짚으려는 것이다.
자연스레 오금희의 기운이 발동되며 감각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예민해졌다.
두둥! 두둥!
미세한 심장 박동이 북소리처럼 생생하게 울렸다.
오직 한지호의 감각에만 잡히는 소리다.
맥박을 측정하는 기계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과학이 미처 파악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손가락 끝의 감각으로 짚어낼 수 있다.
한의학의 진맥은 사람의 몸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우주를 바라보는 법이다.
“후우-.”
이윽고 한지호가 허충욱의 팔을 내려놓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마창우가 조심스레 입술을 뗐다.
“위원장님이 쓰러진 원인을… 알아내셨습니까?”
한지호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냈습니다.”
“어떤 병입니까?”
“목화(木化) 현상입니다.”
“목화 현상?”
“사람이 나무처럼 변한다는 뜻입니다. 치료가 쉽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