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78화 (78/255)

# 78

8장, 위험한 발판 (1)

“지호 오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이지은의 목소리가 한지호의 상념을 깨웠다.

연애를 시작하고, 몇 번의 데이트를 한 두 사람은 서로를 편하게 부르기로 했다.

존중하는 마음은 그대로 가져가면서 좀 더 가깝게 다가서기 위함이었다.

한지호와 이지은은 자동차 운전석과 조수석에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데이트를 즐기기엔 자동차보다 좋은 장소가 없다.

그런데 한지호가 한동안 말이 없어졌고, 조용히 커피 향을 맡던 이지은이 새삼 그를 부른 것이다.

“아, 미안. 잠시 다른 생각을 했네.”

“옆에 나를 놔두고 딴 생각을 해? 무슨 생각이었는지 얼른 말해줘!”

이지은이 궁금하다는 듯 큰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한지호를 빤히 쳐다봤다.

이럴 때 무슨 말이든 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을까.

한지호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에 어려운 환자를 보게 됐거든. 요즘 틈만 나면 그 생각을 하느라고.”

“어떤 환자인데 그래요? 오빠가 이렇게 고민할 정도면 심각한 병인 거죠?”

이지은은 한지호를 대단한 명의로 여겼다.

단순히 TV에 나와 한의학적 지식으로 인기를 끌기 때문은 아니다.

그전부터 김해수의 난치병을 치료했다는 소문을 들었고, 이지은의 꽉 잠긴 성대를 고작 일주일 만에 풀어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이지은의 눈동자를 마주보고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마치 선생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유치원 어린이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귀여운 강아지를 어루만지듯 이지은의 머리칼과 볼을 쓰다듬은 한지호가 입을 열었다.

“좀 무서운 이야기인데 들을 수 있겠어?”

“연예계 이야기가 훨씬 더 무섭거든!”

“알았어, 알았어. 손가락이 잘린 환자인데… 잘린 손가락이 아직 남아있는 것처럼 계속 통증을 느끼고 있어.”

“어머, 정말요?”

깜짝 놀랐는지 이지은이 자신도 모르게 다시 존댓말을 사용했다.

한지호는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크고 동그란 이지은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첫 진료에서부터 분위기가 아주 독특한 사람이었어. 상담도 제대로 받지 않았고. 그런데 알고 보니까…….”

“알고 보니까?”

“엄청 유명한 조폭 부두목이라고 하네. 그저 그런 깡패가 아니라 전국적인 조직의 실세라고 해. 검찰에서도 예의주시하고 있는.”

“요즘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 영화에나 나오는 건 줄 알았는데.”

“나도 그런 줄 알았지. 물론 예전처럼 대놓고 활동하는 건 아니고, 회사를 차려서 건설이나 각종 이권에 개입하는 것 같아. 아무튼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환자이긴 해.”

한지호는 마창우에 대해 털어놓았다.

환자에 대한 정보는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 게 기본적인 원칙이다.

그러나 이지은은 하나뿐인 여자친구다.

한의사와 의사도 집에 들어가면 와이프에게 환자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고, 판사와 검사도 가족들에게 사건에 대해 넋두리를 풀 수 있다.

공식적으로 마창우에 대해 언급한 게 아니기에 크게 문제 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오빠, 그런 환자를 진료해도 괜찮은 거 맞아? 난 괜히 찜찜해.”

“그래도 환자를 가려 받을 순 없잖아. 어쨌든 나한테 온 환자면 책임지고 치료를 해 봐야지.”

사실 이지은이 염려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한지호는 이미 마창우를 치료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물론 전국적인 조폭 부두목인 마창우가 좋은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를 치료해주는 게 사회적으로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하지만 한지호는 신이 아니다.

원인불명의 통증에서 해방된 마창우가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는 그가 예측 할 수 없는 영역이다.

당장 통증을 치료해주는 것과 마창우의 범죄 행위 사이에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환자의 출신이나 배경이 어떻든 최선을 다해 치료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마창우를 치료하면 웬만한 연예인이나 재벌을 치료한 것 이상의 대가를 받을 수 있다.

한지호는 팀 DK의 오대경으로부터 마창우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첫 진료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고, 바로 오대경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들었다.

오대경은 마창우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깜짝 놀라며 자세한 설명을 해줬다.

어둠의 세계에서 잔뼈가 굵은 오대경의 말에 의하면 마창우는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한다.

검찰이나 정치권에서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고, 주먹 세계를 평정한 후 다양한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거물이었다.

삼십대 중반의 나이에 거대 조직의 부두목으로 군림하는 건 대한민국 조폭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다.

그런 인물이 한지호의 소문을 듣고 직접 원화 한의원으로 찾아왔던 것이다.

TV 프로그램을 통해, 또 입소문을 통해 한지호의 이름이 상류층 전반에 퍼져 있다는 뜻이었다.

일반적인 부자나 연예인이 아닌 조폭계의 거물까지 직접 찾아올 정도라면 알 만한 사람은 전부 한지호의 이름을 들어봤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아무튼 그로인해 한지호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었다.

두 번째 진료에서는 제대로 된 치료법을 제시해야 한다.

그는 마창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제 아무리 전설적인 두목이라고 해도 현실 세계의 일이다.

오금희를 통해 초현실적 능력을 얻은 한지호가 두려워 할 대상은 없다.

다만 자신만만하게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을 했으니 한의사로서 자존심이 걸린 문제가 됐다.

더구나 마창우의 통증을 없애주면 부르는 대로 치료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더 신경이 쓰이고 욕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이지은은 한지호의 고민을 이해하는지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힘들겠다… 우리 지호 오빠. 까다로운 환자에 까다로운 증상이라서. 그래도 힘내요, 알겠지?”

별 것 아닌 말 한 마디에 불과하지만, 여자친구가 건네는 위로는 남자에게 무엇보다 더 큰 힘이 되기도 한다.

한지호는 짬을 내어서 자동차 데이트를 하길 잘했다고 느꼈다.

마창우에 대한 이야기를 이지은에게 털어 놓은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왜 여자들이 문제 해결이 아니라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는지 알 것 같았다.

“멋지게 치료할 테니까 두고 봐. 이제 들어가야 되지?”

“응. 요즘 매니저 오빠가 눈치를 챘는지 자꾸 귀가 시간을 체크 해.”

“얼른 들어가. 자기 전에 전화하고.”

한지호가 말을 마치려는 찰나, 입술에서 이질적인 감촉이 느껴졌다.

따뜻한 느낌과 달콤한 향이 입술을 가득 채우고 멀어졌다.

가볍게 기습 키스를 한 이지은이 활짝 웃으며 자동차 문을 열고 내렸다.

“조심히 들어가, 오빠. 커피 잘 마셨어!”

7살이나 어리지만, 아니 그래서 더 여우처럼 귀여운 이지은의 애교에 한지호는 일상의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곧 다시 마창우의 잘린 손가락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지겠지만, 잠시나마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었다.

이래서 다들 연애를 하는 모양이지, 라고 혼잣말을 내뱉은 한지호가 운전대를 잡고 엑셀을 밟았다.

그는 밤이 늦도록 한의학 서적을 뒤적이고, 또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마창우와 비슷한 케이스를 찾아볼 계획이었다.

이지은 덕에 피로를 잊고 밤 새 한의사로서 연구에 매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원장님, 마창우 환자님 들어가셔요.”

조민주의 목소리가 울렸다.

한지호는 깊은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진료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곧이어 조민주가 직접 진료실 문을 열었다.

그 뒤로 비현실적인 어깨 넓이를 자랑하는 남자, 마창우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오셨군요.”

한지호는 웃으며 마창우를 맞이했다.

그를 안내해준 조민주는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베테랑 간호사라고 해도 마창우처럼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환자는 어려운 법이다.

반면 한지호는 오래도록 알고 지낸 친구처럼 그를 편안하게 대했다.

한지호의 태도에 마창우가 이채를 띌 정도였다.

“다시 보니 더 반갑습니다, 한 원장님.”

마창우는 첫 진료 때처럼 정중한 말투를 사용했다.

전국적인 조직의 부두목이라고 건방진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있어도 눈매가 워낙 날카롭고 덩치가 크다보니 자연스레 위압적인 기운을 뿜어낼 따름이었다.

“벌써 일주일이 지났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한지호와 마창우는 서로를 쳐다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 주 첫 진료에서 한지호는 마창우의 증상을 고칠 수 있다고 말했다.

대신 본격적인 치료에 들어가기 앞서 일주일의 시간을 요청했다.

일주일 동안 준비를 철저히 한 후 치료에 돌입하겠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한지호 외에는 대안이 없는 마창우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황만금이나 김해수의 케이스처럼 최고의 의료진을 두루 거친 상태였다.

그러고도 답이 안 나와서 소문을 듣고 한지호에게 찾아온 것이다.

이를테면 한지호가 마창우의 마지막 동아줄인 셈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마창우가 유독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약속한 일주일이 지났고, 마창우는 다시 진료실에 앉아있다.

한지호는 그가 만족할 답을 줘야 한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가지고도 아무런 해법을 찾지 못했다면 한의사로서 실격일 것이다.

“손을 보여주시죠.”

한지호의 말에 마창우가 얌전히 손을 내밀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칼에 베인 듯 울퉁불퉁한 흉터 자국이 선명하다.

한지호는 마창우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의 손길에 마창우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한지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손끝으로 마창우의 환부를 어루만졌다.

손끝에 느끼지는 감각이 생생했다.

칼에 베여서 생긴 상처 단면은 거칠고 울퉁불퉁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공사 현장에서 기계 같은 것에 손가락이 잘리는 편이 낫다.

무식하게 칼로 손가락을 자르면 그 과정에서 혈관과 신경, 피부 조직 등이 엉망으로 엉켜버린다.

빨리 봉합 수술을 받아도 회복이 힘들고, 마창우처럼 아예 손가락을 잃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최악의 경우 여러 후유증이 발생하는데 마창우의 케이스는 무척 독특한 편에 속한다.

합병증으로 다른 손가락이 썩는 것도 아니고, 이미 잘린 검지가 있던 자리에서 계속 통증이 느껴지는 건 원인을 찾기 힘들다.

한지호는 마창우의 눈동자를 마주봤다.

전국구 조폭 부두목의 날카로운 눈을 보고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한지호는 안쓰럽다는 눈길로 마창우의 사나운 시선을 감싸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마창우는 주먹 세계의 전설이나 검찰도 못 건드리는 권력이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의 환자일 뿐이다.

“마창우 환자님. 이 상처, 칼에 베인 거 맞습니까?”

“맞습니다.”

“직접 자르신 겁니까, 아니면 타인에 의해 손상된 것입니까?”

한지호는 단도직입적으로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그의 노골적인 물음에 마창우가 말없이 눈을 부라렸다.

과연 이게 치료에 있어서 중요한 질문이냐는 뜻이다.

한지호는 물러서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잘린 검지 부위에서 계속 통증이 느껴지는 건 심리적인 요인도 있습니다. 어떤 과정에서 손가락이 절단됐는지 알아야 효과적인 심리 치료를 병행할 수 있겠죠. 그래서 여쭤보는 겁니다.”

누가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수박에 없는 합리적인 대답이었다.

다행히 마창우는 꽉 막힌 사람은 아니었다.

한지호의 말에 그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내 손으로 직접 자른 겁니다.”

“그렇군요.”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닙니다. 칼에 베인 상처란 걸 알아봤으니 한 원장님은 내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이미 짐작하고 있을 겁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모시는 회장님께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고, 직접 오른손 둘 째 손가락을 자르는 걸로 충성을 표시했습니다. 그 이후로 계속…… 이 지겨운 통증이 나를 괴롭힐 줄은 몰랐습니다만.”

마창우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자기 손가락을 스스로 자르다니.

이제는 조폭 영화에서도 다루지 않을 사건이다.

그러나 엄연히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고, 당사자인 마창우가 눈앞에 앉아있다.

한지호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현실은 아주 협소하다.

자기 주위의 일만 보고 현실의 경계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믿기 힘든 일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발생한다.

한지호는 주먹 세계의 현실을 인정하고 치료에 집중했다.

그는 마창우를 향해 앞으로의 치료 계획을 밝혔다.

“대학 병원도 들렀다고 하셨죠? 현대 의학으로는 이런 통증의 원인을 밝혀낼 수 없기에 무작정 심리적 치료를 권했을 겁니다. 그래서 정신과로 보냈을 테고, 당연히 즉각적인 효과를 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우울증 약이나 주는 돌팔이에게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현대 의학의 처방이 아주 틀린 건 아닙니다. 심리적인 치료와 실제 치료를 병행해야 합니다.”

“한 원장님은 방법이 있습니까?”

마창우의 물음에 한지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방법이 없었다면 이토록 길게 이야기를 끌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일주일 동안 그는 답을 찾아냈다.

“오행 중 불의 기운과 연결 된 심장, 심장을 다스리는 처방을 내릴 겁니다. 또한 급격히 약화 된 간의 기운을 북돋아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 심장과 간에 문제라도 있다는 겁니까? 얼마 전에 검사를 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마창우의 언성이 높아졌다.

한지호가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가 목소리를 높이자 주먹 세계의 전설답게 흉폭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하지만 한지호는 그보다 더 단호한 음성으로 마창우의 기세를 받아쳤다.

“자기 손으로 직접 손가락을 자르는 건 미친 짓입니다. 그러고도 멀쩡하면 사람이 아니지요.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지만, 마창우 환자님은 스스로의 손가락을 자르며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심장의 화기가 비정상적으로 날뛰고 간이 쪼그라들어 잘린 손가락에서 환상통을 느끼는 겁니다. 의사를 믿을 수 없다면 지금 당장 나가도 됩니다. 하지만 나를 믿지 않는다면 잘린 손가락의 통증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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