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4장, 수단과 방법 (1)
금요일도 역시 많은 환자들이 원화 한의원을 찾았다.
2화 방송이 나간 지 딱 1주일이 되는 날이었고, 오늘 저녁에는 3화가 방영 될 예정이었다.
제작진의 기대대로 3화 시청률이 대폭 오를지 아직은 알 수 없다.
한지호는 아침부터 꽉 짜인 진료 스케줄을 소화하는데 집중했다.
원래는 상담을 거쳐 실제 진료로 넘어오는 환자들의 수가 많지 않았고. 하루 일과를 여유롭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주부터는 상담 예약이 일주일 넘게 밀린 것은 물론이고, 진료를 받는 환자도 폭증했다.
한지호는 점심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쉴 틈 없이 진맥을 하고, 약을 짓고, 침을 놓아야 했다.
소소한 침술 시술료로 먹고사는 한의원이 아니라 최소 수백만 원의 비싼 진료비를 받는 VIP 전문 한의원임에도 문전성시를 이룬 것이다.
방송이나 입소문을 통해 찾아온 환자들이 한지호의 진료에 만족해서 두 번, 세 번 찾아오게 되면 병원은 더 바빠질 것 같았다.
경제적으로는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현상이다.
원화 한의원의 재무를 관리하는 사무장 박우식은 매일 매일 기록적으로 경신되는 매출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생각보다 일찍 한지호가 유명해지고 한의원이 자리를 잡으면서 신경 써야 할 문제도 늘어났다.
우선 인력 증원이 필요해졌다.
두 명의 코디네이터가 몰려드는 상담을 전부 감당하긴 힘들었다.
안내데스크에도 사람이 더 필요했다.
간호사는 아직까지 조민주와 이해나 두 명으로 충분한 것 같았다.
상담은 전화를 걸어 예약을 하면 다 받아주는데 반해 진료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숫자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새로운 인력 충원 문제를 박우식에게 일임했다.
일선 직원들을 채용하고 관리하는 문제는 사무장이 컨트롤해도 된다.
당장 필요한 안내 직원 한 명, 코디네이터 두 명을 더 충원하라고 지시를 내려놓았다.
해결해야 할 문제는 인력 보충만이 아니었다.
원화 한의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지속적으로 제기되던 문제가 있다.
VIP 전문이라는 영업 방침에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원화 한의원 홈페이지와 인터넷 사이트, 한지호를 다룬 뉴스 기사를 찾아다니며 악플을 다는 악플러들이 제법 많이 생겼다.
악플러들 중에는 분명 다이어트 한약 고발로 타격을 입은 한약방과 한의원 종사자들도 포함 돼 있을 것이다.
하지만 쌓여가는 컴플레인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원화 한의원의 고가 정책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도 있고, 그들의 목소리가 커지면 보건 당국에서도 VIP 전문이라는 점을 파고들며 귀찮게 할지도 모른다.
현행 의료법이라는 게 한의학 분야에서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
그런 만큼 불만 섞인 여론이 들끓지 않도록 미리미리 관리할 필요가 있다.
한지호는 박우식에게 말했던 의료 봉사 계획을 구체화시켰다.
현행법 상 무료로 진료를 하는 건 불법이다.
대신 한 달에 하루를 정해 일반 한의원처럼 최소한의 진료비만 받고, 지역 노인들과 저소득층 위주로 특별 예약을 받을 계획이었다.
물론 2천 원, 3천 원 수준인 최소한의 진료비조차 부담이 될 수 있기에 더 큰 액수의 생필품을 나눠주는 것으로 현행법을 비켜 가면 된다.
한 달에 하루는 실질적인 무료 진료이자 의료 봉사를 하며 기부까지 할 수 있다.
지금처럼 VIP 환자들이 몰리는 상황에서 하루를 포기하고 나누는 건 금전적으로 엄청난 손해다.
하지만 원화 한의원을 향한 사람들의 불만을 종식시키고, 이미지를 좋게 만드는 건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한지호는 항상 나눔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왔다.
외국의 부호들처럼 전 재산을 기부 하거나 남을 위해 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천사원에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자랐기에 자신도 조금씩은 사회에 뭔가를 나눠주고 싶었다.
천사원을 재건하는 것, 그리고 하루를 정해 의료 봉사를 시작하는 것은 줄곧 마음속에 품어온 나눔을 실천하기 위함이다.
그저 이미지를 좋게 만들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비록 현실적인 계산을 하고 살더라도 일말의 진심은 함께 하는 것이다.
똑똑-!
그때 간호사 조민주가 노크를 하고 원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원장님, 오늘 마지막 환자분 뜸 다 받으시고 내려가셨어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30대 중반의 간호사 조민주는 한지호에게 큰 힘이 되고 있었다.
위천 한방병원 출신으로 다양한 경험을 쌓은 그녀와 이해나 덕분에 한지호는 진맥과 시침, 처방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어깨에 뜸 치료를 받은 마지막 환자의 뒷정리도 조민주가 알아서 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한지호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으아-! 오늘 하루도 진짜 길었다. 조 간호사님도 고생했어요.”
“고생은 원장님이 하셨죠. 그래도 다이어트 한약 처방 받는 환자들이 많아서 아직 다행이네요.”
“그렇긴 해요. 진맥해서 체질 분류하고, 알맞게 약을 처방하는 건 그리 힘들지 않으니까. 앞으로 소문이 더 나면서 중병이나 난치병 환자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진짜 힘들어지겠지만.”
한지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하얀 가운을 벗으며 말했다.
<건강 백서, 진짜! 가짜!> 2화의 영향 때문인지 제대로 된 다이어트 한약을 지으려는 환자들이 많이 몰렸다.
그래서 비교적 손쉽게 진료를 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한지호가 더 유명해지고, 원화 한의원이 용하다는 소문이 나면 심각한 중병을 앓는 환자들도 많이 찾아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진료에 훨씬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힘들 거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게 싫지는 않았다.
사실 한지호는 어려운 병마와 씨름하며 한의학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쾌감을 느껴왔다.
원화 한의원도 머지않아 난치병 환자들이 기적적으로 쾌유되어 돌아가는 곳이 될 것이다.
“원장님, 그런데 오늘 3화 방송은 같이 안 보나요?”
“그러고 싶지만 오늘은 할 일이 있어서……. 나 대신 조 간호사님이 방송 모니터 해주세요.”
“당연하죠! 2화가 워낙 재밌었으니 사람들이 많이 찾아볼 거 같아요.”
“제작진들 기대가 큰 것 같은데, 잘 나오겠죠.”
가운을 옷걸이에 걸고 재킷을 입은 한지호는 조민주와 함께 원장실에서 나왔다.
또 다른 간호사인 이해나도 퇴근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한지호는 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조 간호사님, 이 간호사님. 오늘 수고 많았으니 얼른 퇴근들 해요. 내일 아침에 기분 좋게 만나요.”
“네, 원장님. 수고하셨어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
둘의 인사를 받고 1층으로 내려온 한지호는 최리나와 정주은, 박우식과 이주희에게도 빠른 퇴근을 종용했다.
보통은 한지호가 가장 늦게까지 남아 개인 업무를 마무리하고 병원 문을 닫는다.
그러나 오늘은 진료가 끝나자마자 잽싸게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다.
저녁에 방송 될 <건강 백서, 진짜! 가짜!> 3화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꼭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가볼게요. 내일 봐요!”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선 한지호의 표정이 달라졌다.
불과 일 분 전까지 한의원 직원들과 쾌활하게 대화를 주고받았었다.
하지만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그의 눈빛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을 하려고 금요일 진료가 끝나자마자 바삐 나선 것일까.
서늘한 눈빛으로 보아 한가롭게 불금을 즐기려는 것 같진 않았다.
부와아아앙-
운전석에 앉은 한지호는 거침없이 엑셀을 밟았다.
도시 전체가 들뜬 금요일 저녁, 예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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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팀장님, 말씀해주신 건물에 왔습니다. 여기 2층 간판이 좀 이상한데, 맞게 찾아 온 거겠죠?”
“하하하, 간판은 대경 통상이라고 되어 있지요? 거기 맞습니다.”
“알겠습니다.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만간 맛있는 일식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보답은요. 한 선생님께서 도와주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요. 그럼 잘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한지호는 건물 앞 도로에 차를 세우고 유건영과 통화를 했다.
그는 플래티넘 홀딩스의 유건영에게 소개를 받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유건영은 1% 상류층들의 자금 관리를 하기에 다양한 인맥을 보유하고 있다.
그의 인맥이 오직 VIP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상류층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사회의 어두운 면에 속한 사람들도 자연스레 많이 알게 된 것이다.
원래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은밀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도 많아진다.
상류층 자금 관리 전문인 유건영이 뒷골목 사람들을 잘 아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지호는 차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봤을 때는 허름하고 오래 된 건물이었다.
하지만 계단을 거슬러 2층에 다다르자 현대식 번호 키와 불투명한 유리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낡은 외관과 어울리지 않게 2층은 입구부터 세련되게 꾸며진 것이다.
한지호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 옆에 달린 벨을 눌렀다.
딩동-!
클래식한 벨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곧이어 불투명한 유리문 안쪽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슈?”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였다.
한지호는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유 팀장님 통해서 약속을 잡고 왔습니다.”
“아-! 들어 오셔유.”
유건영이 미리 이야기를 잘 해놓은 듯 곧바로 문이 열렸다.
현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선 한지호는 여러모로 낯선 광경을 접했다.
충청도 사투리로 그를 맞이한 사람은 건장한 체격의 남자였다.
머리를 짧게 바싹 깎은 게 흔히 말하는 깍두기 스타일이었다.
그는 한지호를 보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다소 험악한 인상과 달리 구수한 사투리가 괜히 정겨웠다.
“안으로 가시지유.”
“네.”
한지호는 웃음을 참으며 그를 따라갔다.
2층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고, 훨씬 고급스럽게 치장 되어 있었다.
인테리어만 대충 살펴봐도 어느 정도 돈을 썼는지 알 수 있다.
한지호는 사내를 따라 2층 내부 복도를 걸어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을 아주 꼼꼼하게 하는 곳이라더니, 돈도 많이 버나 보군. 유 팀장님이 괜히 추천해준 게 아니겠지.’
그사이 긴 복도를 가로지른 사내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형님, 손님 모시고 왔구먼유.”
“오냐.”
방 안에서 허스키한 목소리가 울렸다.
충청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사내가 방문을 열어줬다.
방 안은 전형적인 사장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한지호는 소파에 떡하니 앉아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떡 벌어진 어깨, 위험하게 생긴 인상, 가만히 있어도 뿜어지는 사나운 기운까지.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조폭 두목이 저절로 연상됐다.
하지만 그는 먼저 일어나며 나름의 예의를 갖췄다.
“오대경입니다. 유 팀장님께서 윽스로 중요한 분이라고 단단히 일러두셨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지호입니다.”
둘은 서로의 명함을 교환했다.
한지호가 받은 명함에는 TEAM DK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앉아서 이야기 하시지요. 뭐 마실 거라도…?”
“괜찮습니다.”
한지호는 음료를 사양했다.
짧고 굵게 본론만 말하고 일어설 예정이기 때문이다.
오대경은 진한 부산 억양으로 말을 계속했다.
“우리를 찾아 오셨으믄 뭔가 문제가 있으시다는 뜻인데, 맞으십니까?”
“먼저 한 가지만 묻죠. 유 팀장님 말로는 웬만한 문제는 다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맞습니까?”
“유건영 팀장님이 우리를 좋게 봐주셨나 봅니다. 맞습니다. 쉽게 말하믄 해결사 사무소입니다. 쪼매 쌈마이스럽게 말하믄 심부름센터라고 보시믄 됩니다.”
오대경이 웃으며 말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동네에 널린 3류 심부름센터와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건영이 추천해준 곳이다.
상류층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며 신뢰를 쌓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눈앞에 앉아있는 오대경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한지호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이번 주 월요일, 경동시장 근처에서 뺑소니 사고가 있었습니다. CCTV가 없는 장소를 노렸고, 경찰 조사 결과 대포차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이 된답니다.”
“작전이네요. 보나마나 타이밍 노리고 담근 겁니다.”
“대포차의 차대번호까지는 경찰에서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대포차는 누가 언제 구입했는지 아무 기록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서울에서 대포차 관리하는 업체가 몇 곳 있습니다.”
오대경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한지호의 눈빛이 살아났다.
겨우 운을 뗐을 뿐인데 전문적인 냄새가 났다.
“의심 가는 곳이 있습니다. 한국 한약 협회라고, 거기 회장인 김일은이 원한 관계로 뺑소니를 사주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재로선 증거가 없습니다.”
“그 증거를 찾아드리면 되는 거지요? 이런 일은 경찰보다 우리가 훨 빠를 겁니다.”
오대경은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말했다.
대한민국 경찰의 수사력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하지만 대포차 등 뒷골목이 연관된 사건이라면 오대경처럼 실력 있는 해결사를 따라잡기 힘들다.
한지호는 오대경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사건 조사와 더불어 김일은이라는 사람의 뒷조사까지 철저히 해주면 좋겠습니다. 시간은 얼마나 필요합니까?”
“돈을 얼마 주시는지에 따라 걸리는 시간도 달라진다 아입니까.”
“다른 일 제쳐두고 내가 맡긴 일부터 조사해주길 바랍니다. 돈은 원하는 대로 주겠습니다.”
“그렇다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오대경이 넉살 좋게 웃었다.
겉모습은 그저 그런 깡패와 다를 바 없지만 독특한 내공이 엿보였다.
왠지 그가 기대 이상의 결과물을 가져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한지호는 사건의 진상을 캐내고, 최치우의 수술 후유증을 치료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비로소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정신으로 칼을 뽑았다.
한지호의 칼끝은 한국 한약 협회장 김일은을 정조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