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한의사 한지호입니다. 유행처럼 번지는 건강 비법과 건강 식품들, 잘 선택하면 우리의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 선택한 건강 비법이 우리 삶을 망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항상 시청자 여러분께 도움이 되는 판단을 내리겠습니다.”
한지호가 오프닝 멘트를 깔끔하게 소화했다.
방송 경험은 없지만 아나운서인 문주연이나 케이블에 출연한 양승찬 못지않게 자연스러웠다.
“커트!”
오프닝 멘트를 딴 채성일이 컷을 외쳤다.
그는 NG 없이 오프닝에 성공해 신이 난 듯 유쾌하게 말을 쏟아냈다.
“아주 좋습니다. 양 원장님, 한 원장님. 두 분 모두 방송 체질인가 봅니다!”
채성일의 칭찬에 양승찬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케이블에 여러 번 출연한 자신과 한지호가 똑같은 칭찬을 듣는 게 못마땅한 것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 선 문주연도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감을 말했다.
“두 분 다 잘하셨어요.”
그녀가 칭찬을 하며 살짝 한지호를 쳐다봤다.
한지호는 문주연과 눈이 마주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뭐라 말로 설명하기 힘든 느낌이 들었고, 문주연 옆의 양승찬이 이마를 찡그리는 것도 보였다.
그때 채성일이 설명을 덧붙였다.
“오프닝 멘트가 나가고, 양 원장님과 한 원장님의 이력이 화면으로 소개 될 겁니다. 우리 작가들이랑 조연출이 아주 재밌게 영상을 만들었습니다. 양 원장님이 케이블 프로에서 활약하신 장면도 포함 돼 있고, 한 원장님이 야소녀 모임에서 진맥을 하시는 사진도 구해 놓았습니다. 시청자들이 두 분에게 호감을 느끼고 신뢰할 수 있도록 제작진에서 힘쓰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한지호와 양승찬이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애초에 채성일은 젊고 참신한 의사와 한의사를 문주연 좌우에 세워 프로그램의 균형을 맞추려고 했다.
그러나 사전 미팅 때부터 묘하게 라이벌 구도가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한지호는 양승찬을 의식하지 않지만, 양승찬은 알게 모르게 한지호를 신경 쓰는 눈치였다.
‘누가 이 프로그램의 얼굴이 될지 보여주겠어.’
양승찬의 경쟁 의식을 느낀 한지호는 속으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둘 다 주목을 받으면 좋지만,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뜨기는 힘든 법이다.
<건강 백서, 진짜! 가짜!>를 대표하는 간판 스타의 자리를 놓고 내부에서 치열한 경쟁이 펼쳐질 것 같았다.
“그럼 다시 가겠습니다. 문 아나 준비됐지? 고!”
채성일이 특유의 말투로 싸인을 줬다.
“건강 백서 첫 회에서는 요즘 유행하는 크로스 핏에 대해 심층 해부를 해보겠습니다. 사람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운동으로 화제의 중심에 서있는 크로스 핏, 과연 의학적으로 건강에 도움이 되는 진짜 비법일까요? 아니면 위험성을 갖고 있는 가짜 비법일까요? 영상으로 먼저 확인해보시죠.”
문주연의 진행에 따라 촬영에 속도가 붙고 있었다.
한지호는 긴장하지도, 그렇다고 방심하지도 않았다.
쇼(show)는 이미 시작 됐다.
TV 쇼는 사람을 스타로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추락시키기도 한다.
이왕 쇼 닥터가 되기로 결심했다면 인기 연예인들을 뛰어넘어 사회에 센세이션을 일으켜야 하지 않을까.
한지호는 카메라의 빨간 불빛을 쫓아가며 촬영에 몰입했다.
막이 올라간 쇼는 질주하는 열차와 같아서 쉽게 멈추지 않는다.
쇼에 몸을 실은 한지호의 질주도 이제 막 스타트를 끊은 셈이었다.
9장, 내실과 외연 (1)
당분간 <건강 백서, 진짜! 가짜!>의 촬영은 매주 수요일마다 이어질 예정이다.
2주차 녹화가 끝나면 첫 촬영분이 방송 전파를 타고 대한민국 각 가정의 TV로 송출 될 것이다.
첫 촬영에서는 사람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크로스 핏의 장점과 단점을 해부했고, 실제 경험자들의 인터뷰를 종합해 부작용을 알아봤다.
뿐만 아니라 양승찬과 한지호는 각각 크로스 핏을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식품을 추천했고,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경고도 잊지 않았다.
45분 가량의 방송 시간을 고려하면 필요한 내용을 꽉 채워서 촬영을 마쳤다.
문제는 얼마나 지루하지 않게 이슈들을 풀어가냐는 것이다.
두 명의 의학 전문가 사이에서 문주연이 중심을 잡고 있지만, 정통파 아나운서인 그녀도 유머 감각을 내세우는 캐릭터는 아니다.
첫 방송 시청률과 반응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향후 프로그램 컨셉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첫 촬영은 어떠셨어요? 연예인들도 많이 보셨어요?”
수요일 촬영을 마치고 목요일이 되어 출근을 하니 직원들이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한지호는 웃음을 터트리며 천천히 대답했다.
“촬영은 잘 끝냈고, 아쉽게도 연예인은 못 봤습니다.”
“아-! 다음에 혹시 이엑스오 보면 싸인 하나만 꼭 받아주세요!”
“주희 씨, 아이돌 그룹 팬이에요?”
“네…….”
한지호의 물음에 안내 데스크 직원인 이주희가 얼굴을 붉혔다.
20대 초중반에 남자 아이돌 팬이라는 게 괜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한지호는 더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걱정 말아요. 지나가다 이엑스오가 보이면 체면이고 뭐고 달려가서 주희 씨 이름으로 싸인 받아 줄게요.”
“정말이죠, 원장님?”
“내가 언제 빈말 하는 거 봤어요. 과연 프로그램 폐지 전에 이엑스오를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방송국에 자주 가시면 꼭 한 번은 보시겠죠. 아싸! 이엑스오 싸인이라니, 생각만 해도 꿈 같아요!”
이주희는 벌써 이엑스오 싸인을 받기라도 한 듯 신이 나 폴짝거렸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이 순수한 2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친구이자 동료인 이주희의 천진한 모습에 정주은과 최리나도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녀들보다 나이가 좀 더 있는 편인 간호사 조민주와 이해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자애들처럼 생긴 아이돌이 정말 좋아?”
“그럼요, 언니. 언니는 미소년 스타일 안 좋아해요?”
이해나의 물음에 이주희가 이엑스오를 변호하고 나섰다.
그러나 20대 후반에 접어든 이해나와 30대를 넘긴 조민주는 전혀 공감하기 힘든 눈치였다.
“남자는 어깨 떡 벌어지고, 뭐랄까? 수컷의 냄새를 풍겨야지. 너도 나이 좀 더 들면 알게 될 거야.”
“언니, 그렇게 말하니까 엄청 나이 많이 들어보이는 거 알아요?”
“뭐? 애 좀 봐. 원장님, 주희가 저 나이 많다고 놀려요!”
일과 시작 전부터 가벼운 농담이 오가며 분위기가 편하게 풀렸다.
한지호의 방송 출연은 원화 한의원 내부에서도 화제 거리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원장님도 나와 계셨네요.”
뒤이어 사무장 박우식이 병원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매일 일과 시작 10분 전에 정확히 도착한다.
때로는 조금 늦거나 더 일찍 올 수도 있는데 항상 10분 전을 지켰다.
마치 한의원 근처에 도착해서 10분 전이 되기까지 기다리다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만큼 시관 관리에 철저한 사람이었고, 사무장 역할을 수행하기에 제격인 캐릭터였다.
한지호는 예전보다 한결 친해진 박우식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사무장님.”
“원장님 촬영은 잘 끝나셨습니까?”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무사히 끝났고, 다음 주 수요일에 2화 촬영이 끝나면 금요일부터 방송이 될 예정입니다.”
“그럼 우리 다음 주 금요일에는 같이 모여서 방송을 봐야겠군요?”
“그것도 괜찮네요. 첫 방송 시청을 같이 할 겸 회식도 하고.”
박우식의 제안에 한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사적인 첫 방송 출연을 원화 한의원 식구들과 함께 시청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한지호는 말이 나온 김에 다른 안건도 떠오른 듯 박우식을 쳐다봤다.
“브랜드 마케팅 전문 업체 몇 곳의 제안서를 받았습니다. 방송 날짜에 맞춰 우리 한의원 홍보도 강화 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다들 자리로 돌아가서 일과 시작을 준비하죠. 오늘도 즐겁게 보냅시다.”
한지호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원장님!”
각자의 자리로 흩어지는 직원들의 모습을 지켜보니 마음 한 구석이 든든했다.
한지호는 이들을 단순한 직원으로 여기지 않았다.
개원 한 달이 넘어가며 서로 신뢰를 쌓았고, 인간적인 믿음도 주고받았다.
그는 자신의 울타리 안에 들어온 소중한 식구들을 지키기 위해 원화 한의원이라는 성(城)을 더 크고 강하게 키울 작정이었다.
방송에 출연한 것도, 홍보 전문가들에게 브랜드 마케팅을 맡기려는 것도 원화 한의원을 위해서다.
개원을 한 이상 확실하게 병원 입지를 다져놓는 게 한지호의 우선순위 첫 번째에 올라 있다.
내실을 다져 독보적인 VIP 전문 한의원으로 자리매김하는 것. 그 목표를 향해 한지호는 쉬지 않고 달릴 준비가 돼 있었다.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간다.
매일 매일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훌쩍 지나간 세월에 후회만 남기게 될 것이다.
지난 수요일, 첫 촬영을 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두 번째 촬영을 하게 됐다.
한지호는 조기운과 함께 MBS 방송국에 들렀다.
원화 한의원이 문을 연 이후에도 청우단 고객들을 집중 관리하는 조기운의 견문을 넓혀주기 위해서였다.
또 연예인들처럼 매니저가 없으니 조기운이 동행해서 사소한 걸 챙겨주면 편할 것 같았다.
제작진에게 미리 말을 해놓았기에 방문증을 발급 받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한지호와 함께 대기실로 들어온 조기운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그렇게 얼어있어?”
“마치 처음 청우단 고객과 미팅을 할 때와 비슷한 기분입니다, 형님.”
“그때도 잘 해냈잖아. 누가 보면 너가 촬영하는 줄 알겠다.”
“방송국이라고 하면 어마어마한 곳처럼 느껴져서…….”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는 조기운에게서 예전의 순진한 모습이 엿보였다.
한지호는 미소를 지은 채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기운아, 내 몸은 하나인데 갈수록 할 일은 많아질 거야. 일주일에 며칠은 병원에 묶여 있어야 하고, 또 하루는 이렇게 촬영을 해야 하고.”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하신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너가 나를 대신해서 여러 일들을 책임지고 도와줘야 해. 지금처럼 청우단 관리를 하는 것뿐 아니라 더 많은 일을 맡길 시기가 다가온 것 같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호 형님.”
“방송국 촬영도 허투루 보지 말고, 여기 일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잘 봐둬. 눈썰미 좋잖아?”
“넵!”
“명심해. 넌 내가 바빠서 못 나가는 자리에서 나를 대행하는 사람이야.”
“기대하고 믿어주시는 만큼 더 많이 배우겠습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조기운은 아직까지 성장하는 단계다.
한지호는 그의 바른 인성과 무한한 가능성만 보고 기대를 걸었다.
조기운이 청우단 고객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다.
점차 한지호가 유명해질수록 조기운이 그를 대신해 해야 할 일도 늘어날 것이다.
그때가 코앞으로 다가온 것 같았고, 견문을 넓히며 경험을 쌓은 조기운도 20대 중반답지 않게 충실하고 믿음직스런 면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똑똑-
그때 누군가 대기실 문을 두드렸다.
아마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MBS 직원일 것이다.
“한 원장님, 메이크업 들어가실게요.”
예상대로 메이크업 담당이 화장 용품 박스와 함께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지난주에 한 번 호흡을 맞춘 사이라 괜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한 원장님, 워낙 원판이 좋으셔서 메이크업도 잘 받으시는 거 같아요. 오늘도 자연스럽게 잘 해드릴게요.”
메이크업 담당이 너스레를 떨었다.
한지호는 미소를 머금은 채 거울 앞에 앉았다.
<건강 백서, 진짜! 가짜!>의 2화에서 다룰 주제는 다이어트 식품이다.
다이어트에 효과가 좋다고 알려진 각종 식품들의 허와 실을 낱낱이 분석할 계획이었다.
전국민이 다이어트에 관심을 갖고 있으니 1화 크로스 핏보다 더 반응이 뜨거울 것 같았다.
1화로 시청자 반응을 살피며 이슈를 몰고, 2화부터 승부를 걸겠다는 채성일 PD의 전략이 담긴 주제였다.
한지호는 메이크업을 받으며 머릿속으로 준비한 자료와 멘트를 곱씹었다.
작가들이 대본을 써주지만 애드립 멘트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서양 의학을 대표하는 전문가 게스트인 양승찬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준비를 하고, 더 위트 있게 멘트를 칠 필요가 있다.
한지호는 은근히 자신을 견제하는 양승찬의 냉랭한 태도를 체감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프로그램을 통해 협력 할 생각이었지만, 상대가 먼저 이빨을 드러내면 이쪽에서도 가만 있을 수 없다.
그는 누가 <건강 백서, 진짜! 가짜!>의 간판이 될지 5회가 지나지 전에 확실하게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다 됐어요! 역시 화장 너무 잘 받으세요, 한 원장님!”
메이크업을 끝낸 담당 직원이 호들갑을 떨었다.
MBS 방송국 소속인 메이크업 담당의 말처럼 방송용 화장을 한 한지호는 훈남 포스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배용준을 닮은 양승찬의 외모도 준수한 편이지만 한지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대기실 뒤편에 앉아있던 조기운도 메이크업을 마친 한지호를 보고 엄지를 치켜 올렸다.
한지호는 베테랑 방송인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다시 수많은 카메라 앞에 설 시간이 왔다.
대기실에서 나와 촬영 스튜디오로 향하는 그의 걸음 걸음에 자신감이 흘러넘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