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어쩌면 자신의 한의원이 들어설지도 모를 5층짜리 빌딩을 쳐다본 그가 1층 로비로 걸음을 옮겼다.
부동산 중개업자 없이 혼자 왔지만 어색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중개업자는 한지호를 대신해 물밑에서 건물주와 임대 협상을 벌이고 있다.
성형외과 원장이 먼저 나가겠다는 의사를 표시했기에 특별히 어려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건물주야 원래 정해진 그대로의 임대료만 받으면 만족할 것이다.
문제는 성형외과 원장이 순조롭게 건물을 비워주느냐이다.
직접 발걸음을 한 한지호는 오늘 만남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길 바라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어느 병원 찾아오셨나요?”
로비에 들어서자 안내 데스크 직원이 말을 걸어왔다.
각 층에 입주한 병원들이 내는 관리비로 공통의 안내 직원을 두는 게 이 빌딩의 특별한 점이었다.
1층 입구 로비에 안내 데스크 직원이 있으니 빌딩 전체의 품격이 높아지는 것 같았다.
경호 직원과 관리인이 아닌 안내 데스크를 따로 운영하는 빌딩은 많지 않다.
빌딩의 층수는 낮아도 마치 대기업의 사옥 같은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성형외과 원장님과 약속을 하고 왔습니다.”
“네, 저기 보이는 입구를 통해 상담실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간단히 안내를 해준 직원이 데스크에서 버튼을 눌렀다.
한지호는 버튼이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 한눈에 알아봤다.
로비에 들어온 손님이 어디로 가는지 각 병원에 알려주는 것이다.
안내 데스크에서 버튼을 누르면 해당 병원에 알람이 울린다.
그래서 곧 환자가 들어올 것을 알고 준비하게 만드는 시스템이었다.
사소해 보이지만 혹시 모를 실수를 방지하는 훌륭한 아이디어였다.
환자가 병원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간호사나 직원이 자리를 비운 상태면 썰렁한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로비의 안내 데스크에서 미리 알람을 보내주면 그런 일을 막을 수 있다.
한지호는 알면 알수록 이 빌딩이 마음에 들었다.
“고마워요.”
안내 데스크 직원에게 인사를 한 그가 성형외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지나쳐 1층 상담실 앞으로 걸어가니 자동문이 열렸다.
자동문 너머에는 미리 알람을 받은 성형외과 직원이 서있었다.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원장님을 뵙기로 했습니다.”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한지호입니다.”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주시겠어요? 금방 여쭤보고 안내해드릴게요.”
깔끔한 정장 차림의 여직원은 무척 사근사근했다.
그녀의 말대로 상담실 소파에 앉은 한지호는 새삼 주변의 한산함을 느꼈다.
잘 나가는 성형외과 상담실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북적인다.
그에 반해 여기에선 다른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코디네이터들과 개별 상담을 하는 작은 방 안에 몇 명의 사람들이 들어가 있는 게 전부였다.
병원들이 불경기라고 죽는 소리를 하는 게 피부에 와 닿았다.
괜히 성형외과 자리가 매물로 나온 게 아니었다.
버티고 버티다가 지친 성형외과 원장이 두 손 두 발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사근사근한 여직원이 다시 왔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2층 원장실로 안내해드릴게요.”
“아닙니다. 잠깐 앉아있었는데요, 뭘.”
여직원은 그리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웃는 인상을 타고난 것 같았다.
서비스 업종에서도 자연스러운 친절이 몸에 묻어나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한지호는 그녀의 명찰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고 뒤를 따랐다.
‘정주은? 느낌이 괜찮은 사람이네. 마음에 들어.’
그는 성형외과 여직원에게 이성으로서 관심을 가지는 게 아니었다.
곧 한의원을 열 입장에서 함께 할 인재를 물색하는 중이었고, 그 와중에 정주은이라는 성형외과 여직원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물론 그녀는 한지호의 마음을 알 리 없었다.
20대로 보이는 한지호가 성형외과 자리를 인수할지도 모른다는 걸 어떻게 알겠는가.
그저 성형외과 원장의 지인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정주은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간 한지호는 병원의 넓은 규모에 감탄했다.
1층의 절반을 쓰는 상담실도 웬만한 병원 전체보다 넓고 쾌적했다.
하지만 2층은 그보다 두 배 더 넓고 화려했다.
성형외과 의료 장비를 제외하고 인테리어에 쏟아 부은 돈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환자가 없어서 병원을 빼는 처지에 권리금 1억을 부른 이유가 납득이 됐다.
‘인생을 걸고 개원을 했을 텐데, 안타까운 현실이야.’
한지호는 얼굴도 본 적 없는 성형외과 원장이 측은해졌다.
의사에게 개원은 일생일대의 꿈이다.
야심차게 성형외과를 차렸다가 실패한 원장의 앞날은 꽤 험난할 것이다.
다른 병원의 페이 닥터로 일하면 제법 큰돈을 받겠지만, 월급의 대부분을 빚을 갚는데 써야 할 터였다.
“원장님. 손님 오셨어요.”
그러는 사이 정주은이 원장실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2층에 있는 몇몇 환자들과 간호사들은 한지호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원장실 안에서도 들어오라는 소리 대신 침묵만 흘렀다.
하지만 정주은은 침묵을 승낙으로 받아들이고 원장실 문을 열어줬다.
“들어가세요.”
그녀의 인사를 받으며 원장실 안으로 들어선 한지호는 책상에 앉아있는 사람을 바라봤다.
하얀 가운을 입은 40대 중반의 남자가 무감정한 눈빛으로 한지호를 마주보고 있었다.
제법 마른 체형과 유행 지난 무테 안경이 의사다운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가 바로 1층과 2층을 통째로 내놓은 성형외과의 원장이었다.
원장은 한지호가 들어왔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무테 안경 너머 삭막한 시선으로 한지호를 응시할 뿐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화로 인사드렸던 한지호입니다.”
한지호가 먼저 인사를 하자 원장이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자리에 새로 개원을 할 거라던……?”
“맞습니다. 제가 그 사람입니다.”
“개원을 준비하는 의사치고는 너무 어려 보여서 말이오. 혹시 전공이 어떻게 되시오?”
“한의사입니다.”
“아……. 역시 그렇군.”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원장의 얼굴에서 무시라는 감정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대부분의 한의사들은 면허를 따고 나면 인턴이나 레지던트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의대생들보다 훨씬 일찍 개원을 할 수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서양 의학을 전공한 의사들이 한의사를 무시하는 건 흔한 풍조였다.
서양 의학의 본산인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는 한의학을 연구하는 센터가 속속 열리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선 한의학을 향한 조롱과 멸시가 점점 심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일단 앉읍시다.”
일어섰던 원장이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한지호는 책상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았다.
성형외과 환자들이 원장과 상담을 할 때 쓰는 의자였다.
그는 자신을 대하는 원장의 태도가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화부터 낼 필요는 없다.
한지호는 주도권을 쥔 쪽이 누구인지 똑똑히 알려줄 작정이었다.
“병원을 내놓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자리에 개원을 하려고 합니다.”
“어려 보이는데 집에 돈이 많은가? 아니면 인생을 걸고 은행에서 개원 대출이라도 받은 건가…….”
성형외과 원장이 혼잣말처럼 반말을 내뱉었다.
그럼에도 한지호는 흥분하지 않았다.
대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병원 운영이 어려우시다고 들었는데 제 걱정까지 해주시고… 감사합니다.”
밝은 표정으로 정곡을 찌른 말에 원장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한지호를 쳐다봤다.
한지호는 원장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에서 뿜어지는 기세는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오금희의 기운이 눈동자에 실려 은근히 원장을 압박했다.
“이 자리를 인수하려는 사람이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는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계속 병원을 운영하실수록 적자가 더 커지는 상황이라면 빠른 시일 안에 양도를 하시는 게 서로에게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한지호는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치고 들어갔다.
성형외과 원장과 개인적인 친분을 다지기 위해 마련한 자리가 아니다.
어차피 병원 인수가 확정되면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사람이다.
그는 최대한 냉정하고 정확한 언어로 협상을 진행시켰다.
다행히 원장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당장의 불쾌한 기분을 접어두고 자기 자신의 상황이 어떤지 판단했다.
원장이 나이를 거저 먹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나도 병원을 내놓은 이상 하루라도 빨리 정리했으면 좋겠소. 의료 장비야 다른 성형외과에 넘기기로 했고, 임대료는 건물주와 알아서 상의할 부분이고. 내가 제시한 권리금만 맞춰준다면 바로 절차를 밟을 것이오.”
“어차피 인테리어는 전부 새로 해야 합니다. 추구하는 컨셉과 특색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죠. 그리고 성형외과의 기존 환자들이 한의원으로 연결될 확률은 무척 낮습니다. 완전히 다른 전공이란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겁니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요?”
“5천. 제가 드릴 수 있는 권리금입니다.”
“뭐라고? 5천만 원?”
절반의 금액을 제시하자 원장이 무테 안경을 콧등으로 치켜 올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한지호는 맞장구를 쳐주지 않았다.
상대가 열이 오를수록 더욱 차가운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는 전생의 기억과 현생의 경험을 통해 협상의 방법을 터득했다.
29살 한지호가 40살이 훌쩍 넘은 성형외과 원장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이곳의 보증금과 임대료 시세는 주변에 비해서 높은 편입니다. 입지와 시설이 좋지만 요즘처럼 어려운 경기에 시세보다 높은 금액을 지불하고 들어올 사람이 많지 않을 겁니다. 마음을 굳히셨다면 하루라도 빨리 털고 나가는 게 원장님께 도움이 됩니다. 반면 저는 아쉬울 게 없죠. 꼭 여기가 아니더라도 개원을 할 수 있는 장소는 많으니까요.”
“으으음…….”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원장은 입술을 깨물고 고민에 잠겼다.
한지호는 재촉하지 않고 원장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누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지 명확히 알게 될 거라고 판단했다.
사실 10억 원의 투자를 약속받은 상황이니 권리금 1억을 다 줘도 상관없다.
그러나 작은 돈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큰돈을 제대로 굴리기 힘들다.
투자금이라고 해서 대충 사용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아낄 수 있는 돈이라면 당연히 아껴야 한다.
통 크게 돈을 쓰는 것과 허술하게 돈을 낭비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다.
한지호는 자신의 성을 쌓기 위해 세밀한 과정도 직접 조율하고 있었다.
이렇게 협상을 하는 것도 경험의 일환이고 공부가 된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곧이어 원장이 말문을 열었다.
처음에 비해 완전히 기세가 죽은 그는 한지호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8천 정도는 받아야 할 것 같소.”
“6천. 그 이상은 안 됩니다. 차라리 다른 자리를 알아보겠습니다.”
한지호는 말을 마치자마자 의자에서 일어섰다.
단순한 시늉이 아니라 진짜 최후통첩을 날리고 나가려는 것 같았다.
다급해진 원장이 한지호가 원하던 액수를 불렀다.
“7천! 깔끔하게 7천에 정리하는 거 어떻겠소!”
등을 반쯤 돌렸던 한지호가 원장을 쳐다봤다.
그는 언제 위압적인 기운을 뿜어냈냐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7천으로 정리하죠.”
원장은 뒤늦게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앉은 자리에서 순식간에 3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세이브한 한지호는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차근차근 성을 쌓아가는 중이었다.
강남 병원 바닥, 나아가 대한민국의 한의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들 한지호의 개원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5장, 카운트다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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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형외과를 방문하고 돌아온 한지호는 뜻밖의 수확을 얻었다.
권리금을 절충하는 건 처음부터 예상했던 결과였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그는 성형외과 원장과의 독대로 3천만 원을 아끼고 나오며 정주은의 연락처를 받았다.
병원 입구에서부터 한지호를 안내해준 정주은은 코디네이터 업무까지 함께 보는 직원이었다.
그녀의 사근사근한 태도와 딱 적당한 수준의 친절은 가식이 아닌 것 같았다.
밝고 따뜻한 에너지를 타고난 사람으로 보였고, 한지호는 눈에 들어온 인재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연락처를 받은 한지호는 정주은이 퇴근 할 때까지 기다렸다.
물론 몇 시간 내내 주차장에서 정주은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그는 빌딩에서 멀지 않은 부동산 사무실에 들러 권리금 협상이 마무리 됐음을 알렸다.
권리금 협상이 끝났으니 나머지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 같았다.
중개업자와 임대차 계약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니 금방 퇴근시간이 됐다.
한지호는 부동산에서 나와 다시 차를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