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80화 (80/255)

# 80

9장, 천사의 쉼터 (1)

특별한 날이었다.

감개가 무량하다는 표현을 써도 과장이 아닐 것 같았다.

한지호는 먹먹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지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깔끔한 2층짜리 주택이 보였다.

부천의 호수마을에 위치한 2층짜리 단독 주택은 작지만 마당도 갖고 있었고, 낮은 담장과 대문 덕에 든든한 집이라는 느낌을 줬다.

대문에 붙은 현판과 우편함에는 사람 이름이 쓰여있지 않았다.

대신 천사원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곳이 바로 새로운 천사원인 것이다.

한지호는 원화 한의원을 개원하고 땀 흘려 번 돈으로 천사원을 재건했다.

예전에 황만금을 치료하고 받았던 1억 원의 절반인 5천만 원, 거기에 원화 한의원을 개원하고 번 돈을 더했다.

다행히 부천의 집값은 서울에 비해 그리 비싼 편이 아니었다.

호수마을은 새로 지은 단독 주택과 빌라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지하철역에서는 거리가 멀지만 주위에 학교도 있고, 생활 환경이 좋은 편에 속한다.

한지호는 저렴한 1금융권 은행 대출을 끼고 단독 주택을 구매해버렸다.

전세로 건물을 빌리면 언제 이사를 나가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이참에 사무장 박우식의 조언을 받아 원화 재단을 만들었다.

재단의 명의로 건물을 구입하고, 후원을 계속하는 건 절세에도 도움이 된다.

애초부터 세금을 아끼는 게 목적인 건 전혀 아니었다.

마음의 고향인 천사원을 다시 세우고, 다른 아이들도 자신과 같은 환경에서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무엇보다 어머니나 다름없는 마리아 수녀에게 보답을 하고픈 마음이 컸다.

그런데 박우식의 말에 의하면 재단을 세워 기부와 후원을 할 경우 합법적으로 엄청난 절세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좋은 일도 하고, 세금도 아끼고. 일석이조의 일인데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천사원에 입주하는 날, 이런저런 현실적인 득실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한지호는 자기 손으로 훨씬 좋은 모습의 천사원을 새로 세웠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있었다.

지방에 뿔뿔이 흩어졌던 아이들을 찾아 천사원 재건에 큰 공을 세운 조기운도 옆에서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리아 수녀와 아이들을 말할 것도 없었다.

늘 차분하고 온화한 마리아 수녀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고, 유초아도 그녀의 손을 붙잡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민우와 민기 형제, 그리고 광주와 고창에서 모진 고초를 겪은 지훈이는 만세를 부르며 방방 뛰었다.

“와아아-! 지호 형아, 정말 여기가 우리 집이야?”

“그럼. 이제부터 여기서 사는 거야. 예전처럼 수녀님이랑 다 같이.”

“이예! 신난다!”

막내인 민우가 소리를 질렀다.

사춘기에 접어든 민기와 지훈이도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들은 마당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 인테리어도 깔끔하게 손을 봤고, 가구와 집기도 새것으로 채워 넣었다.

마리아 수녀가 마음을 먹으면 다른 아이들을 몇 명 더 돌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충분할 정도의 환경이었다.

“지호야……. 정말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고맙다. 그리고 장하다.”

“수녀님이 절 이렇게 키워 주셨잖아요. 앞으로도 수녀님과 천사원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겠습니다.”

한지호의 말에 마리아 수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녀의 얼굴 위로 흘러내린 눈물 한 방울에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아마 한지호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을 것이다.

세상모르고 방긋방긋 잘 웃던 어린 한지호가 장성하여 새롭게 천사원을 세웠다.

이제 그의 그림자 아래에서 다른 아이들이 쉬어가며 성장할 수 있게 됐다.

마리아 수녀로서는 인생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기분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유초아도 붉어진 눈시울로 입술을 달싹였다.

“지호 오빠, 저도 열심히 해서 꼭 많은 사람들한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될게요. 오빠처럼요.”

“그래. 대학 가서도 계속 천사원에서 지내. 이왕 시작한 거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연극영화과에 합격해야 해.”

“꼭 그럴 거예요!”

유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모가 꽃피기 시작한 유초아는 대형 연예기획사의 명함을 받고도 남을 정도였다.

한지호는 유초아의 꿈을 뒤에서 밀어줄 생각이었다.

보통 국가나 자선 재단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는 성인이 머무를 수 없다.

20살이 되면 무조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평생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들이 성인이 됐다고 해서 딱히 뾰족한 수가 생길 리 없다.

그렇기에 거리로 내몰린 보육원 출신 아이들은 범죄의 유혹에 쉽게 노출되는 것이다.

부모 없이 자랐다고 해서 문제아가 되는 게 아니라 사회 구조가 문제아를 양산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한지호가 그렇게 거대한 문제를 책임질 수는 없었다.

다만 자신의 울타리 안에 들어온 사람들을 확실하게 보살피는 게 최선이다.

그는 천사원을 다시 세우면서 마음에 있던 가장 큰 짐을 덜었다.

마리아 수녀의 손을 꼭 붙잡은 한지호가 햇빛을 받고 있는 주택 건물을 쳐다봤다.

이곳에서 자란 자신이 지금 같은 모습으로 성장한 것처럼, 앞으로 더 많은 아이들이 환경을 극복하고 날개를 펼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전생의 규호가 울부짖었던 천하통일이라는 원대한 꿈은 아직 멀게 느껴진다.

한지호는 천하통일이라는 불명확한 미션에 인생을 던질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더 높은 세상으로 올라갈수록 성취하고 나눌 수 있는 게 많아진다는 건 확실히 깨달았다.

어쩌면 계속 높이 오르다보면 자연스레 규호가 말한 위치, 즉 천하를 아우르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참 좋은 날이다.”

한지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손끝에 느껴지는 마리아 수녀의 체온, 신이 나서 기뻐하는 아이들.

이렇게 소박하지만 따뜻한 풍경을 다시 보기 위해 열심히도 달려왔다.

이제 겨우 출발점을 벗어난 정도지만, 가슴을 가득 채운 뿌듯함이 그간의 노고를 넉넉히 보상해주는 것 같았다.

+++

“먼저 갑니다. 다들 고생했어요.”

한지호는 평소보다 일찍 정리를 마치고 병원에서 나섰다.

보통은 진료가 끝나도 마지막까지 남아서 스케줄을 정리하고, 그날의 환자들을 복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오늘은 이지은과 저녁 약속이 있기에 일찍 나온 것이다.

직원들의 인사를 받은 그는 1층 로비에 들어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에 내려가 약속 장소로 곧장 이동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검은색 정장을 빼입은 남자 한 명이 로비에 서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지 않은 걸 보니 역삼 M 타워 안의 다른 병원을 찾아온 것 같지도 않았다.

의문스러운 남자는 한지호가 한의원 밖으로 나오자 빠르게 다가왔다.

처음 봤을 때부터 경계심을 느낀 한지호는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있었다.

동시에 단전에 잠든 오금희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만약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언제든 대처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가 갑자기 허리를 꾸벅 숙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지호 원장님!”

극진한 태도로 인사를 한 남자가 검은색 자켓 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다름 아닌 빳빳한 명함 한 장이었다.

“누구시죠?”

한지호는 명함을 받지 않고 먼저 상대의 정체를 물었다.

그러자 정장을 입은 남자가 곧바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민시헌 의원실에서 나온 보좌관입니다.”

민시헌.

익숙한 이름이었다.

조금이라도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다.

야당의 정치인 중에서 차기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몇 안 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그제야 남자가 들고 있는 명함을 건네받았다.

명함은 국회의원 민시헌의 것이었다.

직통 연락처까지 적혀있는 것으로 봐서 아무데서나 뿌리는 명함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 오셨습니까?”

명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야당의 거물 정치인 보좌관이 한의원 앞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유가 무엇일까.

민시헌 의원이 진료를 받기 원한다면 한의원으로 연락을 해도 됐다.

어차피 VIP 전문 시스템이기 때문에 최대한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고 진료를 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젊은 보좌관은 한지호의 질문을 받고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원화 한의원에 찾아오기 전 미리 교육을 단단히 받은 모양이다.

“의원님께서 한지호 원장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외부에 알려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한의원에 전화를 주셨으면 은밀히 모실 수도 있었을 텐데…… 혹시 진료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솔직히 말씀드려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의원님께서 직접 지시를 내리셨고, 한지호 원장님을 꼭 만나 뵙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한지호는 날카로운 눈매로 보좌관을 바라봤다.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런 식의 접촉이 그리 낯선 것은 아니었다.

민시헌 정도의 거물 정치인이라면 재벌 총수도 마음대로 오라 가라 할 수 있다.

비록 야당 정치인이고, 아직 대선이 한참 남았지만 어쨌거나 후보군으로 분류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그런 민시헌 입장에서는 막 유명세를 얻기 시작한 젊은 한의사를 따로 부르는 게 대수롭지 않을 것이다.

잠시 고민한 한지호는 승낙 의사를 밝혔다.

거물 중에서도 손꼽히는 거물의 부름이다.

일단 만나보고 나서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보고 판단을 내리면 된다.

정치인과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권력의 중심부에서도 최고층에 위치한 인물과 대면하는 건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언제 어디로 찾아가면 되겠습니까?”

“의원님께서 한지호 원장님의 스케줄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라고 하셨습니다. 편한 시간을 말씀해주시면 의원님의 일정을 최대한 조절하시겠다고 전하셨습니다.”

보좌관의 말이 사실이라면 민시헌은 나름대로 예우를 갖춘 셈이다.

야당의 거물 국회의원은 하루가 48시간이라도 모자란 스케줄을 소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지호의 시간에 맞추겠다는 건 상당히 정성을 기울인다는 뜻이다.

“목요일 저녁은 어떻습니까? 진료가 끝나고 다른 일정이 없습니다.”

“잠시…… 네,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의원님께 전해드리고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스마트 폰으로 민시헌 의원의 일정을 체크한 보좌관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한지호는 그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네고 인사를 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 원장님.”

보좌관이 또 다시 꾸벅 허리를 숙였다.

유세를 다녀야 하는 국회의원 보좌관이라 그런지 다소 과한 예의가 몸에 배여 있는 것 같았다.

한지호는 민시헌 의원의 명함을 유심히 쳐다보며 엘리베이터에 탔다.

방송 프로그램 촬영과 원화 한의원 운영, 그리고 마창우라는 독특한 환자의 치료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만남을 앞두게 됐다.

그러나 미리부터 너무 머리를 쓰거나 계산기를 굴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뭐가 됐건 일단 부딪쳐보고 판단한다.

그에 한지호의 모토였다.

보좌관의 태도로 보아 야당의 거물 정치인 민시헌은 한지호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한지호는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자동차에 올랐다.

오랜만에 이지은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다른 모든 고민은 잠시 접어둬도 괜찮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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