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유건영이 관리하는 고객들은 각계각층에서 명성을 쌓은 오피니언 리더들이다.
그 중에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인테리어 디자인 스튜디오의 소장도 있었다.
순조롭게 인테리어 업체를 선정했으니 직원을 뽑을 차례였다.
성형외과에서 발탁한 정주은과 그녀의 예전 병원 동료 두 명의 채용은 확정됐다.
정주은과 최리나가 상담 코디네이터 역할을 맡고, 이주희는 안내데스크를 담당할 것이다.
한의원 전체 행정을 관리해야 하는 사무장은 중년 남성인 게 좋다.
한지호는 투자자인 황만금에게 사무장으로 적합한 인물을 추천받았다.
이름은 박우식, 나이는 40대 초반이고 대기업 재무팀을 거쳐 황만금 밑에서 일을 했던 사람이다.
몇 년 전 독립을 했지만 악재가 겹쳐 부도를 내고 재기하기 위해 새로운 자리를 물색하는 중이라고 한다.
황만금 밑에서 일했던 사람이라면 길게 고민 할 필요가 없다.
박우식 역시 황만금이 추천을 했기에 흔쾌히 사무장 제의를 받아들였다.
평범한 한의원이었다면 자기 사업까지 했던 박우식이 사무장으로 들어올 리 없었다.
하지만 황만금이 한지호의 성장 가능성을 보증했고, VIP 전문 한의원이라는 점이 박우식의 마음을 움직였다.
직원과 사무장은 주위의 추천을 통해 손쉽게 채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지호를 직접 도와줄 간호사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국내 한의학계에서 최고의 간호사들은 대부분 위천 한방병원에서 일한다.
위천 한방병원은 영동 한의원과 함께 국내 한의학계를 이끌고 있다.
게다가 서울을 비롯해 각 지방에 분원을 둘 정도로 거대한 조직이었다.
양의학계에서 뛰어난 간호사들은 서울대 병원이나 아산 병원, 삼성 병원 등에서 일한다.
마찬가지로 한의학계에서 일하며 두각을 나타낸 간호사들은 위천 한방병원에 소속된 경우가 많다.
연봉과 대우, 사회적인 인지도 등 모든 면에서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간호사를 까다롭게 고를 필요 없이 위천 한방병원에서 빼오기로 작정했다.
위천 한방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간호사라면 검증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더 좋은 조건으로 스카웃을 하면 위험 부담 없이 우수한 간호사를 영입하게 되는 것이다.
어차피 개원을 할 때부터 직원들에게 업계 최고 대우를 해주기로 마음먹었기에 위천 한방병원보다 좋은 조건을 부르는 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돈을 적게 주면서 열정을 요구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받는 돈만큼의 책임감을 느낀다.
한지호는 업계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는 대신 직원들이 최선의 노력과 열정을 보여주길 기대했다.
대우에 걸맞은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냉정하게 쳐낼 각오도 하고 있었다.
사회생활에서는 기브 엔 테이크가 확실해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회사나 병원은 기브(give)를 나중에 하고 직원들에게서 먼저 열정을 테이크(take) 하려고 한다.
이렇게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방식으로는 직원들의 동기를 자극하기 힘들다.
한지호처럼 먼저 최고의 대우를 주면서 동기를 유발하는 게 장기적으로 훨씬 현명한 방법이다.
그가 일련의 과정을 거쳐 위천 한방병원에서 스카웃한 간호사는 조민주와 이해나다.
조민주는 한방 병원 간호 경력이 10년 이상인 30대 중반의 베테랑 간호사였다.
이해나는 20대 후반의 간호사로 위천 한방병원에서 일을 한 지 2년밖에 안 됐지만 조민주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한지호가 조민주를 스카웃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이해나도 따라오게 된 것이다.
이로서 안내 직원 한 명, 코디네이터 두 명, 사무장 한 명, 간호사 두 명의 진용이 갖춰졌다.
처음 시작하는 한의원치고는 직원들을 많이 뽑은 셈이다.
병원의 규모도 29살 한의사의 첫 번째 개원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넓었다.
역삼역 대로변 빌딩의 1층 절반과 2층이라면 웬만한 개인 한의원 중에서는 손꼽히는 규모다.
황만금이라는 확실한 투자자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한지호가 스스로를 믿고 자신감 넘치게 배팅을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몸을 사리며 망하지 않는데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화려하고 획기적인 방식의 개원으로 낡은 한의학계에 파문을 일으킬 자신이 있었다.
한지호는 한의원을 여는데 필요한 돈과 장소, 사람을 모두 갖췄다.
대충 구색을 맞춘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진용을 구비했다.
이제 남은 것은 실전의 현장에서 싸워 이기는 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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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가슴이 막 요동치고 있습니다. 제가 너무 오버하는 걸까요?”
조기운이 한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말했다.
티는 내지 않아도 한지호 역시 감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둘은 역삼 M 타워 앞에서 간판이 올라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인테리어 공사가 완성 단계에 이르렀고, 계획대로 한지호의 한의원 간판이 외부에 부착되는 순간이었다.
원화(元化) 한의원.
다소 독특한 이름이다.
하지만 한지호는 자신의 한의원 이름으로 다른 말을 떠올릴 수 없었다.
원화는 삼국시대 최고의 신의로 칭송받았던 화타의 자(字)다.
한지호의 전생인 규호는 화타의 제자였고, 의술과 무공의 뿌리를 화타가 창안한 오금희에 두고 있다.
물론 규호는 화타의 의술을 넘어서 민초들의 의성이라 불렸었다.
그러나 화타와 오금희를 빼놓고 전생의 규호와 현생의 한지호를 이야기 할 수는 없다.
단순히 전생의 스승이었던 화타를 기리기 위해서만 원화라는 이름을 쓴 건 아니었다.
한자로 원(元)은 근본이자 으뜸이라는 뜻이고, 화(化)는 된다는 뜻을 갖고 있다.
두 글자를 합하면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뜻이 완성된다.
고대 한(漢)나라의 전통 의술을 계승한 한지호에게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뜻이 담긴 원화보다 어울리는 말을 찾기 힘들었다.
곧이어 시공을 하는 직원들이 간판을 붙였다.
역삼 M 타워 2층에 큼지막하게 원화 한의원이라는 간판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기분이 묘하긴 하네, 정말.”
의대와 한의대를 나온 이들 대부분은 개원을 꿈꾼다.
그 꿈을 29살에 이룬 한지호는 남다른 감회를 느끼며 간판을 쳐다봤다.
- 원화 한의원 -
간판을 붙인 걸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개원을 하고 망하는 의사와 한의사들이 넘치는 세상이다.
하지만 이 순간의 기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받았던 한지호가 처음으로 세상에 자신의 이름으로 성을 쌓은 것이다.
그는 원화 한의원이라는 성을 더욱 튼튼하고 높이 올리겠다고 다짐했다.
자신의 성 안에 들어온 사람들을 거친 풍파에서 지켜내겠다는 각오도 강해졌다.
“축하드립니다, 형님.”
“아직 정식으로 개원도 안 했잖아. 자축은 나중에 하자.”
한지호는 조기운의 말을 물렸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다.
인테리어 공사가 마무리되고 정식으로 개원을 하기까지 열흘 정도 남았다.
그러나 간판이 올라갔다는 사실 자체가 감동적인 건 분명했다.
“한 원장님, 직접 현장까지 오셨습니까!”
그때 역삼 M 타워 안에서 청바지를 입은 중년 남성이 뛰어 나왔다.
원화 한의원의 인테리어를 책임진 베를린 스튜디오의 임형빈 소장이었다.
독일 유학파 출신으로 굵직한 국제대회에서 여러 차례 수상한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다.
유건영의 소개로 그를 알게 된 한지호는 원화 한의원이 추구하는 컨셉을 공유했고, 분야는 달라도 서로가 말이 통한다는 걸 느꼈다.
임형빈 역시 나이를 떠나 한지호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껴 클라이언트 이상으로 깊은 대화를 나눴었다.
“방해가 될까봐 일부러 미리 연락드리지 않았습니다, 임 소장님.”
“방해라니요. 무슨 말씀을요.”
“오늘 간판이 달린다는 소식을 듣고 조용히 구경만 하려했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간판이 곧 얼굴인데, 역사적인 순간을 직접 보셔야지요.”
“마무리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넵! 최선을 다해서 역작을 만들어보겠습니다. 기대해 주십시오, 한 원장님.”
유쾌한 태도로 자신감을 피력한 임형빈이 손을 흔들고 다시 돌아갔다.
그는 외국에서 오래 공부를 해서인지 나이에 비해 격의가 없고 진솔했는데, 그런 점이 한지호의 마음에 들었다.
“참 재미있는 분인 거 같습니다.”
“그렇지?”
조기운도 임형빈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임 소장님은 엄청 유명하신 분이라고 들었는데 옷도 그렇고, 태도도 무척 소탈하십니다. 형님에게도 클라이언트지만 한참 어린 편인데 깍듯하게 한 원장님이라 부르고, 또 그러면서 너무 딱딱하지 않게 대하지 않습니까.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노하우가 몸에 배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단한 거야. 잘 나갈수록 목에 힘이 들어가기 마련인데 자연스럽게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네. 몇 번 못 봤지만 배우는 바가 많습니다.”
“너도 대단해. 항상 새로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뭔가를 배우려고 하니까.”
한지호는 조기운을 칭찬해주며 어깨를 툭 쳤다.
주먹으로 장난스럽게 어깨를 때리는 건 잘 하고 있다는 표현이다.
조기운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었다.
“모두 형님 덕분입니다. 청우단 고객들을 만나며 일거수일투족을 배우라고 하셨으니까요. 돈 주고도 못 배울 것들을 일을 하며 배우고 있으니 저는 행운아라고 생각합니다.”
“긍정적인 마인드까지, 누구 동생인데 이렇게 괜찮은 놈인 거야?”
“형님 동생입니다.”
“그래, 그래. 든든하다, 든든해!”
한지호는 다시금 조기운의 어깨를 주먹으로 때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나날이 성장하고 있는 조기운은 그의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였다.
청우단 고객 관리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엘리트 계층인 고객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며 한 달 2000알의 주문량을 맞추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조기운은 기대 이상으로 청우단 고객들의 신뢰를 받으며 자기 역할을 해냈다.
한지호는 그에게 원화 한의원 내부의 역할을 맡기지 않았다.
한의원 소속으로 조기운을 묶어둘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청우단은 원화 한의원에서 공식적으로 유통되겠지만, 지금처럼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고객들에게 우선적으로 판매 할 예정이었다.
조기운은 계속해서 청우단 고객들을 관리할 예정이었고, 앞으로도 한지호가 부여하는 특별한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한지호는 조기운을 어떻게 활용할지 비전을 갖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조자룡이라는 잠재력을 품고 태어난 인재다.
원화 한의원이 자리를 잡고, 한지호도 더욱 유명해지면 조기운의 역할 역시 커질 것이다.
“간판도 봤고, 배고픈에 밥이나 먹으러 가자.”
“네, 형님.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
“뭐라고?”
“가끔은 제가 밥을 사는 날도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이번 달엔 월급 말고 인센티브도 많이 주셨으니 비싼 밥으로 사겠습니다.”
“살다보니 이런 날도 다 오네. 좋아, 그럼 완전 비싼 거 먹는다?”
“어떤 거 드시고 싶으십니까?”
“청담동에 스시효로 가자.”
“거기 혹시 1인분에 15만 원 정도 한다는…….”
“맞아. 저녁은 20만 원 정도 할 걸?”
“형님, 아직 제 월급으로 거긴 좀…. 너무 하십니다!”
조기운이 약한 모습을 보이며 울상을 지었다.
동생을 약 올리는데 재미가 들린 한지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밥 산다는 말 하지마. 니가 나중에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밥은 계속 형이 산다. 알았지?”
“네!”
“진짜 스시효로 가자. 간판 올라간 날 기념으로 너한테 클래스가 다른 초밥의 세계를 보여주지.”
한지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조기운을 이끌었다.
원화 한의원의 간판이 올라간 날, 아니 한지호 자신의 성에 깃발이 꽂힌 날이라 기분이 무척 좋은 모양이었다.
날도 좋고 바람도 선선했다.
한지호와 조기운은 개원이라는 새로운 전기를 준비하며 뜨거운 의기를 투합하고 있었다.
6장, 원화 한의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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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았다.
더위가 한풀 꺾이고 가을이 훌쩍 다가온 오늘은 여느 날과 달랐다.
한지호가 쌓은 성, 원화 한의원이 역삼 M 타워에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기 때문이다.
방송국 관계자나 신문사 기자들을 모아놓고 떠들썩하게 개원식을 열지는 않았다.
그러나 각계각층에서 목소리를 좀 낸다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참석했다.
한지호에게 청우단을 구매한 고객들, 그리고 황만금과 김해수, 이지은 등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 자리를 빛내준 것이다.
직접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이 보낸 화환도 개원식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1층 현관 입구에 좌우로 진열 된 화환만 살펴봐도 한지호가 지난 몇 달 사이 얼마나 눈부신 활약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