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82화 (82/255)

# 82

10장, 검은 손 (1)

“어서 와요.”

민시헌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지호를 맞이했다.

그는 콘래드 호텔의 프라이빗 라운지에서도 가장 구석에 위치한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중세 시대 귀족의 응접실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방은 악어 가죽과 엔틱한 가구들로 장식 돼 있었다.

대리석 테이블 위에는 온갖 종류의 치즈와 핑거 푸드가 보였고, 브랜드를 알 수 없지만 비싼 게 분명한 샴페인도 아이스박스 안에 세팅 돼 있었다.

먼저 도착해 샴페인을 마시고 있던 민시헌은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인상이 더 좋았다.

50대 초반이지만,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한국인답지 않게 오뚝한 콧날과 깔끔한 이미지는 주부 유권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 충분했다.

민시헌이 야당의 잠룡으로 평가받는데 외모가 한 몫을 했다는 평가가 과장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외모가 전부는 아니지만, 정치인이 호감 가는 모습을 가지는 건 무척 중요하다.

한국 정치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리더십이나 정책 비전이 아니라 인간적 매력이기 때문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지호입니다.”

한지호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상대가 야당의 거물 정치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공손하게 굴지는 않았다.

다만 한창 연장자이고, VVIP라고 할 수 있으니 늘 그렇듯 기본적인 예의를 차렸다.

민시헌은 주저 없이 손을 내밀었다.

정치인답게 악수를 하는 습관이 몸에 배인 것 같았다.

한지호는 그와 악수를 나눴다.

길거리나 유세 현장에서 민시헌과 악수를 나눈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외부에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프라이빗 라운지의 밀실에서 단 둘이 마주보고 악수를 나눈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야당의 거물인 민시헌과 이런 자리를 갖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정치인들이 한 두 명이 아닐 터였다.

한지호는 별다른 노력도 없이 민시헌의 부름을 받아 프라이빗 라운지에서 독대를 하게 됐다.

민시헌의 속내를 아직 모르지만, 흔치 않은 기회임은 분명했다.

“앉아서 이야기 하죠.”

“네.”

민시헌은 시종일관 젠틀했다.

아들 연배나 다름없는 한지호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했다.

권력을 가진 정치인들이 얼마나 권위적인지 생각하면 놀라운 태도였다.

민시헌이 말을 편하게 해도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알아서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는 모습이었다.

한지호는 민시헌이 따라주는 샴페인을 받았다.

돔 페리뇽이나 아르망디 같은 최고급 샴페인은 한지호도 익히 알고 있다.

신사동 오피스텔 냉장고에 돔 페리뇽을 넣어두고 틈틈이 즐기기도 한다.

하지만 민시헌이 따라주는 샴페인 브랜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콘래드 호텔의 프라이빗 라운지에서 제공되는 것이니 분명 돔 페리뇽, 아르망디보다 더 비싼 샴페인일 것이다.

보통 호텔에서 아르망디 한 병이 100만 원 넘게 팔리는 걸 생각하면 이 샴페인의 가격은 얼마일지 예측하기도 힘들었다.

“바쁠 텐데 이렇게 불러서 미안합니다. 보좌관이 갑자기 찾아가서 놀랬었지요?”

“아닙니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도 만나게 되어 영광이에요. 장안에 명성이 자자한 젊은 한의사 아니십니까.”

“과찬이십니다.”

한지호와 민시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덕담을 주고받았다.

민시헌은 섣불리 본론을 꺼내지 않았다.

보좌관을 보내 은밀히 약속을 잡고, 프라이빗 라운지로 부른 걸 보면 분명 예사롭지 않은 이야기를 할 것 같았다.

단순히 TV에 나오는 젊은 한의사와 친목을 다지자고 이런 수고를 들일 리 없다.

그 점을 아는 한지호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사람은 연예계나 의학계와는 비교할 수 없이 거칠고 더러운 정치계에서 거물로 추앙 받는 사람이다.

호감형의 외모와 신사다운 태도 뒤편에 능구렁이 백 마리는 숨기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대한민국 정계에서 살아남아 거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방송은 계속 잘 보고 있어요. 요즘 건강백서의 인기가 식을 줄 모르던데… 어르신들께서 특히 좋아하시고, 좋은 정보를 얻고 있으니 참 유익한 프로그램입니다.”

민시헌이 화제를 <건강백서, 진짜! 가짜!>로 돌렸다.

아무래도 지금의 한지호를 만들어준 방송 프로그램이니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었다.

한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운 좋게 프로그램이 자리를 일찍 잡은 것 같습니다. 국민들 건강 상식 증가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 기쁩니다.”

“아주 큰 역할을 하고 있지요. 듣기로는 의사 패널이 바뀐다면서요?”

“네. 기존의 양승찬 선생님이 물러나시고, 다음 녹화부터 다른 선생님이 합류하실 예정입니다.”

“어차피 건강백서를 이끌어가는 건 문주연 아나운서와 한지호 원장님이니 큰 지장은 없겠네요.”

민시헌은 차분한 어조로 프로그램을 평했다.

그는 건강백서 방송을 제대로 챙겨본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간단하지만 완벽한 진단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건강백서를 끌어오는 중심축은 누가 뭐래도 한지호다.

2화와 3화의 방송 이후 의사인 양승찬의 분량보다 한지호의 분량이 훨씬 늘어났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민시헌의 말을 들은 한지호는 궁금증이 더 깊어졌다.

‘내가 나오는 방송까지 챙겨봤다는 소리인데…… 대체 무슨 목적을 가진 거지?’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지만 머릿속으로는 복잡한 계산을 하고 있었다.

민시헌의 의도가 짐작되지 않았다.

잘 나가는 국회의원이 이제 막 뜨기 시작한 한의사와 친목을 다져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물론 알아둬서 나쁠 일은 없지만, 이렇게 따로 만나 공을 들일 일은 아니다.

한지호는 민시헌이 누군가의 치료를 부탁할 거라 예상했다.

아무래도 그게 제일 합리적인 예측이었다.

그러나 민시헌은 좀처럼 본론을 꺼내지 않고 주변부만 긁고 있었다.

한지호는 대선 후보군으로 분류되는 국회의원과 마주앉아 잡담만 나누고 있는 게 슬슬 부담스러워졌다.

바로 그 때, 민시헌의 눈매가 살짝 변했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분위기가 약간 달라진 것 같았다.

루즈 할 정도로 영양가 없는 이야기만 하다가 갑자기 본론을 꺼내들었다.

30분 넘게 대화를 나누며 한지호라는 인물에 대해 대강 파악을 했다고 여겼는지 모른다.

“그런데 말입니다, 한 원장님.”

“네?”

“방송 아이템 선정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PD나 작가의 영향도 있지만, 한 원장님 의견이 강하게 반영된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아, 사실입니다. 제가 아이템을 제시하면 제작진에서 대부분 수용해주고 있습니다. 간혹 제작진이 먼저 아이템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지만요.”

“역시 그렇군요.”

민시헌이 묘한 표정으로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한지호는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나 지인의 치료를 원하는 거라면 지금쯤 이야기를 했어야 한다.

하지만 민시헌은 분위기를 바꾸며 방송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어쩌면 민시헌이 한지호를 프라이빗 라운지로 불러낸 이유가 치료 때문이 아니라 방송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지호의 예감은 맞아 떨어졌다.

민시헌이 한지호 가까이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는 밀실이지만, 그래도 목소리를 낮췄다.

확실히 중요한 본론을 꺼낸 것이다.

“다름 아니라 제보를 하고 싶은 아이템이 있어서 한지호 원장님을 뵙고 싶었습니다. 국민 건강 상식 증진에 이바지하고 계시니 좋은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고…… 우리 당에서 건강 보건 정책을 연구할 때 한지호 원장님이 큰 역할을 해줄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의원님.”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백수오라고 알고 있으시지요?”

“네. 백수오는 자주 쓰는 약재입니다.”

“요즘 복용하고 있는데 효능이 아주 탁월하더군요.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백수오 열풍이 불고 있고……. 그래서 한 원장님이 건강식품으로 백수오를 조명해줬으면 어떨까 합니다. 물론 건강백서 프로그램에서 말이지요.”

“백수오를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향후 우리 당의 정책 연구원에서 한 원장님을 보건 자문위원으로 모실 수도 있을 테지요.”

한지호는 말없이 민시헌의 얼굴을 쳐다봤다.

지금 야당의 거물 국회의원이 일종의 청탁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뭔가 애매했다.

특정 상표나 제품을 홍보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막연하게 백수오라는 약재를 방송 아이템으로 다루라는 말이다.

노골적인 특정 상품 청탁이라면 길게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민시헌이 원하는 건 그저 백수오의 효능을 알려달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백수오 자체는 누구의 소유도 아닌 널리 쓰이는 대중적인 약재다.

민시헌은 대체 무엇을 노리고 <건강백서, 진짜! 가짜!>를 통해 백수오를 홍보하려는 것일까.

게다가 그 대가로 제시한 보답 역시 단순하지 않았다.

야당의 정책 연구원에서 보건 자문위원이 되는 건 엄청나게 명예로운 일이다.

정치 성향을 떠나서 국가의 보건 의료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 자체로 웬만한 대학에 교수가 되는 것보다 더 큰 홍보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야당의 정책 연구원에 들어가길 원하는 한의학과 교수나 의대 교수들은 한 트럭이 넘을 게 분명했다.

민시헌은 그런 자리에 한지호를 꽂아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한지호를 꽂아줄 능력이 있었다.

야당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거물인 그의 요청을 누가 거절하겠는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한지호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백수오는 좋은 약재입니다. 가격에 비해 효능이 좋고, 잘 사용할 경우 탁월한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녹용 등의 비싼 보양재만 선호하는 국민들에게 추천할 수 있는 약재입니다.”

“그렇지요. 역시 한 원장님은 뭘 좀 아십니다.”

“제 마음대로 아이템을 선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작진과 함께 고민해보겠습니다.”

“그래요. 그거면 됐습니다. 좋은 결과 있기를 기다리고 있을게요.”

“방송과는 별개로 정책 연구원의 자문위원은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너무 감사하지만, 그 제안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한지호의 말에 민시헌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민시헌은 한지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한층 중후한 음성이 울렸다.

“잘 해봅시다, 한 원장님. 서로가 서로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관계가 되면 그보다 좋은 일이 또 있겠습니까. 안 그래요?”

특별하지 않은 말이지만, 어째서인지 오싹한 한기가 느껴졌다.

한지호는 민시헌이라는 인물을 겉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본론을 전달한 민시헌은 한지호가 자신의 제의를 받아들일 거라 확신하는 눈치였다.

방송에서 백수오를 다루고, 정책 연구원 자문위원 자리를 얻는다.

아주 심플한 제의였다.

“다음 스케줄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야겠어요. 더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조만간 또 기회를 만들어 보지요.”

“오늘 뵙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의원님.”

“다음에 볼 때는 한 원장님이 아니라 한 위원님이라 부르고 싶네요.”

민시헌은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당 정책 연구원의 보건 자문위원이 되라는 뜻이었다.

한지호는 먼저 방문을 열고 나가는 민시헌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쉽게 단정지을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본능이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함부로 제의를 받아들여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거물 국회의원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여러모로 난감한 상황이 돼 버렸다.

“백수오라, 백수오.”

한지호는 민시헌에 대해 파고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하필이면 백수오를 거론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수수께끼는 거기서부터 풀릴 것 같았다.

본의 아니게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이며 뜻밖의 청탁을 받은 한지호는 오금희로 마음을 다스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거물의 청탁을 받을 위치에 올라 있었다.

여기서부터 한 발만 잘 못 내딛으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반짝 인기를 얻었다가 추락한 스타들이 어디 한 둘인가.

한지호는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일 작정이었다.

민시헌 같은 거물이 달콤한 제안을 했다고 흥분해서 휩쓸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어차피 모든 것은 기브 엔 테이크가 기본이 되는 비즈니스일 뿐이다.

민시헌이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으려 하는지 파악하는 게 급선무다.

그가 내보이지 않은 진짜 속내를 알아야 청탁을 들어주든 말든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프라이빗 라운지의 밀실에 혼자 남은 한지호의 눈빛이 예리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