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2장, 게임의 법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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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전야(暴風前夜)와 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촬영장에서 백수오의 진실을 고발한 한지호는 방송이 전파를 타기만을 기다렸다.
까다롭고 독특한 환자인 마창우의 환상통 치료는 막바지에 다다랐고, 원화 한의원은 여전히 넘치는 환자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한 달에 하루를 빼서 의료 봉사를 하기로 계획한 것도 강남구청의 협조를 받아 순조롭게 진행 될 예정이었다.
한지호는 순풍에 돛을 달고 항해하는 배와 같은 입장이었다.
하지만 태풍의 눈으로 들어가길 선택했고, 잠깐의 고요가 끝나면 어마어마한 격랑(激浪)이 몰아칠 것이다.
눈 딱 감고 가짜 백수오 문제를 모른척 하거나 민시헌 의원의 부탁을 들어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진실은 언젠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마련이다.
거짓으로 얻은 부귀영화는 진실의 태양이 떠오르는 순간 간밤의 어둠처럼 부질없이 사라지고 만다.
한지호는 진실의 힘을 믿었다.
어쩌면 누군가는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융통성이 없다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사실 한지호가 우직하고 뚝심 있는 성향의 인물은 아니다.
그보다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정세를 판단하는 지략가 스타일에 가깝다.
그렇지만 이번 사건에서는 달랐다.
때로는 위험을 감수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조조가 관도대전에서 10배 넘는 병력을 가진 원소와 싸우지 않았다면 천하의 패권을 차지했겠는가.
무모하고 불가능한 전쟁이라 다들 만류했지만, 조조는 관도대전을 피하지 않았다.
그 결과 기적 같은 승리로 순식간에 중원의 패권을 움켜쥐게 됐던 것이다.
한지호에게 있어 가짜 백수오를 고발한 건 관도대전이나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단순히 백수오 업체와 한의학계의 반발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내추럴 코리텍 뒤에 서있는 국회의원 민시헌, 그는 관도대전 당시의 원소와 다름없는 거물이다.
그러한 거물의 청탁을 거절한 것도 모자라 본의 아니게 뒤통수를 치게 됐으니, 한지호는 자기 발로 관도에 걸어 들어간 셈이었다.
“비가 오네.”
창밖으로 굵은 빗줄기가 떨어졌다.
겨울에는 보기 드문 빗방울이 후두둑 후두둑 거리를 적시고 있었다.
한지호는 신사동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오피스텔 아파트 통유리 앞에 한참 동안 서있었다.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가 복잡한 마음까지 씻어주는 기분이었다.
결전의 날이 머지않았다.
한지호는 <건강백서, 진짜! 가짜!> 방송을 통해 선제공격을 날렸다.
누군가를 공격할 의도는 없었지만, 상대는 분명 반격이나 보복을 준비할 것이다.
과연 관도대전을 이겨내고 효웅(梟雄)이 된 조조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을 것인가.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가 대답을 대신 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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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님, 오늘 방송이죠?”
“오늘도 저희끼리 모여서 본방사수 할게요!”
간호사와 코디네이터들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금요일 진료가 끝났으니 다 같이 모여서 <건강백서, 진짜! 가짜!>를 시청하겠다는 것이다.
원화 한의원 식구들에게 금요일 저녁은 한지호의 방송을 보는 날로 자리잡았다.
한지호 역시 종종 방송 시간에 맞춰 회식을 하며 함께 본방을 사수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는 퇴근 준비를 마친 직원들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아마 내일 오전에는 병원 전화기가 불이 날 겁니다.”
“네?”
“오늘 방송을 보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거에요. 내가 또 폭탄을 하나 던졌거든요.”
“설마… 다이어트 한약 때처럼 항의 전화와 문의 전화가 폭주하게 될까요?”
안내데스크를 담당하는 이주연이 과거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다이어트 한약 방송이 나간 후 코디네이터들까지 매달려 쏟아지는 전화와 메일을 받아야 했었다.
물론 그로인해 원화 한의원의 매출이 쑥쑥 오르긴 했지만, 직원들 입장에서는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소동이었다.
한지호는 이주연을 비롯한 직원들을 향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 달에는 보너스 두둑히 챙겨줄게요.”
“네? 원장님, 그 말씀은…….”
“아마 토요일이랑 월요일은 다이어트 한약 때보다 더 힘들지도 몰라요.”
“대, 대체 어떤 내용이 방송으로 나오는 거죠?”
“직접 확인들 하세요. 재밌긴 무지 재밌을 겁니다. 지금 이 시간 이후부터 내일 오전 출근 전까지 내 핸드폰은 꺼져 있을 테니 그렇게들 알아요.”
한지호는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스마트 폰 밧데리를 빼버렸다.
논란이 예상되니 아예 전화기를 끄고 있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았다.
사무장 박우식을 포함한 직원들은 한지호가 장난을 치고 있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웬만해선 허풍이나 과장을 하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방송 될 <건강백서, 진짜! 가짜!>에서 가짜가 아닌 진짜 대형 폭탄이 터질 것 같았다.
한지호는 직원들을 남겨두고 먼저 퇴근을 했다.
“내일 오전에 봅시다. 힘든 하루가 될 테니 다들 일찍 들어가서 푹 쉬어요.”
보나마나 내일 아침부터 병원 전화가 불이 나고, 예전처럼 기자들이 몰려와 소란을 피울 것이다.
한지호는 일련의 상황을 예상하며 한의원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자신의 쉼터인 신사동 오피스텔에서 조용히 방송을 보고 휴식을 취할 계획이었다.
항상 궂은일을 대신해주는 든든한 오른팔 조기운이 오피스텔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 같이 방송을 보고, 향후의 일을 의논하면 불금도 금방 지나갈 것이다.
부와아아앙-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도로로 나온 한지호가 엑셀을 세게 밟았다.
퇴근 시간이라 강남대로가 꽉 막혔지만, 그는 이제 차가 잘 다니지 않은 골목길 지리를 꿰뚫고 있었다.
어느새 강남 구석구석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된 것이다.
우회도로를 이용해 오피스텔에 도착한 한지호는 기계식 타워에 차를 집어넣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고층으로 올라서 현관문 앞에 다다른 그가 번호키로 손을 가져갔다.
삑삑삑삑- 디리링!
비밀번호를 인식한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한지호가 신발을 벗는 사이 거실 쪽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형님!”
먼저 도착해있던 조기운이었다.
천사원 아이들을 찾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조기운은 청우단 구매 고객들을 만나고 일찍 신사동 오피스텔에 와있었다.
그는 당연하게도 신사동 오피스텔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
여자친구인 이지은도 모르는 비밀번호지만 조기운은 예외였다.
혹시라도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누구보다 먼저 한지호를 챙길 사람이 조기운이기 때문이다.
“별 일 없었지?”
한지호가 외투를 벗어 던지고 조기운에게 질문을 던졌다.
조기운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김 과장님과 윤 팀장님 아시죠? 그분들 회사의 임원들이 청우단을 주문하고 싶다고 해서 승낙했습니다.”
“그래? 한 달에 2000알을 넘기지 않겠어?”
“수량 조절을 신경 써야겠지만, 그래도 대기업 임원들과 거래를 터놓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 그런 계산도 할 줄 알고, 많이 컸는데.”
“모두 형님 덕분입니다.”
한지호는 조기운의 어깨를 두드렸다.
조기운은 사회 중역인 청우단 고객들을 관리하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중간 중간 한지호의 지시를 받아 어려운 일을 해결하기도 했다.
광주와 고창까지 내려가서 천사원의 지훈이를 데려온 것뿐 아니라 크고 작은 일에서 한지호의 손발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이제 둘은 긴 말을 나누지 않고 눈빛만 봐도 뜻이 통하는 사이가 됐다.
한지호는 외투를 벗고 곧장 소파에 몸을 묻었고, 조기운은 그 사이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를 꺼내왔다.
진료를 마치고 돌아온 한지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잘 아는 것이다.
이럴 때 보면 절친한 동생이자 오른팔이 아니라 마누라 같기도 했다.
“하이네켄 다 떨어져 있어서 가득 채워 놓았습니다.”
조기운이 맥주 캔을 건네주며 말했다.
한지호는 소파에 파묻힌 채 엄지를 치켜올렸다.
“기운이 너가 없으면 어떻게 사나 싶다.”
“아닙니다. 아, 그리고 저 다음 주에 이사합니다.”
“따로 도와줄 건 없어?”
“일은 업체가 다 해줘서 괜찮습니다. 이사 끝내고 집들이 때 모시겠습니다.”
조기운은 한지호가 살던 연남동 원룸에서 벗어나 번듯한 소형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됐다.
한지호로부터 매달 받는 월급과 청우단 판매 수익의 인센티브가 웬만한 대기업 직장인보다 훨씬 높기 때문이다.
아직 한참 멀었지만, 한지호는 자신과 함께 일하면 인생이 바뀔 거라고 말했었다.
조기운은 서서히 자신의 인생을 바꿔가는 중이었다.
“좀 있으면 방송 시작하지?”
“예, 형님.”
조기운이 TV를 틀었다.
채널은 당연히 MBS에 고정이었다.
한지호 스스로 관도대전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가짜 백수오 고발이 방송되기 직전이었다.
몇 분 뒤면 전국 시청자들의 안방과 거실에 <건강백서, 진짜! 가짜!>가 방영 될 것이다.
방송이 가까워지자 한지호와 조기운의 말수가 줄어들었다.
조기운은 가짜 백수오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둘 다 약간은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둘이 맥주를 마시는 소리와 TV에서 흘러나오는 CF 소리가 넓은 거실을 채웠다.
“시작한다.”
한지호가 혼잣말을 내뱉었다.
길고 지루한 광고가 끝나고 드디어 <건강백서, 진짜! 가짜!>가 TV 화면에 떠올랐다.
프로그램을 상징하는 영상이 시선을 사로잡았고, 뒤이어 메인 MC인 문주연 아나운서가 단아한 미모를 자랑했다.
“안녕하세요, 시청자 여러분. 세상에 넘치는 건강 상식을 진단하는 길라잡이, <건강백서, 진짜! 가짜!>의 문주연입니다.”
문주연은 차분하면서도 또박또박한 말투로 오프닝을 이끌었다.
TV 속 문주연의 모습에 조기운이 감탄을 흘렸다.
“사람이 저렇게 예쁘면서 똑똑할 수도 있다니, 진짜 놀라운 것 같습니다. 문 아나운서 같은 여자는 대체 어떤 남자랑 만나는 걸까요?”
조기운의 넋두리에 한지호는 웃음으로 답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문주연의 적극적인 대시를 철벽처럼 밀어낸 장본인이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오프닝 분량이 끝나고, 양승찬 대신 투입 된 전문의가 비타민 주사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한지호의 순서는 그 다음이다.
둘은 다시 TV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정신을 집중했다.
“그럼 이번에는 한지호 원장님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매번 깜짝 놀랄 만한 정보로 잘못 알려진 건강 상식을 바로잡고 계신데요. 특히 주부 시청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연예인들을 뛰어넘고 계세요. 어떤가요, 인기를 실감하시나요?”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따뜻한 시선으로 봐주시는 분들이 늘어나 보람을 느낍니다.”
“겸손함까지 갖추시면 반칙 아닌가요? 오늘은 어떤 소식으로 시청자분들을 깜짝 놀라게 만드실지 알려주세요.”
문주연의 말에 화면 속 한지호가 눈을 번뜩였다.
한지호는 저 당시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다 알고 있음에도 손에 땀이 맺히는 걸 느꼈다.
곧이어 TV 속 한지호의 얼굴이 클로즈업 됐다.
“오늘은 백수오라는 약재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백수오는 가격은 저렴하고 효능은 뛰어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중에 유통되는 백수오 제품들의 원료를 분석해본 결과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충격적인 사실이라면 어떤 것일까요?”
“여러분은 지금까지 가짜 백수오, 이엽우피소로 만들어진 제품을 복용하고 계셨습니다.”
폭탄발언이었다.
TV 속 스튜디오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한지호는 촬영 당시를 회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내 TV에서는 한지호가 직접 찍어온 영상이 재생됐다.
진짜 백수오와 가짜 백수오인 이엽우피소를 비교 분석한 영상이었다.
한지호는 내추럴 코리텍을 비롯한 주요 업체의 이름을 그대로 언급했다.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서라면 가짜 백수오를 사용한 업체를 명시하는 게 당연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형님, 진짜 제대로 폭탄을 던지셨습니다. 전화기를 꺼두시길 잘 하신 것 같습니다.”
TV를 보던 조기운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역시 방송이 나가고 불어 닥칠 후폭풍을 짐작한 것이다.
한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왕 시작한 전쟁이라면 확실하게 이겨야지. 방송은 시작에 불과해.”
관도대전에 임한 조조는 치밀한 전략으로 10배가 넘는 원소군을 몰락시켰다.
양심을 지키기 위해 무모한 싸움을 시작한 한지호도 조조와 같은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총칼이 아닌 여론과 권력으로 싸우는 전쟁에 불이 붙었다.
출정(出征)을 결심한 한지호는 TV 속 자신의 모습을 진지하게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