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54화 (54/255)

# 54

그가 한의원을 열 5층짜리 빌딩은 역삼 M 타워라는 거창한 이름을 갖고 있었다.

5층 건물에 타워라는 이름이 어울리진 않지만, M이라는 이니셜에서 메디컬 전문 빌딩을 향한 건물주의 집념이 느껴졌다.

끼이익-

한지호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지 않고 빌딩 앞 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스마트 폰을 꺼낸 그가 몇 시간 전에 알아낸 정주은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주은 씨? 오늘 병원에서 만났던 한지호입니다.”

“네, 저 방금 막 퇴근했어요.”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금방 내려갈게요.”

퇴근을 해서 그런지 정주은의 목소리가 더 활기차게 들렸다.

다 죽어가던 사람도 회사 밖으로 나오면 쌩생하게 살아나는 게 바로 퇴근의 기적이다.

한지호가 직접 본 정주은은 병원 안에서 일을 할 때도 긍정적인 기운을 뿜어냈었다.

그러나 역시 퇴근의 기쁨을 숨길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지이잉-

한지호는 빌딩 로비에서 나오는 정주은을 발견하고 조수석 유리창을 내렸다.

그가 열린 창틈 사이로 그녀를 불렀다.

“주은 씨, 여기에요!”

크게 울린 음성을 듣고 고개를 돌린 정주은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지호가 매끈하게 잘 빠진 검은색 아우디 A5를 가지고 자신을 기다릴 줄 몰랐기 때문이다.

“우와-. 이거 지호 씨 차에요?”

“네. 일단 타요.”

“오늘 처음 만났는데 이렇게 차에 타도 될 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원장님이랑 이야기도 나눴는데요?”

“하긴, 그렇죠. 이상하거나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아요.”

잠깐 망설이던 정주은이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탔다.

그녀는 브라운 색의 고급스러운 가죽 시트에 또 한 번 감탄했다.

단순히 비싼 외제차를 좋아하는 여느 여자들과는 조금 다른 반응이었다.

너무 대놓고 신기해하는 모습이 순진해보였다.

“갑자기 연락처를 물어보고, 또 바로 만나자고 해서 놀라지 않았어요?”

“당황스럽긴 했는데…… 괜찮은 분이신 거 같아서요.”

조수석에서 안전벨트를 한 정주은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한지호는 자신이 왜 연락처를 물어봤는지 먼저 밝혀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오늘 원장님을 만난 건 병원 자리를 인수하기 위해서입니다.”

“네?”

“주인 씨가 일하고 있는 성형외과가 곧 문을 닫을 예정이란 건 알고 있어요?”

“그게 정말인가요? 아직 아무 이야기도 못 들었는데…….”

정주은은 적잖이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병원이건 회사건 폐업을 결정했으면 직원들에게 빨리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

그래야 다들 자기 살길을 찾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형외과 원장은 부동산에 매물을 내놓고도 직원들에게 폐원 예정이란 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한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성형외과가 있는 자리에 한의원을 열 겁니다.”

“한의원이요? 그럼 설마?”

“맞습니다. 제가 직접 개원을 준비하는 중입니다. 주은 씨의 연락처를 물어본 것도 스카웃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정주은은 연달아 터지는 빅 뉴스에 넋이 나간 것 같았다.

성형외과가 폐원 예정이라는 소식부터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20대로 보이는 한지호가 성형외과 자리에 한의원을 열고, 또 그녀를 스카웃하고 싶다는 말을 하니 어안이 벙벙해졌다.

한지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핸들을 잡았다.

“조용한 곳으로 가서 이야기하죠.”

“네? 네.”

부와아아앙-

엑셀을 밟자 시원한 배기음과 함께 A5가 도로 위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한지호는 한강 잠원 지구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얼마 전 이지은을 만나서 보약을 전달했던 조용한 카페였다.

어디를 가도 사람들의 시선과 환호를 받는 이지은이 아지트로 애용할 만큼 한적한 곳이다.

집중해서 이야기를 나누기에 그보다 더 적당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기, 그런데요.”

잠원 지구로 가는 도중 정주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깜짝 놀랄만한 소식을 연달아 듣고 난 후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네. 편하게 말해요.”

“지호 씨, 아니 그러니까 한 원장님이 되시는 거죠?”

“그렇습니다.”

“아까 새로 여실 한의원에 절 스카웃하고 싶으시다고……. 오늘 처음 만났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해서요.”

“첫 인상, 첫 느낌. 뭐 이런 걸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주은 씨에게서 느껴지는 에너지가 참 밝고 따뜻했고, 환자들을 진심으로 대하며 친절하게 일을 할 거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성형외과 코디네이터처럼 한의원에도 비슷한 개념을 도입할 생각입니다.”

“전 사실 제가 마음에 들어서 데이트 신청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한지호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정주은이 농담을 던졌다.

물론 100% 농담인 건 아니었다.

한지호가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 그녀는 데이트 신청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멀쩡한 남자가 연락처를 묻고 퇴근 시간에 만나자고 하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한지호도 오해를 살 행동이었다는 걸 알기에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그래도 번호를 주고 병원 앞으로 나온 걸 보면 제가 영 별로인 건 아니었나보군요.”

“훈남이시잖아요.”

“감사합니다. 주은 씨도 보면 볼수록 인상이 좋은 거 같습니다.”

한지호의 멘트는 립 서비스가 아니었다.

정주은의 외모는 평범한 편이었다.

강남 일대의 연예인스러운 미녀들에 비하면 눈에 띄는 얼굴은 아니다.

그러나 화려하지 않고 수수한 분위기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줬다.

게다가 밝은 표정과 싹싹한 태도가 어울려 묘한 매력이 느껴졌다.

한지호와 정주은은 어색함을 풀고 대화를 나누며 잠원 지구의 카페에 다다랐다.

한지호는 정식으로 한의원 직원들을 채용하기 앞서 느낌이 좋은 인재를 찾아냈고, 그녀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직전이었다.

강남 중심부에 한의원을 여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

“형님!”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조기운이 큰 소리로 한지호를 불렀다.

일주일 넘게 못 봤기에 목소리에서 진한 반가움이 느껴졌다.

“살이 좀 빠진 거 같다?”

한지호는 조기운과 악수를 나누며 얼굴을 찬찬히 살펴봤다.

깔끔한 세미 정장을 입은 조기운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옷을 입는 스타일과 전체적인 분위기가 의경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한지호를 대신해 청우단 고객들을 관리하는 그는 엘리트적인 면모까지 풍겼다.

조기운을 보고 대학 문턱도 밟지 않았다고 여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험난한 인생길에서 한지호를 만난 그는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괄목상대(刮目相對)하는 중이었다.

“일도 많아지고, 운동도 열심히 했더니 살이 좀 빠진 것 같습니다.”

“이 정도로 일이 많아졌다고 하면 곤란한데?”

“네! 엄살 피우지 않겠습니다, 형님.”

“군기는 여전하구나. 들어가서 맥주나 한 잔 하자. 오늘 다른 스케줄 없지?”

“없습니다. 제가 냉장고에서 맥주 가져오겠습니다.”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온 조기운이 재빨리 부엌으로 향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다.

냉장고에서 하이네켄 두 캔을 가져온 조기운이 미소를 지었다.

“왜 웃어?”

“오랜만에 형님을 뵈니까 좋아서요.”

“짜식, 싱겁기는.”

한지호는 맥주 캔을 따서 앞으로 내밀었다.

조기운과 가볍게 건배를 한 그가 차가운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둘은 소파에 앉지 않고 거실의 통유리 앞에 나란히 섰다.

전면유리 너머로 보이는 탁 트인 강남의 전경이 좋기 때문이다.

“개원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단숨에 맥주 캔을 반쯤 비워버린 조기운이 입을 열었다.

한지호는 최근 개원 준비에 집중하고 있었고, 그로인해 일주일이 넘도록 조기운과 만나지 못했었다.

그가 개원을 하면 조기운의 업무 역시 늘어나게 될 것이다.

한지호를 형님이 아니라 주군처럼 믿고 따르는 조기운이 개원에 관심을 가지는 게 당연했다.

“아마 한 달하고 열흘이면 개원을 하게 될 것 같다. 성형외과는 폐원 절차에 돌입했고, 내부 인테리어만 바꾸면 한의원을 여는데 문제가 없으니까. 약재는 명징약초에서 공급받기로 했어.”

“직원들은 어떻게……?”

“일단 정주은이라는 성형외과 직원을 VIP 코디네이터로 뽑았어. 중요한 환자들의 상담을 책임지고, 값비싼 보약 등 특별한 치료를 안내하는 역할을 맡길 거야. 주은 씨의 추천을 받아 여직원 몇 명을 더 채용할 거고, 사무장도 알아봐야지.”

“다른 한의사는 두지 않으실 겁니까? 형님께서 직접 환자들을 다 보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걱정됩니다.”

“그런 생각도 했었는데, 평창동의 황만금 회장님과 사업계획서를 검토하며 결정을 내렸다. 생각을 전환해서 이제껏 없었던 특별한 한의원을 만들기로.”

한지호가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조기운으로선 이제껏 없었던 특별한 한의원이 무엇을 뜻하는지 예측하기 힘들었다.

어쨌거나 다른 사람도 아닌 평창동의 황만금과 의논한 결과라면 성공 가능성이 충분할 것이다.

돈 냄새를 맡는데 탁월한 감각을 소유한 황만금이 어설픈 계획에 동의했을 리 없다.

“기운아. 지금 내가 상류층이나 연예계 사람들, 그러니까 VIP들을 대상으로 진료를 하고 있잖아. 심각한 질병을 치료하는 것뿐 아니라 이지은 씨의 성대를 풀어주고, 야소녀 멤버들에게 보약을 지어주는 것도 포함해서.”

“네, 형님.”

“VIP들은 돈을 쓰는 단위가 달라. 자기 몸에 직결되는 일에는 더더욱 돈을 아끼지 않고. 황 회장님이나 김해수 씨는 그렇다 쳐도 고음을 회복시켜줬다고 3천만 원을 주고, 또 보약 가격으로 수천만 원을 지불하는 사람들이지.”

“정말…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네요.”

“그래, 완전히 다른 세계. 나는 그 세계에서 살아남으며 위로 올라갈 거다. 그래서 우리 한의원도 VIP들을 전문으로 상대하는 신개념 병원으로 만들 거야.”

“VIP 전문 한의원. 저도 처음 들어보는 병원이긴 합니다.”

“간단해. 사전에 예약한 사람들만 진료를 받는 거지. 전문 코디네이터가 친절하고 자세한 맞춤 상담을 하고, 특수한 치료비와 약 값이 어느 정도인지 넌지시 알려주면 게임 끝. 어차피 한의원에서 의료수가제 같은 건 있으나 마나한 제도니까. 일반 환자들은 사전 예약제도 자체에 거부감을 느낄 거고, 코디의 상담을 거치면 VIP들만 남지 않겠어.”

“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형님과 황 회장님은 확실히 놀라운 분들이십니다.”

“이 시스템이 정착되면 지금처럼 효율적으로 VIP들을 관리할 수 있겠지. 소문이 나면 내 밑에 들어오길 바라는 유능한 한의사들도 생길 테고.”

“저는 계속 형님만 믿고 따라가겠습니다!”

한지호의 포부를 들은 조기운은 목이 타는지 남은 맥주를 마셨다.

개원에 대한 구상을 알려준 한지호도 맥주 캔을 입으로 가져갔다.

차가운 맥주가 속을 시원하게 만들어줬다.

한지호는 완벽한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다.

효율적인 방법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내기 위해 VIP 맞춤 한의원이라는 유례없는 시도를 준비했다.

10억 원이라는 투자금을 어떻게 활용할지도 방안을 짜 놓았다.

그는 목표를 위해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품어준 낮은 곳도 잊지 않았다.

한의원이 자리를 잡으면 천사원을 다시 세우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뭔가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한지호는 몇 마디 말로 정의될 수 없는 입체적인 인간이다.

차가운 야망과 따뜻한 마음을 동시에 지닌 그의 행보에 속도가 붙고 있었다.

6장, 원화 한의원 (1)

모든 준비가 끝났다.

한지호는 건물주와 임대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 기간 1년, 보증금 3억 원에 월 임대료 3천만 원이라는 만만치 않은 액수의 계약이었다.

건물주는 부동산에서 계약을 진행하는 내내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젊은 한의사를 식구로 받아들이게 되어 무척 기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요즘 같은 경기에 곧바로 임대 계약이 체결됐고, 그것도 다른 업종이 아니라 건물주가 원하는 병원 계통이라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성형외과 원장에게 권리금을 지불했고, 건물주와 임대 계약도 체결했으니 개원의 팔부능선을 넘은 셈이다.

한지호는 성형외과가 폐원 절차에 돌입한 동안 괜찮은 인테리어 업체를 물색했다.

그는 VIP 전문 한의원답게 럭셔리하면서도 기품있는 인테리어를 원했다.

인터넷에서 대충 검색을 해서 업체를 선정할 수 없었다.

다행히 그에게는 다양한 인맥이 있었다.

사람이 곧 재산이라는 건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도 증명된다.

플래티넘 홀딩스의 유건영에게 전화를 건 한지호는 저명한 인테리어 업체 소장을 소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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