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66화 (66/255)

# 66

2장, 호사다마(好事多魔) (1)

한지호는 처리해야 할 일들을 뒤로 미루지 않았다.

토요일과 일요일, 주말 내내 <건강 백서, 진짜! 가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걸 지켜보며 해야 할 일에 우선순위를 정했다.

먼저 그는 이지은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았다.

그녀의 고백을 받아줄지 말지 얼른 결정을 내리는 게 예의 같았다.

인기 연예인이고 아니고를 떠나 한 여자의 진심을 계속 방치할 수는 없다.

지난주처럼 수요일 촬영이 끝나고 늦은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다.

또 월요일 진료 후에는 오랜만에 명징약초를 찾아가 최치우를 만날 예정이었다.

그동안 약재 수급을 담당하던 조기운이 지방으로 내려가 있기 때문에 직접 갈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공개적으로 성명서를 발표한 한국 한약 협회 문제도 최치우와 상의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일정을 정리하는 사이 주말이 훌쩍 지나갔다.

사실 한지호의 스마트 폰은 주말 내내 쉬지도 않고 바삐 울렸다.

이런저런 매체와 협회에서 연락이 쇄도했고, 어떻게 번호를 알았는지 항의 전화를 하는 한약방 주인도 있었다.

한의사들이 모여 만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한지호와 원화 한의원을 성토하는 글들이 폭발했다고 한다.

그들 입장에서는 동종 업계에 팀 킬(team kill)을 한 한지호가 원수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지호는 크게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어차피 욕을 먹을 걸 감수하고 제대로 폭격을 퍼부은 셈이다.

이제 와서 부정적인 반응을 찾아보며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전혀 없었다.

부정적인 반응 이상으로 긍정적인 피드백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토요일 아침부터 원화 한의원에 찾아와 취재를 해간 기자들의 기사는 주말을 뜨겁게 달궜다.

야소녀 모임 참석 이후 높아졌던 한지호의 대중적인 인지도는 <건강 백서, 진짜! 가짜!> 2화 방영 이후 상한가를 쳤다.

1화 방송은 건강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들만 봤다면, 2화는 엄청난 이슈를 만들며 포털 사이트를 비롯해 페이스 북에서도 방송 캡처 사진이 널리 공유됐다.

아직 전국적인 스타가 됐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지호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다이어트 한약을 고발한 한의사라고 하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한지호 개인에게도, 원화 한의원에게도 지난 2화 방송은 더 없이 소중한 자산이 됐다.

사무장 박우식의 말처럼 몇 억 원을 들인 TV 광고보다 훨씬 나은 효과를 본 게 분명했다.

공중에 붕 뜬 기분을 느끼면서도 침착하게 주말을 보낸 한지호에게 새로운 일주일이 열렸다.

개원 한 달을 겨우 넘긴 원화 한의원은 급속도로 한의학계의 판도를 바꿔나갈 것 같았다.

+++

“네, 원화 한의원입니다. 상담 예약이요? 이번 주는 예약 시간이 다 찼고, 다음 주 화요일 오전 괜찮으세요? 네, 네. 지금은 그 시간밖에 없네요. 죄송합니다. 그럼 다음 주 화요일로 잡아드릴게요. 성함 말씀해주시겠어요?”

안내 데스크에서 전화를 받는 이주희와 박우식은 콜 센터 직원들의 비애를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쉴 새 없이 걸려오는 전화에 다른 업무를 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들만 바빠진 건 아니다.

정주은과 최리나도 풀 타임으로 꽉 채워진 상담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논현동의 잘 나가는 성형외과 못지않게 바쁜 상담 일정이 줄줄이 잡혔다.

문의와 상담이 폭증하면 자연스레 진료를 보는 환자도 늘어난다.

상담 과정에서 값비싼 진료비를 듣고도 결단을 내린 환자들이 줄지어 2층으로 올라갔다.

간호사 조민주와 이해나는 위천 한방병원보다 더 바빠진 것 같다고 혀를 내둘렀다.

국내 최고의 프랜차이즈 한의원인 위천 한방병원 출신들이 헉헉거릴 정도로 환자가 몰려들었다.

VIP 전문 한의원이라 늘 여유 있게 진료를 하던 한지호도 물밀듯 밀려오는 환자들을 보느라 땀을 쏟았다.

새로 늘어난 환자들 대부분은 다이어트 한약을 원하고 있었다.

한지호는 <건강 백서, 진짜! 가짜!> 2화에서 자신의 병원을 홍보하지 않았다.

그저 시중에 만연한 다이어트 한약의 단점을 짚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은 한지호가 제대로 된 다이어트 한약을 만들 거라 생각했다.

문제점을 파악하는 사람이면 해결책도 알고 있을 거라 짐작하기 마련이다.

부작용이 없고 체질에 맞춰 효능을 극대화한 다이어트 한약을 원하는 사람은 한 두 명이 아니었다.

원화 한의원은 마치 강남 사모님들의 사교장이 된 것 같았다.

자기들 동네에서 목에 힘을 주는 통통한 체형의 사모님들이 대거 모여들어 진료를 받았다.

“어머! 예나 엄마도 왔어?”

“정화 엄마! 자기는 뺄 살이 어딨다고 그래. 방송 보고 온 거지?”

“안 그래도 저번부터 여기가 잘 본다고 소문이 돌았거든. 방송은 못 봤는데 인터넷 뉴스에서도 난리가 나서 토요일 날 상담 예약 잡았지.”

“아무튼 빠르다니까. 아까 보니까 타워 팰리스 펜트하우스에 사는 미지에 엄마 있지? 4학년 학부모회 회장 말이야. 그 엄마는 벌써 상담을 받았는지 2층으로 올라갔어.”

“하여간 더 잘사는 집 엄마들이 소문도 빠르게 캐치한다니깐.”

1층 상담 대기실에서 서로를 알아본 중년 여성들의 대화는 무척 노골적이었다.

원화 한의원은 한지호가 <건강 백서, 진짜! 가짜!>에 출연하기 전부터 상류층 사이에서 알음알음 입소문을 타고 있었다.

다이어트 한약을 다룬 <건강 백서, 진짜! 가짜!> 2화는 기폭제 역할을 했을 따름이다.

상담 대기실의 분위기를 보면 머지않아 원화 한의원이 강남 주민들 사이에서 확고부동한 트렌드가 될 것 같았다.

물론 다이어트 한약이라는 아이템 하나만으로는 롱 런을 기대할 수 없다.

한지호는 다이어트를 원하는 강남 사모님들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진짜 VIP들이 믿고 진료를 맡길 수 있는 병원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줘야 한다.

어려운 숙제지만, 원래 세상에 쉬운 일 따위는 없는 법이다.

“원장님, 조경숙 환자님 들어가시겠습니다.”

간호사 조민주가 2층 진료실 문을 두드리고 환자를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온 조경숙이라는 중년 여인은 타워 팰리스 펜트하우스에 산다는 미지 엄마였다.

1층 대기실에서 다른 학부모들이 발견하고 수군거리던 대상이다.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간 강남 엄마들 사이에서도 레벨이 다른 존재로 인식되는 사모님인 것이다.

“안녕하세요.”

한지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누가 봐도 훈훈한 외모를 지닌 그가 웃으면 웬만한 환자들은 무장 해제가 된다.

특히 나이대가 있는 여자 환자들 사이에서는 한지호처럼 젊고 잘생기면서 친절한 의사의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다.

외모로 진료를 하는 건 아니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하지 않았는가.

진료실 의자에 앉은 조경숙도 한지호의 미소를 받으며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학부모회 회장을 맡으며 콧대 높기로 유명한 조숙경이지만, 한지호는 이런 환자들을 다루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는 원화 한의원을 열고 다양한 환자들을 만나며 사람들 대하는 스킬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다.

눈을 맞추고 미소를 잃지 않은 상태에서 한지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상담 차트에는 요즘 기력이 떨어지셔서 걱정이라고 하셨네요? 더불어 다이어트에도 효과가 있는 약이었으면 좋겠다고.”

“네, 맞아요.”

“기력 회복과 다이어트.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한약은 흔치 않죠.”

“역시 욕심이 너무 많았던 건가요? 다이어트 한약을 먹으면 보통 식욕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그러기엔 요즘 몸이 허해진 느낌이라서요.”

“확실한 기력 보충을 원하면 그쪽 약을 쓰는 게 맞고, 다이어트 효과도 톡톡히 보시려면 어느 정도는 식욕을 감퇴시키는 약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한지호가 잠시 말을 끊고 조경숙을 쳐다봤다.

그는 대화의 흐름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잔뜩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뜸을 들이며 애간장을 태운 그가 말을 뒤이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라고 말한 나폴레옹의 말을 인용하고 싶군요.”

“네? 호호호.”

조경숙은 눈을 크게 뜨고 웃음을 터트렸다.

한지호는 딱딱하고 권위적인 다른 의사들과 달리 능수능란한 화술을 선보이며 대화를 재밌게 풀어나갔다.

“다이어트에도 효과가 있고, 동시에 기력 회복을 시켜주는 약을 지을 수 있습니다. 대신 두 부분 모두 극적인 효능을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한 과목에서 100점을 맞는 것 대신 두 과목에서 80점씩 받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쉽죠?”

“한 원장님, TV에서 볼 때도 느꼈지만 말씀을 정말 잘 하시는 것 같아요. 아무튼 좋아요. 어쨌든 두 부분에서 다 효과는 있다는 말이잖아요. 그렇죠?”

“맞습니다. 정확한 체질을 파악하고, 그에 맞춰 처방을 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진맥을 해볼까요?”

“네.”

조경숙은 진료실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한지호와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그만큼 한지호가 사람을 편하게 하며 핵심만 콕콕 짚어 전달하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환자들이 넘쳐나도 지치지 않고 한 명 한 명에게 최선을 다했다.

힘들다고 투정을 부릴 수는 없다.

예전에는 차마 꿈도 꾸지 못하던 것들을 누리는 지금, 그는 무한동력을 자랑하는 에너자이저처럼 열정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

“오늘 직접 명징약초로 가신다고 하셨지요, 원장님?”

박우식이 한지호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치 진료를 끝내고 1층으로 내려온 한지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운이가 요 며칠 지방에서 다른 일을 하는 중이라 직접 약재를 챙기려 합니다.”

“그렇군요. 헌데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박우식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한지호는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방송의 효과로 환자들이 폭증하고 있는데 사무장 박우식은 왜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을까.

일이 너무 많아 힘들다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곧이어 박우식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빌딩 공동 안내 데스크에서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무턱대고 한의원을 찾아온 환자들을 돌려보내지 않습니까? 상담 예약을 잡고, 그 후에 진료를 받는 시스템이니……. 그런 걸 모르고 발걸음을 했던 사람들이 공동 데스크에 불만을 토로한 모양입니다. 또 우리 한의원 홈페이지와 인터넷 게시판에도 VIP 전문 시스템에 대한 불만 글이 많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방송을 보고 잔뜩 기대를 했던 사람들이 어려운 시스템과 비싼 진료비 때문에 화가 난 것이겠지요.”

“예상했던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하는군요.”

한지호는 턱밑을 쓰다듬었다.

그와 원화 한의원이 유명해질수록 더 커질 문제였다.

고가의 진료비와 약값을 받는 VIP 전문 한의원이라는 시스템은 일반 대중들의 반감을 사기 쉽다.

앞으로 무작정 병원을 찾아와 헛걸음을 하는 사람은 계속 늘어날 테고, 평범한 환자들은 엄두도 내기 힘든 비싼 진료비도 여론의 도마에 오를 것이다.

그렇다고 VIP 전문 병원이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을 수도 없다.

한지호는 지난 주말 동안 이 문제를 놓고 고민을 했었다.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미리 예측을 했고, 해결책을 준비해 놓았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은 그를 위해 존재하는 단어 같았다.

“몇 가지 방안을 생각했는데, 한 달에 하루 무료 진료를 하는 게 어떻습니까?”

“네? 무료 진료 말씀이십니까?”

뜻밖의 말에 깜짝 놀란 박우식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한지호는 쉽게 꺼낸 말이 아닌 듯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재능 기부 차원에서 의료 봉사를 하는 겁니다. 한 달에 하루를 정해 저소득층과 노인층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를 하면 VIP 전문 시스템에 대한 불만도 많이 희석 될 겁니다. 어차피 한 달에 하루 정도는 사회에 봉사를 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으음…… 지금 같은 페이스에서 하루 동안 얻을 수 있는 수익이 무척 크다는 것은 원장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요?”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 때로는 작은 것을 놓아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VIP 전문이라는 시스템은 두고두고 구설수에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무료 진료를 통해 봉사도 할 수 있고, 우리 병원의 이미지도 크게 높일 수 있을 겁니다. 고가의 진료비에 불만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많이 줄어들겠죠.”

“사회 경험이 없으신 원장님께서 저보다 더 나은 혜안을 갖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무료 진료 방안은 적극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

“디테일한 부분은 사무장님이 윤곽을 잡아주세요. 전 이만 명징 약초로 가보겠습니다.”

한지호가 배의 선장으로 나아갈 방향을 지시하면 박우식이 세밀한 부분을 다듬으며 지원하는 조타수 역할을 맡았다.

성격도, 나이도, 인생 환경도 많이 다른 두 사람은 남부럽지 않은 호흡을 자랑하고 있었다.

평창동 황만금은 한지호에게 1억 원의 현금과 10억 원의 투자금 외에도 박우식이라는 사람을 선물로 준 셈이다.

무료 진료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은 한지호는 병원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를 몰고 곧장 경동 시장으로 갈 계획이었다.

오랜만에 명징 약초의 최치우를 만날 생각에 살짝 기분이 들떴다.

딩동-!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다다랐다.

한지호가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찰나, 주머니 속 스마트 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는 먼저 스마트 폰을 꺼냈다.

폰의 화면 위로 이원복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최치우의 후배이자 김해수를 치료하는데 쓴 천종산삼을 팔았던 심마니 이원복이 전화를 한 것이다.

순간 불길한 기운이 한지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엘리베이터에 타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한 선생? 나요, 심마니 이원복!”

전화기 너머 이원복의 목소리가 무척 다급하게 들렸다.

한지호는 알 수 없는 나쁜 예감이 현실로 변하는 느낌을 받았다.

“무슨 일이세요?”

“치우 형님이, 치우 형님이 다쳤수다! 나도 방금 막 연락을 받고 한 선생이 떠올라서 전화를 한 거요!”

“최 사장님이 다치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나도 잘은 모르겠소. 웬만해선 병원에 안 가는 양반인데 응급실에 실려 갔다고 하니 심각한 것 같수다!”

“바로 가겠습니다. 어디 응급실에 계십니까?”

“한세 병원 응급실이오. 나도 지금 가는 중이니 그곳에서 보십시다.”

한지호는 미처 대답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밖으로 뛰어나가 오금희 조공(鳥功)을 펼치고 싶었다.

경공술에 해당하는 조공을 펼치면 자동차보다 빨리 병원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간 온 세상에 오금희라는 무공을 노출시키게 된다.

한지호는 주먹을 꽉 쥐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한세 병원 응급실, 한세 병원 응급실.”

최치우가 실려 간 곳을 읊조리는 그의 눈동자가 무섭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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