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
2장, 호사다마(好事多魔) (2)
+++
흡사 영화 분노의 질주를 찍는 기분이었다.
토요일 오후 강남의 도로는 주차장이나 다름없다.
한지호는 꽉 막힌 차들 사이를 요리조리 비켜가며 최대한 속도를 냈다.
평소 같았으면 이렇게 거친 운전을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명징약초 최치우가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유롭게 강남의 교통체증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진짜 더럽게 막히네.”
운전대를 잡은 한지호의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한세 병원까지 남은 거리는 고작 1km 남짓이다.
목적지에 거의 다 왔는데 교통 체증으로 거리가 좁혀지지 않고 있다.
차라리 길바닥에 차를 버리고 뛰어가는 게 훨씬 빠를 것 같았다.
부우우웅-
조바심과 걱정으로 손바닥에 땀이 맺히고 있는데 다시 차들이 움직였다.
겨우 한세 병원 주차장에 진입한 한지호는 화살처럼 자동차 밖으로 튀어 나왔다.
타다닥!
쏜살같이 뛰어가며 응급실 입구를 찾은 그는 자동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몸을 집어넣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최 사장님, 아니 최치우 환자 있습니까?”
“아……. 방금 막 수술실로 올라가셨어요.”
“수술실이요? 얼마나 심하게 다친 겁니까?”
“먼저 오신 보호자 분께 설명 드렸는데, 정확한 상태는 수술 담당하시는 과장님이 보셔야 알 수 있어요. 우선은 교통사고로 인한 타박상과 골절로 병원에 오셨습니다.”
대형 병원 응급실에 있으면 목숨이 경각에 달린 환자들을 하루에도 여러 명 보게 된다.
그래서인지 여자 간호사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안내를 해줬다.
하지만 간호사의 말을 듣는 한지호는 차분할 수 없었다.
차라리 자신이 다친 거라면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까운 지인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수술까지 받게 됐으니 속이 탈 수밖에 없었다.
“수술실은 어디입니까?”
“3층에 올라가면 앞에서 대기하실 수 있으세요.”
사무적인 안내를 받은 한지호는 병원 3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 틈에 섞여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픈 마음도 들지 않았다.
성큼성큼 계단을 거슬러 3층에 도착한 그는 금방 수술실을 찾았다.
당연히 수술실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고, 바깥의 의자에서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해당 수술실 앞에는 먼저 도착한 이원복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바싹 마른 입술을 깨물고 있던 그는 한지호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이오. 나도 방금 도착 했수다.”
“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한지호는 이원복에게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그에게서 천종산삼을 구입한 이후 제법 오랜만에 만난 것이지만, 지금은 반가움을 나눌 때가 아니었다.
이원복도 한지호와 비슷한 심정이라 어두운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아직 치우 형님을 뵙지 못해서 뭐라 말을 못 하겠소. 마침 사고가 나기 직전에 나와 통화를 한 기록이 있어서 구급대원이 내게 전화를 한 거요. 나도 서울에 머무는 중이라 바로 달려 왔수다.”
“현재로서는 교통사고가 났고, 최소 골절 이상의 부상으로 수술을 받는 중이라는 사실밖에 알 수 없군요.”
한지호의 말에 이원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연락을 받고 달려왔을 뿐, 딱히 사고의 내막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모양이다.
‘느낌이 좋지 않아, 느낌이.’
한지호는 이원복의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불길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했다.
최치우가 다친 게 단순한 사고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섣불리 추측을 해봤자 답이 안 나온다.
우선 수술이 잘 끝나기를 기다리고, 최치우가 회복을 하면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앉아서 기다리시죠.”
한지호는 이원복과 나란히 수술실 앞 의자에 앉아 고뇌에 빠졌다.
골절 수술은 보통 한 두 시간 안에 끝난다.
하지만 그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질 것 같았다.
+++
수술이 끝났다.
의자에 앉아 최치우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시간은 끔찍할 정도로 길게 느껴졌었다.
실제 흘러간 시간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이래서 다들 시간이 상대적이라 말하는 모양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한 시간이 일분처럼 느껴지지만, 괴로운 기다림은 아무리 짧아도 피를 말린다.
수술실에서 나온 최치우는 마취의 영향으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한지호는 1인실에 최치우를 입원시켰다.
한세 병원의 1인실은 보험이 적용되지 않기에 하루 입원료가 50만원이 넘는다.
그러나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한지호는 최적의 환경에서 최치우가 편안하게 회복하기를 원했다.
수술비를 포함해 치료와 입원에 들어가는 비용은 얼마든지 부담할 생각이었다.
그는 1인실에 잠든 최치우 곁에 이원복을 남겨두고 수술을 집도한 의사를 만났다.
“최치우 환자 보호자이십니까?”
무테 안경을 쓴 중년의 의사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외과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들은 늘 격무에 시달린다.
방금 막 수술을 마치고 나온 눈앞의 의사 역시 꽤나 지친 것 같았다.
한지호는 의사들의 고충을 잘 알기에 기계적인 태도에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제가 보호자입니다. 먼저 수술을 집도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한지호의 말에 의사가 표정을 바꾸었다.
그는 다소 놀란 눈빛으로 한지호를 쳐다봤다.
수많은 환자 보호자들 중에 수술을 마친 의사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대부분 환자의 상태를 묻기 바쁘고, 혹시라도 경과가 안 좋으면 각오하라며 의사를 협박하는 보호자들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며 감사 인사를 한 한지호는 특이한 편에 속했다.
오는 말이 고아야 가는 말도 고운 법.
한지호는 말 한 마디로 의사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일까.
수술을 마친 의사도 피곤함을 무릅쓰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환자의 사고 경위는 알고 계십니까?”
“사실 경황이 없어서 아직 정확한 경위도 모르고 있습니다.”
“수술 전 확인한 차트에는 뺑소니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의사의 말에 한지호가 주먹을 꽉 쥐었다.
뺑소니.
누구나 흔히 듣는 말이지만 막상 자기 일이 되면 이것만큼 화나고 억울한 일이 없다.
한지호는 불길한 예감의 조각이 하나 둘 맞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의사 앞에서 그런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지금은 수술 경과를 확인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정확한 부상 정도와 수술 경과를 알 수 있을까요?”
“보호자 분께서 알기 쉽게 설명 드리자면, 왼쪽 팔꿈치부터 손목까지 뼈가 부러졌습니다. 골절이라고 하죠. 그러면서 근육과 신경에도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봉합을 했지만 신경 부분 손상이 있을지 염려되는 상황입니다. 척추기립근과 허리도 다치셨지만 당장 수술이 필요한 정도는 아닙니다. 그 외에도 오른 팔과 상체 전반에 걸쳐 타박상을 입으셨습니다.”
“왼쪽 팔을 들어 뺑소니 차와 직접적으로 충돌했고, 그 여파로 튕겨나가며 허리 등을 다치고 타박상을 입은 것이겠군요.”
“그럴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의사가 놀란 얼굴로 한지호를 쳐다봤다.
부상 부위와 정도를 듣고 사고 상황을 완벽에 가깝게 예측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주의해서 지켜볼 점은 무엇입니까?”
이어진 한지호의 물음에 의사가 다시 한 번 차트를 살펴보며 대답했다.
“골절 부위는 치료를 잘 받으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척추기립근과 허리는 상태를 주시해야 하고, 타박상은 시간이 지나면 나을 겁니다. 문제는 왼팔 골절과 겹친 신경인데…….”
“신경 봉합이 성공적으로 끝났어도 후유증이 남는 경우가 흔합니까?”
“흔하지는 않은데, 또 아예 가능성이 희박한 케이스는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몇 달, 몇 년이 지나도 손상된 신경이 회복되지 않기도 합니다.”
확실하게 듣기 원하는 정답을 말해주지 않는 게 의사들의 특징이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수술이 잘 끝났어도 얼마만큼 회복될 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신경은 워낙 민감한 부분이라 세계적인 의사라고 해도 회복 여부를 확신하지 못한다.
한지호는 한의대에서 공부하며 기본적인 서양 의학 상식을 배웠다.
한세 병원에서 수술을 집도한 의사가 실력이 없을 리 만무하다.
우선은 최선을 다한 그의 설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알겠습니다. 경과 확인까지 계속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한지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까지 거의 모든 게 불투명한 안개 속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최치우가 어쩌다 뺑소니를 당했는지도 알 수 없고, 회복이 얼마나 잘 될지도 미지수다.
답답하기 그지없지만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한지호는 최치우가 누워 있는 병실로 걸어가며 심호흡을 했다.
가장 불안할 사람은 사고를 당한 최치우 본인일 것이다.
그는 이제껏 맺어온 우정과 파트너십이 헛되지 않게 든든한 보호자가 되겠다고 작정했다.
방향 없는 분노가 터질 듯 차올랐지만 꾹 꾹 눌러 담았다.
한지호가 누구에게 화를 내야할지 알게 되는 순간, 억지로 누른 분노가 화산처럼 터져 나올 것이다.
+++
“고맙네, 정말 고마우이.”
마취에서 깨어나 의식을 회복한 최치우는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고 계속했다.
그는 만사를 제치고 달려온 이원복과 한지호에게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정을 느꼈다.
특히 한지호는 최치우가 쾌적한 환경에서 회복할 수 있도록 1인실을 빌렸고, 수술비를 미리 결제해 놓았다.
나중에라도 최치우가 직접 병원비를 낸다고 할까봐 아예 선결제를 해버린 것이다.
한지호의 통 큰 마음 씀씀이를 처음엔 부담스러워하던 최치우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에서 우러나와 병원비를 내준 한지호의 호의를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둘은 단순히 약초를 사고 파는 거래처 관계가 아니었다.
한지호가 빈털털이 시절 처음 청우단을 만들어 팔 때부터 인연을 맺었고,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나누며 서로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 왔다.
그렇기에 한지호는 원화 한의원을 개원하며 고민할 것도 없이 명징약초를 전속 약재상으로 선정했다.
적어도 경동 시장 약재상 거리에서는 명징약초의 물건이 가장 깨끗하고 떼가 안 탔다.
가격은 다른 약재상들보다 조금 비싸도 그만한 값을 하고 남았다.
최치우는 단 한 번도 어설픈 약초를 보낸 적이 없었다.
절대 원산지를 속이지 않았고, 언제나 가장 깨끗하고 좋은 약초는 한지호를 위해 선별해 놓았다.
이원복을 통해 산삼을 구할 수 있게 해줬던 것도 돈으로 따지기 힘든 도움이었다.
그 덕에 김해수를 완치시키며 진료비와 명성을 챙겼으니 한지호가 기꺼이 병원비를 내고 최치우를 살뜰하게 챙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형님, 대체 어쩌다가 뺑소니를 당한 거요?”
그때 이원복이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한지호가 나서서 묻고 싶었던 걸 대신해준 것이다.
“그게 말이네…….”
순식간에 최치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마취가 조금씩 풀리며 수술로 인한 통증이 심해지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이윽고 최치우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아마 일은이 그놈이 손을 쓴 것 같네.”
“김일은? 그 깡패 새끼 말이오?”
“흥분을 가라앉히게. 당장은 아무런 증거가 없지 않나.”
최치우는 길길이 날뛰려는 이원복을 진정시켰다.
옆에 선 한지호는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분노를 조절했다.
그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최 사장님, 한국 한약 협회장 김일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네. 내 자네에게도 그놈을 조심하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나를 먼저 칠 줄은 몰랐지. 나이가 들면서 너무 안일해진 게야.”
“힘드시겠지만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김일은, 그놈은 깡패 같은 놈에다가 머리도 비상하게 돌아간다네. 약초꾼을 하며 번 돈으로 여기저기 줄을 댔고, 정치권에도 선이 닿아 있더구만. 말이 한국 한약 협회지 사실은 한약방과 한의원들 대상으로 압력 넣고 협회비 걷는 조직이나 다름없네. 그놈이 지난 방송으로 자네에게 앙심을 단단히 품었고, 내게도 전화를 하더군. 원화 한의원에 더 이상 약재를 공급하지 말라고 말일세. 일언지하에 거절했더니…… 보다시피 수상한 자동차가 CCTV도 없는 길목을 정확히 노려 나를 치고 달아간 것이네. 증거는 없지만 시기가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한지호는 머릿속을 맴돌던 불길한 퍼즐이 현실로 딱 맞아떨어지는 걸 깨달았다.
최치우의 말처럼 확증은 없어도 심증은 굳건하다.
경찰이 뺑소니 차를 수사하겠지만 아마 잡기 쉽지 않을 것이다.
작정하고 뺑소니를 한 거라면 대포차를 썼을 확률이 높다.
분명 단순한 사고는 아니다.
한지호는 김일은이란 이름을 속으로 곱씹으며 최치우를 안심시켰다.
“더 이상 큰 일은 없을 겁니다. 최 사장님은 푹 쉬면서 회복하는데 집중하세요.”
“내 왼팔은 어떻다던가?”
“부러진 뼈가 잘 붙었다고 합니다. 만에 하나라도 신경에 이상이 생기면 제가 책임지고 치료하겠습니다. 제 실력, 아시잖아요?”
“커허허, 알고말고. 자네가 그리 말해주니 안심이 되는구만.”
최치우가 짐짓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팔에 후유증이 남아도 한지호가 치료해준다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황만금과 김해수의 난치병을 고친 한지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치우의 팔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것이다.
이원복도 한지호의 의술을 알기에 조금 마음을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지호는 미안한 마음이 드는 한편, 반드시 자기 손으로 일을 매듭짓겠다고 다짐했다.
방송에서 다이어트 한약의 실체를 폭로했기 때문에 최치우가 엮여서 뺑소니를 당했다.
<건강 백서, 진짜! 가짜!>를 통해 엄청난 관심을 받으며 인기를 얻게 된 만큼 책임져야 할 것들도 늘어났다.
오금희의 의술을 총 동원해서라도 최치우의 팔을 멀쩡히 낫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면서 사건의 배후로 의심되는 한국 한약 협회장 김일은과 끝장을 볼 것이다.
한지호는 삼국지 시대의 군주들과 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
자기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끔찍하게 아낀다는 점이 군주들과 똑같다.
최치우는 한지호의 사람이고, 그를 건드린 건 한지호를 직접 공격한 것과 다름없다.
‘김일은. 만약 당신이 주도한 일이라면…… 한국 한약 협회 자체가 사라지게 될 거야.’
한지호는 얼굴도 모르는 김일은을 향해 마음의 칼날을 바짝 세웠다.
그가 숨겨왔던 칼을 휘두를 시기가 곧 다가올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