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81화 (81/255)

# 81

9장, 천사의 쉼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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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지은이 토끼 눈을 떴다.

민시헌 의원의 보좌관에게 명함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란 것이다.

원래도 큰 눈을 동그랗게 뜬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 없었다.

한지호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목요일 진료 끝나고 만날 것 같아. 내가 여의도로 갈 수도 있고, 그쪽에서 새로운 장소를 정할 수도 있고.”

“대체 무슨 일이지? 잘 모르지만 민시헌 의원님이면 이름도 많이 들어보고, 한류 행사에도 참석했었던 거 같은데.”

“정치권 최고의 거물 중 한 명이지.”

“오빠가 진짜 유명해지긴 했나보다. 그치?”

“그런가?”

“그러니까 국회의원도 오빠를 따로 보려고 하는 거잖아. 너무 유명해지면 안 되는데…….”

“왜? 안 될 건 또 뭐야?”

“오빠가 나보다 더 유명해지면 도망 갈까봐. 헤헤.”

장난스럽게 말을 하고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웃는 이지은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오직 한지호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한지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귀여운 짓을 할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는 게 둘 사이의 애정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한지호와 이지은은 이태원 경리단길의 작은 레스토랑 구석에 앉아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경리단길 메인 거리가 아닌, 외진 골목에 자리한 조용한 멕시칸 레스토랑이었다.

그래도 시선을 끌 수 있기에 얼굴 아래를 거의 다 가리는 목 폴라를 입고, 모자를 썼다.

다행히 주위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은 없었다.

“새 앨범은 언제 나와?”

한지호가 테이블 위에 놓인 타코를 손에 집으며 질문을 던졌다.

한동안 휴식기를 갖고 있는 이지은이지만 곧 앨범 활동을 재개해야 한다.

그녀는 활동을 시작하면 대한민국 전체는 물론이고 일본과 중국, 동남아를 떨어 울리는 한류 스타다.

수많은 아이돌 그룹의 홍수 속에서 여자 솔로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으니 연예계에서의 영향력은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다.

한지호는 이제 이지은과의 일상적인 데이트에 익숙해졌지만, 눈앞에 앉아있는 귀여운 여성이 걸어다니는 중소기업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건강 백서, 진짜! 가짜!>를 통해 유명세를 얻고 원화 한의원이라는 성을 잘 키워가고 있어도 객관적으로 이지은의 브랜드 네임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다.

물론 둘은 서로의 이름값이나 영향력을 크게 따지지 않았다.

이지은은 한지호가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전부터 마음을 표현했고, 한지호 역시 그녀의 인기 때문에 연애를 시작한 건 아니었다.

“음… 아마 다음 달부터는 좀 바빠질 거 같아. 연말이 되니까 방송사 가요제 준비도 해야 하구. 새 앨범은 아마 내년 초쯤 나올 걸?”

“맞다, 연말에 방송사 시상식이 있었지.”

“올해도 한 곳에서는 대상을 받아야 할 텐데.”

“받을 거야. 저번 앨범도 대박 났었잖아?”

“그래도 갈수록 쟁쟁한 경쟁자들이 많이 생겨서 또 몰라. 방송국에서도 대상을 여러 팀에게 나눠주려고 그래.”

“상보다는 실제 앨범과 음원 판매량이 더 중요하잖아. 너무 연연하지 말고, 잘 준비해.”

한지호는 이지은을 달랬다.

그녀는 방송 3사의 음악대상을 욕심내고 있었다.

작년에 처음으로 대상을 받았었기 때문에 올해도 놓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럴 때 보면 이지은이 괜히 여자 솔로 가수의 최고봉에 오른 게 아니었다.

그만한 열정과 욕심, 승부욕이 있기에 험하고 독한 연예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마냥 귀엽게 보인다고 해서 어리고 약한 여자라고 판단하면 큰 오산이다.

어떤 면에서는 한지호보다 더 다양한 산전수전을 겪었는지도 모른다.

둘은 달콤한 데이트를 즐기면서도 서로에게 자극을 주고 있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기대거나 어리광을 피우는 사이와는 달랐다.

각자의 영역에서 존경할 부분이 있다는 점을 알기에 배울 점이 많았다.

한지호는 늘 발랄한 모습으로 힘을 주는 7살 어린 이지은에게서 항상 긍정적인 자세와 은근한 독기를 배웠다.

연예계의 최고 스타와 한의학계의 떠오르는 스타.

수면 아래에서 이뤄지고 있는 둘의 연애는 좋은 기운을 뿜어내며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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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진료가 끝났다.

한지호가 이끄는 원화 한의원은 문전성시(門前成市)라는 말의 표본이 되고 있었다.

100% 예약제를 실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 대기실이 사람들로 가득찼다.

그만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상담을 받길 희망했고, 값비싼 진료비에도 겁을 먹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가는 경우가 늘어났다.

모든 게 <건강백서, 진짜! 가짜!>의 힘만은 아니었다.

지상파 방송국의 TV 프로그램이 얼마나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는지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누구도 주시하지 않았던 방송을 화제의 프로그램으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한지호였다.

그렇기에 건강백서와 한지호는 서로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아 윈윈하는 관계였다.

게다가 방송으로 유명세를 얻었어도 실제 치료가 미덥지 못하면 금방 입소문이 돈다.

원화 한의원처럼 까다로운 예약제의 VIP 전문 병원은 더더욱 구설수에 오르기 쉬웠다.

그러나 한지호는 찾아온 모든 환자를 성의있게 진료했고, 여러 불평불만을 정면으로 돌파했다.

다이어트 한약 방송을 보고 원화 한의원을 찾은 강남 사모님들은 확실히 다른 효과에 만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주부들 사이의 입소문은 다른 어떤 광고보다 더 빠르고 확실하게 퍼진다.

빠지지 않는 살 때문에 고민하던 강남 사모님들을 시작으로 갖가지 건강 문제를 가진 상류층 주부들이 원화 한의원에 모인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주부들이 움직이면 그녀들의 남편도 덩달아 움직일 수밖에 없다.

바깥일에 바쁜 남편 보약, 허약해진 시부모님과 친정 부모님 진료 등 강남 사모님들이 동원할 수 있는 인맥은 끝이 없어 보였다.

처음부터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다이어트 한약 방송으로 강남 사모님들을 공략하게 된 한지호는 상류층 인맥의 원천을 손에 넣은 셈이었다.

“오늘도 다들 수고 많았어요.”

하얀 가운을 벗고, 제법 두꺼운 코트를 걸치고 나온 한지호가 직원들을 격려했다.

연말이 다가오며 날씨가 눈에 띄게 추워졌다.

곧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될 것 같았다.

한지호는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 직원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특별한 일이 없었습니까?”

“네, 원장님. 늘 그렇듯이 무척 바빴지만 별다른 컴플레인은 없었어요.”

코디네이터 정주은이 다른 직원들을 대신해 대답했다.

가장 먼저 한지호에 의해 발탁된 그녀는 세 명의 코디들 사이에서 리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개원 이후 새로운 코디네이터가 영입 됐고, 안내데스크에도 인력이 충원됐다.

한지호는 새로 뽑힌 직원들을 쳐다봤지만 달리 할 말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원화 한의원의 업무 스타일에 적응하느라 아직까지는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대신 사무장 박우식이 입을 열었다.

“전에 지시를 내리신 노인, 취약 계층 특별 진료 말입니다.”

“네, 검토해보셨나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완전 무료 진료는 불법이지만, 취약 계층과 노인을 대상으로 우선 접수를 받아 최소한의 진료비만 받고 진료하는 건 법적으로 제제의 근거가 없습니다. 대신 몇 천 원 수준의 최소 진료비도 부담스럽지 않게 쌀과 생필품 등 사은품을 넉넉히 돌려드리면 될 것 같습니다.”

“좋은 소식이네요. 강남구청 반응은요?”

“실무자가 아주 반기고 있습니다. 강남의 수많은 병원 중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제대로 실행하는 곳이 없다고 하면서, 우리가 앞장서면 강남구청 이미지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했습니다.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돕겠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럼 정비를 마치고 가능한 빨리 시작하죠.”

“네. 실무 준비에 들어가겠습니다.”

한지호는 얼마전부터 무료 진료를 추진하고 있었다.

초고가의 진료비와 약재비를 자랑하는 VIP 전문 한의원이라는 시스템이 평범한 사람들의 불만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터넷 홈페이지나 커뮤니티 등에서는 원화 한의원의 VIP 정책을 비난하는 글들이 심심찮게 올라왔다.

그런 불만을 누그러트리고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무료 진료라는 카드가 필요했다.

완벽한 무료 진료는 힘들지만, 구청이나 복지 센터의 도움을 받아 노인층과 취약 계층을 우선적으로 접수해서 최소 의료비로 진료를 해주는 건 가능해졌다.

거기에 더해 넉넉한 생필품 등 사은품을 주면 강남 병원의 사회 환원 활동으로 손색이 없어지는 것이다.

하루 수익이 엄청난 원화 한의원에서 매달 의료 봉사를 한다는 게 알려지면 VIP 시스템으로 인한 불만도 한층 잠잠해질 것이 분명했다.

한지호는 공교롭게도 사회 환원과 자선 봉사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있었다.

원화 재단을 세우고 천사원을 재건립해 절세 효과를 누리게 됐고, 의료 봉사로 한의원과 자신의 브랜드 이미지를 재고하게 될 것 같았다.

마치 처음부터 두 효과를 노린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어쨌거나 좋은 일을 하면서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린다는데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박우식과 의료 봉사 이야기를 마친 한지호는 활짝 웃으며 직원들을 돌아봤다.

“얼른 퇴근들 해요. 난 여의도에서 저녁 미팅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네, 원장님.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원장님!”

사무장 박우식과 안내데스크의 직원 두 명, 세 명의 코디네이터와 간호사 둘이 동시에 인사를 했다.

직원이라기보다는 식구라고 부르는 게 더 편한 사람들의 인사를 받고 나온 한지호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탔다.

김해수를 치료해준 대가로 받은 검은색 아우디 A5는 그에게 엄청난 희열을 선물해준 첫 애마였다.

하지만 수입이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된 지금, 한지호는 얼마든지 더 좋은 차를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당장 차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샴페인은 아껴 뒀다가 제대로 터트릴 때 더욱 달콤할 것이다.

“얼른 가야 안 늦겠다.”

시계를 본 한지호는 서둘러 시동을 걸었다.

국회의원 민시헌과의 비밀스러운 약속에 지각을 할 수는 없다.

부우우웅-

그의 애마가 주차장을 빠져나와 여의도로 향하는 길목에 올라섰다.

민시헌은 과연 무슨 이유로 보좌관을 보내 한지호와 약속을 잡은 것일까.

의문은 머지않아 풀릴 것이다.

핸들을 잡고 운전을 하는 한지호는 호기심만큼이나 큰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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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그냥 정장도 아닌 턱시도를 차려 입은 중년 신사가 허리를 숙이며 물어왔다.

한지호는 낯선 분위기에 먼저 주위를 둘러봤다.

여의도 인근 한강 변에 새로 지어진 초고층 호텔 내부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힐튼 호텔은 여러 개의 산하 브랜드를 두고 있다.

그중에서도 최고에 해당하는 호텔 브랜드에만 ‘콘래드’라는 창업자의 이름을 부여한다.

몇 년 전 한강 옆에 들어선 여의도 콘래드 호텔은 어느새 서울의 중심 호텔로 부상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도 선택받은 회원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바로 프라이빗 라운지(private lounge)였다.

프라이빗 라운지의 존재 유무는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호텔에서 자체적인 기준으로 프라이빗 카드를 발행해준 소수의 회원들만 라운지의 존재를 알고 있다.

로비의 엘리베이터나 호텔 안내도에는 나오지 않는 비밀스러운 공간.

정치인이나 재벌들, 연예인들에게 있어 이러한 공간은 마음 편한 안식처다.

하늘 위의 높은 세상, 천외천(天外天)에서 노는 사람들의 쉼터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스 신전을 본뜬 입구가 시선을 압도했고, 턱시도를 빼입은 중년 신사들이 격조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럭셔리의 끝을 달리는 인테리어가 펼쳐지고, 저마다 은밀하고 넓은 방에서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모임을 가질 수 있다.

제공되는 음료와 주류, 음식은 모두 최고의 소믈리에와 쉐프들의 손을 거친다.

따로 비용을 청구하지도 않는다.

프라이빗 라운지의 연 회비만 1억 원이 넘고, 최상류층의 프라이빗 멤버들이 콘래드 호텔에서 쓰는 돈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물론 라운지 안에서 본 사람, 본 일은 철저하게 함구하는 게 불문율이다.

누군가 섣불리 입을 열면 프라이빗 라운지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다.

보안 유지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자신들의 비밀을 지키며 프라이빗 라운지의 룰을 따랐다.

한지호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라 할 수 있는 공간에 초대를 받은 것이다.

프라이빗 카드가 없음에도 초대를 받은 건 아주 예외적인 경우였다.

상대가 국회의원 민시헌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존함을…….”

“아, 한지호라고 합니다.”

프라이빗 라운지 입구와 안쪽을 둘러보던 한지호가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그러자 입구를 지키던 중년 신사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한지호는 민시헌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으로 한 발짝 내딛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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