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8장, 위험한 발판 (2)
한지호는 강하게 의사를 밝혔다.
소리를 지르거나 표정을 찡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음성과 또박또박한 말투에서 단호함이 여실히 느껴졌다.
마창우는 순간적으로 한지호의 기세에 밀린 것 같았다.
그 스스로도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주먹 세계의 전설로 군림해온 자신이 일개 한의사가 뿜어낸 기운에 위축되다니.
한지호는 여세를 몰아 마창우를 압박했다.
환자를 달래는 것도 진료 테크닉이지만, 강하게 몰아붙이는 것 역시 꼭 필요한 수법이다.
김해수를 만났을 때 자기 왼손을 스스로 내려쳤던 것도 넓은 의미에서 환자 압박이었다.
자의식이 강한 환자일수록 확실한 압박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저를 믿고 모든 것을 맡겨 주시겠습니까?”
생각할 시간을 길게 줄 필요는 없다.
앞뒤를 자른 한지호의 묵직한 질문이 마창우에게 꽂혔다.
이윽고 마창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뭐든 길게 고민하고 이리저리 재는 성격이 아니다.
대신 확실한 대가와 책임을 원했다.
“솔직히 말해 한 원장님이 아니면 다른 방법도 없습니다. 믿어 보겠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시죠.”
“아닙니다. 치료가 될 거라고 믿고 따르겠습니다.”
마창우가 다시금 날카로운 눈빛을 뽐내며 담담하게 말했다.
한지호는 그가 하려다 만 말이 어떤 내용일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믿고 치료를 맡기는 대신 확실한 효과가 없으면 각오를 하라는 말을 삼킨 게 분명했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다.
평창동의 황만금을 처음 만났을 때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VIP들은 함부로 몸을 맡기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사람을 쉽게 믿지 않고, 엄청난 보상을 약속하는 대신 엄중한 책임감을 요구한다.
한지호는 마창우의 눈빛에서 그런 의도를 읽고 선수를 쳤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00% 제 진료를 믿고 따라온다면 절대 후회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믿으려면 확실히 믿고, 찜찜하면 아예 안 믿는 게 낫다는 것이 이 바닥 룰입니다. 확실히 믿겠습니다.”
마창우의 말을 들은 한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는 주먹 세계의 단순한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목소리에 자신감을 가득 담아 진료 안내를 했다.
“옆에 있는 시술실에 들어가 잠시 대기하고 있으세요. 간호사가 안내를 해드릴 겁니다.”
“그럼 처방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실제로 느껴지는 통증은 심장의 화기가 쌓여 일어난 것이고, 그게 하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손가락 자리에서 느껴지는 건 간이 약해지며 몸의 기운이 허해졌기 때문입니다. 화기를 풀어 통증을 치료하고, 간을 보해 심리를 안정시켜 환상통을 사라지게 만들어야죠. 침술과 약재 처방을 병행하면서 특별히 뜸을 놓겠습니다.”
“뜸 말입니까?”
“네, 뜸.”
한지호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뜸 치료를 자주 하지 않는다.
웬만한 치료는 침술과 약재 처방으로 끝낸다.
하지만 마창우를 치료하는데 그가 알고 있는 특별한 뜸 시술이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마창우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한지호를 100% 신뢰하겠다고 자기 입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한 번 뱉은 말을 손바닥 뒤집듯 번복하는 건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다.
한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의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네, 원장님.”
“마창우 환자님 시술실로 모셔주세요.”
“네.”
곧이어 새하얀 간호사복을 입은 이해나가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지호는 침술과 뜸 치료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 시술실로 갈 예정이었다.
평창동의 회장님에 이어 특급 연예인들, 그러고도 모자라 이제는 마창우라는 주먹 세계의 전설까지 치료하게 됐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한의사 생활이었다.
물론 오나라의 주태와 주유의 아내 소교, 촉나라의 절세 명장 관우와 위나라의 조조까지 천태만상의 환자들을 만났던 전생과 비교하면 아직 멀었다.
그러나 한지호는 착실히 규호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에 못지않은 의원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침과 뜸 재료를 챙기는 한지호의 모습에서 29살의 어린 한의사가 아닌 절세고수의 풍모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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뜸은 쑥을 몸의 특정 부위에서 태우는 등의 방식으로 온열(溫熱)자극을 주는 치료 행위를 뜻한다.
그러나 요즘에는 꼭 쑥이 아니어도, 또 약재를 태우지 않아도 온열자극을 줄 수 있다면 뜸이라고 부른다.
가장 널리 알려진 방법은 역시 쑥을 환부에 올려 태우는 것이다.
뜸을 건조시킨 후 잘게 빻아서 어깨나 등에 올리고, 불을 붙여 열과 향으로 자극을 주는 치료법은 흔한 민간요법이다.
넓은 의미에서는 적외선 레이저로 치료를 하는 것도 뜸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약재는 쓰지 않지만, 뜨겁고 따뜻한 기운을 몸에 돌게 만드는 원리는 같기 때문이다.
얼핏 생각하면 한지호가 마창우에게 뜸을 놓겠다고 한 것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마창우의 통증은 심장에 화기(火氣)가 쌓인 게 원인이다.
그런데 뜸은 화기(火氣)의 일종인 온열자극을 이용하는 치료법이다.
불에 불을 더하는 형국이니 어울리는 치료법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한지호가 뜸이라는 카드를 꺼낸 게 아니었다.
평소에 잘 쓰지 않던 치료법을 들고 나온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마창우의 환상통은 실제 증상과 심리적 현상이 어우러지며 만들어진 복잡한 병이다.
단순히 심장의 화기만 풀어준다고, 또 약해진 간의 기운만 살린다고 해결 될 문제가 아니었다.
보다 고차원적이고 전체적인 시각에서의 접근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침술과 약재 처방 말고도 굳이 뜸이라는 치료법을 병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조 간호사님.”
“네, 원장님. 준비 됐습니다.”
원화 한의원을 열고 처음 시도하는 뜸이었다.
베테랑 간호사인 조민주가 시술실에서 한지호를 돕고 있었다.
이해나도 시술실 구석에 서있었다.
일부러 마창우의 진료 시간을 넉넉하게 잡았기에 다른 환자는 없었다.
이런 게 바로 100% 예약제로 운영되는 VIP 전문 시스템의 장점이다.
“마창우 환자님. 지금부터 어깨와 등 전체에 뜸을 놓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뜸인지 알면 안 되겠습니까?”
마창우는 상의를 벗고 시술용 침대에 엎드려있었다.
한지호는 자잘한 흉터로 가득한 그의 등을 내려보며 입을 열었다.
“마창우 환자님의 몸은 24시간 늘 긴장되어 있는 상태로 보입니다. 아마 직업적 특성과 관련이 있겠죠.”
그의 말에 엎드린 마창우가 살짝 움찔한 것 같았다.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다.
마창우는 주먹 세계의 전설이지만, 그만큼 많은 적을 만들었다.
언제 어디를 가도 상대편 조직에서 보낸 킬러가 갑자기 달려들지 않을까 경계해야 한다.
검찰과 정치권에 로비를 잘 해놓았지만, 방심하면 언제든 체포될 수 있다는 점도 큰 부담이었다.
그래서 항상 긴장감을 끌어안고 살 수밖에 없다.
조각처럼 단련된 몸과 흉기에 당한 상처 자국은 단단한 껍질이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마창우의 내부는 극도의 긴장으로 지쳐있는 상태다.
한지호는 뜸으로 온몸의 긴장을 완화시킬 작정이었다.
몸이 긴장을 풀고 부드러운 상태가 되어야 침술과 약재의 효능도 더 강해질 것이다.
대신 심장에 쌓인 화기를 자극하지 않도록 적절히 뜸의 온도를 조절하는 게 필수였다.
자칫하면 뜸의 온열자극으로 화기를 강화시켜 통증의 강도가 세질 수 있기 때문이다.
“힘을 빼세요. 여긴 한의원입니다. 마창우 환자님에게 위해를 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게… 워낙 본능적인 거라서 말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도와드리는 거죠. 지금부터 하나씩 뜸을 놓을 겁니다. 많이 뜨겁진 않겠지만 향이 무척 강할 겁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열기와 향을 받아들이세요.”
“알겠습니다.”
마창우는 몸을 엎드린 채 말 잘 듣는 학생처럼 순순히 대답했다.
자신의 몸을 무방비 상태로 맡긴 시점부터 환자는 의사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
한지호는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조민주가 먼저 마늘을 건네줬다.
뜸을 놓는데 마늘이라니, 다소 황당할 수 있지만 한의학에서 널리 쓰이는 방법이다.
약재를 바로 연소시키는 직접염은 너무 강한 온열자극을 줄 수밖에 없다.
심장의 화기를 조심해야 하기에 그보다 덜 뜨거운 방식인 간접염으로 뜸을 놓으려는 것이다.
피부 위에 마늘이나 생강, 또는 부자나 소금을 깐 후 약재를 올리고 연소를 시키는 방법을 간접염이라 한다.
마늘을 올린 한지호는 미리 정리해둔 뜸 약재를 받아 조심스레 쌓았다.
산약과 말린 감초를 빻았고, 한약재는 아니지만 광범위하게 쓰이는 허브도 추가했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비싸기로 악명 높은 약재인 사향을 약간 첨부한 것이다.
뜸은 팽팽한 긴장 상태로 혹사 당해온 마창우의 전신 근육을 풀고, 심리적 안정을 찾아주기 위한 장치다.
목표에 어울리는 약재를 배합해놓은 한지호는 가는 심지를 꽂고 불을 붙였다.
모든 부위에 뜸을 다 놓고 한 번에 불을 붙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향이 은은하게 퍼지도록 차례대로 뜸을 놓을 생각이었다.
“어떻습니까? 많이 뜨겁진 않죠?”
“하나도 안 뜨겁습니다. 따뜻하고 좋습니다.”
“향은 어때요?”
“흐으음……. 무척 진하면서도 잠이 솔솔 오는 신기한 향입니다. 거 참.”
마창우가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았다.
이제 겨우 첫 번째 뜸을 놓았을 뿐인데 사향과 허브, 약재가 섞인 묘한 향이 시술실을 채웠다.
조민주와 이해나도 독특한 향에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무척 진하다고 할 수밖에 없지만, 거부감이 들지 않는 기묘한 냄새였다.
한지호는 뜸을 오래 붙여놓지 않았다.
마창우의 몸 안으로 열이 과하게 주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는 금방 첫 번째 뜸에 붙은 불을 껐다.
이어서 반대편 어깨에 두 번째 뜸을 놓았고, 척추기립근을 따라 잔근육과 흉터가 자글자글한 등판에서 하나씩 뜸을 놓았다.
뜸이 놓일수록 향이 더욱 짙어졌다.
앞선 뜸의 향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사향과 허브, 약재의 냄새가 점점 더해졌기 때문이다.
한지호가 세심하게 안배한 뜸이 마창우의 전신을 부드럽게 풀어 놓았다.
경직된 근육이 이완되는 건 육안으로도 확인이 가능하다.
엎드린 마창우는 어울리지 않게 얕은 숨소리만 내고 있었다.
완전히 잠이 든 건 아니지만, 노곤하면서도 몽롱한 상태가 된 것 같았다.
이만하면 뜸의 효과는 충분히 봤다.
한지호는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마창우의 어깨와 등을 닦았다.
뜸의 효능으로 긴장이 풀린 상태에서 바로 침을 놓으려는 것이다.
처억.
한지호가 손을 내밀자 조민주가 수건을 받고, 대신 침을 전해줬다.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호흡이 척척 맞았다.
같이 개원을 시작한 창립 멤버로 벌써 두 달이 넘게 지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지호는 낮은 목소리로 침술 치료를 시작한다는 걸 알렸다.
말없이 침을 꽂으면 마창우가 놀랄 수 있고, 놀람은 곧 근육을 경직시켜 다시 긴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목 뒤부터 날개 뼈 부근의 혈도, 그리고 양 팔에 침을 놓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마창우가 다소 잠긴 음성으로 대답했다.
뜸과 향의 효과로 반수면 상태에 빠진 게 확실했다.
한지호는 목 뒤의 민감한 혈도에 침을 꽂았다.
한 번 침을 놓기 시작한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두 눈을 감고도 완벽한 혈자리를 찾아 적당한 깊이로 침을 놓을 수 있다.
심장에 차오른 화기를 억누르는 혈도, 그리고 스스로 손가락을 자른 후 급격이 위축된 간의 기운을 상승시키는 혈도.
모두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규호의 기억과 의술을 흡수하며 경험을 쌓아온 한지호는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의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는 계획대로 모든 혈도에 다 침을 놓았다.
통각과 연결된 혈도도 있어 보통 사람이라면 신음을 흘릴 법 했다.
하지만 마창우는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고 담담하게 엎드려 침을 맞았다.
등판에 자욱한 칼자국 흉터를 보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말이 쉽지 자기 손가락을 직접 자른다는 건 여간해선 불가능하다.
그런 사고를 친 사람이니 침을 맞으며 느껴지는 통증은 간지러울 것이다.
“5분 정도 지나면 침을 뽑겠습니다.”
한지호의 말에 마창우가 시술용 침대에 고개를 묻은 채 질문을 던져왔다.
“한 원장님, 내 믿음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이 바닥에서는 아무나 얻을 수 없는 겁니다.”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환자들이 의사에게 주는 신뢰는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잘린 손가락 자리에서 느껴지는 통증, 이걸 고쳐주기만 하면 내가 한 원장님에게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줄 겁니다.”
한지호는 아직 치료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애초에 마창우는 코디네이터와의 상담을 거부하며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다고 말했었다.
전국구 조직의 부두목인 마창우가 말하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는 대체 무엇일까.
한지호는 호기심을 억누르고 침을 뽑을 시간만 체크했다.
완치를 시키기 전까지는 오직 치료에만 집중하는 것이 그의 원칙이다.
그러나 황금 알을 낳는 거위라는 표현은 오래도록 한지호의 머릿속을 맴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