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90화 (90/255)

# 90

4장, 승부수 (1)

어색한 기류가 맴돌고 있었다.

민시헌은 보좌관을 대동하지 않고 혼자 찾아왔다.

굳이 수행비서와 보좌관을 건물 아래에 남겨두고 올라온 것이다.

한지호는 자신의 오피스텔 소파에 민시헌이 앉아있다는 게 실감나지 않았다.

야당의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거물 국회의원이 집에 찾아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정치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본능적으로 위압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지호는 부엌에서 차를 준비하며 심호흡을 거듭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민시헌과 당당히 마주해야 한다.

그의 청탁을 거절하고, 오히려 뒤통수에 폭탄을 터트린 셈이지만 겁 먹을 필요는 없다.

한지호는 옳은 일을 했고, 국민 여론의 응원을 등에 업고 있다.

아무리 나는 새를 떨어트리는 실세 민시헌이라도 함부로 굴지는 못 할 것이다.

설령 민시헌이 권력을 이용해 압박을 해와도 상관없다.

한지호에겐 아직 남은 카드가 있다.

달그락, 달그락-

그윽한 향이 아는 허브티를 준비한 한지호가 거실로 나왔다.

“올해 유독 겨울 날씨가 매서운 것 같습니다, 의원님.”

한지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민시헌 앞에 찻잔을 놓았다.

민시헌 역시 예전에 봤을 때와 별로 다를 바 없는 표정이었다.

젠틀하면서도 적당히 근엄한 얼굴로 한지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갈수록 날이 추워지니 국민들의 겨울나기가 더 힘들어질 것 같습니다.”

“민 의원님께서 더 힘을 써주셔야죠.”

“그러고 싶은데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발목을 잡는 게 정치입니다.”

민시헌의 뼈 있는 말을 내뱉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주위의 공기가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한지호는 민시헌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향긋한 허브티를 음미했다.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몸을 따뜻하게 데운 두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

체면 치레를 했으니 이제 본론을 꺼내려는 것이다.

먼저 포문을 연 것은 민시헌이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은근히 화살 하나를 날렸다.

“방송은 아주 재밌게 시청했습니다. 한 원장님께서 제 부탁을 잊지 않았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지요.”

“의원님께서 오해를 하시기 충분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해라… 흥미롭네요.”

민시헌은 시정잡배들처럼 섣불리 흥분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얕은 사람이었다면 정치권의 거물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화를 꾹꾹 눌러 담은 모습에서 만만치 않은 내공이 느껴졌다.

한지호는 그를 쳐다보며 있는 그대로의 설명을 해줬다.

“의원님의 부탁을 받고, 내추럴 코리텍을 비롯한 주요 업체의 원재료를 구했습니다. 정확히 품질을 파악하고 백수오의 효능을 알리려 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원재료를 구해 알아본 결과 방송 내용처럼 대부분 이엽우피소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충격적인 결과였고, 그런 사실을 알았음에도 백수오를 추천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냥 묻을 수도 있었지만 그 역시 국민 건강을 위협하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결국 본의 아니게 의원님의 청을 외면하고, 가짜 백수오를 고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원장님이 악의를 가지고 일부러 일을 벌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업체들이 가짜 백수오를 썼다면 당연히 국민들에게 알려야지요. 그러라고 있는 프로그램이지 않습니까. 다만.”

민시헌이 잠시 뜸을 들였다.

한지호는 그의 눈빛에서 날카로운 기운을 감지했다.

표정과 목소리는 그대로지만 눈동자에 서린 적의(敵意)까지 감출 순 없었다.

“다만 미리 언질을 줬더라면 참 고마웠을 텐데 말입니다. 그럼 조금 덜 당황할 수 있었고, 한 원장님을 향한 신뢰도 깊어졌지 않겠습니까.”

“결과적으로 백수오의 효능을 널리 알리는 대신 이엽우피소의 실체를 고발하게 됐지만, 시간이 지나면 국민들이 진짜 백수오가 귀하다는 걸 알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

민시헌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애초에 그는 백수오의 효능을 알려 달라고만 부탁했었다.

한지호에게 뭔가를 따질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전후사정을 아는 한지호는 민시헌이 왜 지난 방송 때문에 당황했는지 꿰뚫고 있었다.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인 내추럴 코리텍을 밀어주려 했는데, 지난 방송으로 인해 내추럴 코리텍이 폐사의 위기까지 몰렸기 때문이다.

“사실 민 의원님께서 직접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엔 한지호가 반격을 가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유난을 떨며 집까지 찾아오냐는 뜻이다.

정중한 말이었지만 안에 담긴 가시를 민시헌이 모를 리 없었다.

“그건… 워낙 좋은 약재인 백수오가 못 쓰는 약재처럼 묻히게 될까봐 아쉬워서 그렇지요.”

역시 민시헌은 노련한 정치인답게 곧바로 말을 둘러댔다.

“외람되지만 조금 다른 이유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의원님.”

한지호는 공격의 고삐를 바짝 당겼다.

좋게 좋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며 적당히 대화를 끝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두고두고 후환을 남기는 일이다.

정치인에게 원한의 여지를 남겨두면 언제 어느 때에 기습을 당할지 모른다.

그럴 바에는 확실하게 이쪽의 카드를 보여주고, 섣불리 건드릴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필하는 게 낫다.

한지호는 그런 결단을 내렸기에 민시헌을 몰아붙이는 것이다.

조용조용한 가운데 뼈 있는 말들이 비수처럼 오가는 진풍경이었다.

“조금 다른 이유라니요?”

“의원님의 조카분께서 내추럴 코리텍에 근무한다고 들었습니다. 국내 1위 백수오 가공 업체였고, 안타깝게도 이엽우피소를 사용한 바로 그 회사죠.”

“갑자기 내 조카의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생각을 깊이 하시고 말씀을 꺼내시지요, 한 원장님.”

민시헌은 여전히 언성을 높이지 않았지만 말을 또박또박 씹어서 내뱉기 시작했다.

웬만한 사람은 이쯤에서 꼬리를 말 것이다.

언젠가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정치인, 그게 아니더라도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는 현역 국회의원을 일부러 화나게 만들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한지호는 한 번 빼든 칼을 쉽게 집어넣지 않았다.

“내추럴 코리텍의 라인을 통해 선거 자금도 지원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한 원장님, 방금 한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하는 것입니까?”

“저는 민 의원님과 척을 지고 싶지 않습니다. 뜻하지 않게 가짜 백수오를 고발하게 됐지만, 다른 의도를 가진 건 아닙니다. 더 이상 내추럴 코리텍을 파고들 생각도 없습니다. 하지만 의원님께서 저를 주시하신다면…… 저 역시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무례하게 여겨졌다면 다시 사과드리겠습니다.”

예의를 지키면서 할 말을 다 했다.

민시헌은 석상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서 한지호의 말을 되뇌고 있었다.

한지호는 민시헌의 대응을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생각을 정리한 민시헌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속을 알 수 없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한 원장님을 너무 과소평가했음을 인정해야 될 것 같습니다. 촉망 받는 한의사인줄 알았는데, 능구렁이 몇 마리를 품고 있는 정치인 못지않을 줄이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일 따름입니다.”

“그거야 말로 가장 빛나는 재능이지요. 자신의 모자람을 알고, 한 발 앞서 움직이는 것. 한의사가 아니었다면 우리 당에 모시고 싶을 정도입니다.”

“과찬이십니다.”

“아무튼 백수오 일로 더 이상 얼굴 붉히는 일은 만들지 마십시다. 한 원장님은 할 일을 했고, 지금부터는 나대로 일을 할 터이니.”

“의원님의 뜻, 새겨듣겠습니다.”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르침을 주시지요.”

“싸울 때와 피할 때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 원장님과 나는 싸울 때가 아닌 듯 합니다.”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기만을 바라고 있겠습니다.”

한지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민시헌의 휴전(休戰)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정치인의 말을 100% 신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시헌은 일단 한지호를 건드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한지호는 자신을 건드리면 이판사판으로 달려들겠다는 의지를 내보였고, 민시헌은 이쯤에서 일을 키우지 말자는 의사를 밝혔다.

서로의 카드를 가늠하며 협상 아닌 협상을 한 것이다.

29살의 한지호가 노회한 민시헌을 상대로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이게 끝은 아니다.

민시헌은 잠잠해져도 김영찬 교수나 여타 업체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래도 민시헌이라는 커다란 장애물을 넘었으니 한숨을 돌릴 수 있다.

한지호는 이참에 가짜 백수오 파동을 딛고 국민 한의사로 우뚝 설 기대를 품었다.

남은 파도를 잘 헤쳐 나가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위기는 이겨내고, 기회는 극대화시킨다.

뜻하지 않게 알아낸 가짜 백수오의 진실은 한지호를 더 높은 곳으로 올려줄 것 같았다.

+++

주말이 지나갔다.

들끓기 시작한 여론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흔히 한국이 여론을 냄비에 빗대곤 한다.

냄비처럼 쉽게 뜨거워지지만, 또 그만큼 쉽게 식어버리는 점을 비꼰 표현이다.

그러나 몇몇 문제에 있어서는 여론이 끈질기게 관심을 가진다.

국민들의 건강과 직결된 문제라면 여론은 어느 때보다 민감해진다.

벌써 10년 가까이 지난 일이지만 광우병 파동 때 여론은 그 어느 때보다 끈질기게 투쟁을 지속했었다.

그때만큼은 누구도 냄비라는 표현을 쓰지 못했다.

가짜 백수오 사건도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어물쩍 정리되진 않을 것 같았다.

광우병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국민 건강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방송을 보거나 뉴스를 통해 사건을 접한 국민들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이제껏 믿어왔던 대형 업체들이 가짜 백수오로 사람들을 농락해온 셈이다.

영세 업체에서 원재료를 속인 것이라면 개인의 일탈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대형 업체 여러 곳의 행태는 한의학계 전반에 대한 불신을 불러왔다.

애꿎은 한약 가공 업체나 한의원들도 불똥을 맞았다.

그러나 자정 작용을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가짜 백수오 사건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한지호나 <건강백서, 진짜! 가짜!>를 원망하는 사람은 그릇이 좁다 못해 간장 종지만한 것이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뿌리 깊이 병든 한의학계의 발전을 위해 뼈아픈 자정 작용을 받아들일 터였다.

물론 어느 업계에나 건강한 생각을 지닌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한의학계의 로열 패밀리 출신이자 K대 한의학과의 실세인 김영찬 교수는 생각이 글러먹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필이면 그런 작자가 한의학계에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거물이라는 게 문제였다.

가짜 백수오를 고발하며 다시금 화제의 중심에 서게 된 한지호는 민시헌이라는 거물의 움직임을 막았다.

하지만 예전부터 한지호를 벼르고 있던 김영찬은 여론이 어떻든 상관없이 업계를 등에 업고 행동을 개시했다.

월요일 아침, 내추럴 코리텍과 몇몇 백수오 가공 업체들이 일시에 사과문을 공표했다.

말을 맞춘 듯 “고의로 가짜 백수오를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다. 국민들께 진심으로 사죄드린다.”는 내용의 깔끔하지 못한 사과문이었다.

식약청의 처분을 받은 후에는 다시 영업을 재개할 노림수인 것 같았다.

그러나 내추럴 코리텍과 업체들의 사과문은 수면 위에서 벌어지는 쇼에 불과하다.

수면 아래에서는 한지호를 노린 격문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K대 한의학과에서 졸업생 한지호를 윤리위원회에 회부시켰다.

뿐만 아니라 사과문을 공표한 내추럴 코리텍 등 백수오 가공 업체들이 대형 로펌에 한지호를 고발했다.

사실 적시라도 무차별적 사명 공개로 인한 명예 훼손을 문제 삼은 것이다.

윤리위원회 회부 문제나 명예 훼손 소송 등은 가볍게 웃어넘길 일이 아니었다.

상식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 사회는 상식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법의 맹점, 권력의 구조를 생각하면 얼마든지 골치 아파질 수 있다.

그러나 김영찬의 움직임이나 내추럴 코리텍의 반격은 모두 한지호의 시나리오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지호는 항상 최악을 가정하고 계획을 짠다.

월요일 진료를 보기 위해 원화 한의원으로 나온 그는 곧 두 가지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분명 짙은 미소를 지으며 기뻐할 게 분명했다.

반발력이 강해서 더 높이 튕겨져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모교인 K대 한의학과와 내추럴 코리텍의 반발은 심각한 시련 같아도 결국에는 한지호를 높이 올려주는 스프링 역할을 할 것이다.

방송 대본을 바꾸며 가짜 백수오를 고발했을 때부터 한지호는 일생일대의 승부수를 던진 셈이었다.

이 승부의 결과가 완전히 드러날 순간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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