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사람들이 회사나 학교에 묶여있는 시간대가 연예인들이 주로 움직이는 타이밍이다.
평일 오전 오후, 그리고 늦은 심야와 새벽 시간에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활동하기 쉽기 때문이다.
“여정 씨.”
한지호는 레스토랑 2층 구석 테이블에 앉아있는 김여정을 발견했다.
그녀의 테이블에는 건장한 체격이 남자 한 명과 비쩍 마른 여자 한 명이 더 앉아있었다.
보나마나 매니저와 코디네이터였다.
한지호를 알아본 김여정도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서오세요!”
그녀는 햇살 같은 미소와 상냥한 이미지로 대한민국 남심(男心)을 휘어잡았다.
야소녀 모임에서도 느꼈지만 김여정의 밝은 성격은 가식이 아니라 타고난 것 같았다.
한지호는 그녀의 미소에 웃음으로 화답하며 테이블의 빈 자리에 앉았다.
“식사 중이셨는데 방해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한 선생님은 식사 하셨어요? 참, 여기는 제 매니저 오빠와 코디 언니에요.”
그녀가 매니저와 코디를 소개시켜줬다.
둘은 한지호에 대해 익히 아는 듯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여정이 매니저 김승표입니다.”
“코디를 하고 있는 김유진이에요.”
매니저와 코디는 뉴스 기사를 통해 한지호를 접해서인지 전혀 경계를 하지 않았다.
아니면 김여정이 한지호에 대해 말을 아주 잘 해놓은 것 같았다.
“반갑습니다. 한의사 한지호입니다.”
“저희는 식사를 다 했으니 여정이와 천천히 이야기 하셔도 됩니다. 여정아, 밑에 있을게.”
매니저는 한지호와 김여정이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빠져 주려는 것 같았다.
아무리 한의사라고 해도 20대 남자가 김여정을 만나는 게 껄끄러울 법도 했다.
하지만 매니저의 태도는 깍듯했고, 쓸데없이 깐깐하게 굴지 않았다.
한지호 입장에서도 환영할 일이었다.
보약을 주문한 건 소속사가 아닌 김여정 개인이다.
그녀와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려면 아무래도 둘이 있는 게 편하다.
“이따가 내려갈게요.”
김여정은 사양하지 않고 매니저와 코디를 내려 보냈다.
곧이어 테이블에 둘만 남았다.
한지호는 준비해온 보약을 꺼내 올려놓았다.
눈을 반짝거리며 보약이 포장된 하얀색 상자를 쳐다보는 김여정이 귀여워보였다.
드라마 주연을 맡을 정도로 잘 나가는 연예인이지만, 이럴 때는 영락없이 호기심 많은 보통의 20대 초반 여자 같았다.
“이제 제 체질에 맞춰서 만들어진 보약인가요?”
“네. 그동안 여정 씨가 먹었던 보약들과는 효능에서 확실한 차이를 보일 겁니다.”
한지호는 자신감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오금희를 바탕으로 삼은 오행 체질 감별법이 사상 체질이나 팔 체질보다 정확하다고 믿었다.
김여정은 한지호의 자신감을 신뢰했다.
그가 야소녀 모임에서 오행에 근거한 체질 감별법으로 세 명이 평소 느끼던 몸 상태를 완벽하게 맞췄기 때문이다.
이미 이지은의 목을 일주일 안에 치료하며 믿음을 얻었던 한지호다.
김여정은 계속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보약이 든 상자를 챙겼다.
“드라마 새로 들어가는 게 체력적으로 부담스러웠는데, 큰 힘이 될 것 같아요.”
“여주인공이면 분량도 많아 촬영 현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하죠?”
“네. 저도 이렇게 메인 여주는 처음이라 긴장이 되네요.”
“잘 해내실 겁니다. 제가 만든 약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니 벌써 기쁘군요.”
“크리스탈이랑 지은이 보약도 완성 됐나요?”
“크리스탈 씨 소속사에 약을 전달했고, 오늘 밤에 이지은 씨를 만날 예정입니다.”
“한 선생님, 혹시 그거 아세요?”
“네?”
“지은이가 선생님 좋아하는 거 같던데… 모르셨죠?”
“그럴 리가요. 농담하지 마세요.”
“농담 아닌데, 진짜에요. 뭐 심각한 감정은 아닌 것 같지만, 만나면 계속 한 선생님 이야기를 해요. 그래도 안 될 사이지만 말이에요.”
한지호는 여자 솔로 가수 중에서 최고로 꼽히는 이지은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을 100%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실이 어쨌든 기분 좋은 이야기다.
그 말을 전해준 사람이 야소녀 모임 멤버이자 무럭무럭 성장하는 여배우 김여정이라는 것도 특별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김여정은 안 될 사이라고 말한 것일까.
한지호는 궁금증이 생겨 질문을 던졌다.
“지은 씨가 날 좋아한다는 거야 농담이겠지만, 왜 안 될 사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한 선생님, 김해수 선배님이랑 만나시는 거 아니세요?”
“네?”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루머라면 죄송해요.”
한지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자 김여정이 황급히 사과를 했다.
하지만 그녀가 틀린 말을 해서 한지호의 표정이 굳은 게 아니었다.
너무 놀랐기 때문이다.
그가 김해수의 중병을 치료해서 연예계 복귀를 도운 소문은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지만, 연예계 관계자나 상류층들은 대부분 한지호를 김해수의 비밀스러운 병을 고친 한의사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지호와 김해수가 서로를 구속하지 않고 편하게 밀회를 즐기는 사이라는 건 극비였다.
한지호는 직접 파파라치를 잡아내며 행동에 신중을 기했다.
하지만 역시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 모양이다.
소문이 빠르기로는 대한민국 제일인 연예계를 너무 만만하게 봤는지도 모른다.
“제가 김해수 씨와 만난다는 소문이 도는 줄은 몰랐습니다.”
“연예계에 별별 소문이 넘치니까요. 아니라면 지은이가 좋아하겠네요.”
“뭐라고 대답하기 난감합니다. 아무튼 하루 세 번씩 잊지 말고 약을 잘 챙겨먹길 바랍니다, 여정 씨.”
“네, 고마워요. 효능을 기대하고 있을게요.”
“아마 드라마 끝나고도 계속 보약을 찾게 될지도 모릅니다.”
“정말 그렇게 되면 어떡하죠?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닌데.”
“그만큼 약 효과 확실할 겁니다.”
김해수 이야기를 대충 접고, 유쾌하게 분위기를 바꾼 한지호가 그녀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일부러 보약 가격은 거론하지 않았다.
크리스탈이나 김여정이 보약을 받고 모른 척 할 레벨의 사람은 아니다.
같은 야소녀 멤버인 이지은이 통 크게 치료비를 입금시켰던 걸 보면 알 수 있다.
원래 사람은 끼리끼리 모이는 법이다.
한지호는 일반적인 한의원에서 받은 보약 값보다는 훨씬 높은 대가가 돌아오리라 예상했다.
굳이 재촉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낮추지 않아도 될 문제였다.
이는 상류층을 전문으로 상대하며 터득한 노하우이기도 하다.
소소한 잡담을 주고받은 둘은 자리에서 일어날 채비를 했다.
바쁜 김여정을 오래 잡아둘 수 없었다.
한지호 역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이지은을 만나러 가야 한다.
“다음에 또 뵐게요. 트래블 라이브러리에 못 왔던 애들이 한 선생님 뵙고 싶어서 난리에요.”
“야소녀 모임에 초대받을 수 있다면 저야 영광이죠. 조심해서 가세요, 여정 씨.”
“한 선생님도 조심히 가세요.”
김여정은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이고 코디에게 갔다.
레스토랑 앞에는 매니저가 몰고 다니는 커다란 스타크래프트 밴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지호는 김여정이 떠나는 걸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 돼 있었다.
김해수와의 열애설이 은밀하게 떠돌 정도로 연예계의 시선을 받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야소녀 모임에 참석한 사진이 퍼지면서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었지만, 실은 그 전부터 상류층과 연예계에선 알음알음 아는 유명인사였던 것이다.
황만금과 김해수를 고친 한의사라는 타이틀이 갖는 의미를 스스로 과소평가한 것 같았다.
한지호는 자신이 생각 이상으로 유명하다는 걸 알게 됐지만,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좋다거나 나쁘다고 쉽게 표현하기 힘들었다.
우우웅- 우우웅-
그때 스마트 폰이 울렸다.
한지호는 레스토랑 주차장에 세워 놓은 아우디 A5를 향해 걸어가며 전화를 받았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저도 모르게 통화 버튼을 누른 것이다.
“여보세요.”
“혹시 한지호 선생님이십니까?”
“네,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MBS 방송국 PD 채성일입니다.”
방송국 PD라는 말에 한지호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MBS 방송국은 우리나라 3대 지상파 방송국이다.
한지호는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던 파도가 다가옴을 감지했다.
방송국 PD의 연락은 보통 사건이 아니다.
그는 호흡을 다스리며 전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집중했다.
하루에도 여러 번 급격한 변화의 물결이 한지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3장, 기로(岐路) (1)
슈우우웅-
시동을 끄자 엔진이 잠들며 자동차의 실내 조명이 켜졌다.
직접 주차장에 차를 세운 한지호는 아우디 A5에서 내리지 않았다.
그는 운전석에 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방송 출연이라, 방송 출연.”
고민의 원인은 간단했다.
김여정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MBS 예능국 PD인 채성일의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보통 섭외 전화는 PD가 아닌 작가들의 몫이다.
그러나 채성일은 직접 전화를 걸어 정성을 표했다.
그만큼 한지호를 섭외하기 위해 공을 들이는 것이다.
새로 시작하는 MBS의 건강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달라는 채성일의 부탁은 무척 달콤하게 들렸다.
수많은 의사들이 방송국에 뒷돈을 줘가며 TV 출연을 희망한다.
TV에 나오는 순간 유명한 의사가 되고, 병원에 환자들이 몰리는 건 기정사실이다.
하지만 한지호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아직 개원을 하지 않았고, 따라서 많은 환자들이 몰린다고 일일이 봐줄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다.
프리랜서 한의사로 상류층과 VIP들을 상대하며 한편으로는 청우단을 만들어 파는 건 법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현재 시점에서 방송에 출연해봤자 득보다 실이 많을 것 같았다.
그는 야소녀 모임에 참석하면서 얻은 유명세만으로 충분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미 상류층과 연예계에서는 한지호를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다.
굳이 방송에 안달을 내지 않아도 1%의 세계에서 알아주는 특별한 한의사로 입지를 다지는데 지장이 없을 것이다.
“휩쓸리지 말고 나만의 페이스를 유지해야 해. 그래도 아쉽긴 하지만.”
대충 생각을 정리한 한지호가 입맛을 다셨다.
외부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결정을 내린 건 흠잡을 구석이 없는 판단이다.
그러나 아쉬운 마음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다.
방송 출연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다.
일생에 몇 번 올지 모르는 큰 기회이고, 사람이면 누구나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이 있다.
“차라리 정식으로 개원을 하고, 방송에도 닥치는 대로 출연해서 진짜 유명해져볼까?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한의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계속되는 그의 혼잣말이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외부의 흐름에 휩쓸리는 게 아니라 주도적으로 흐름을 타는 건 어떨까.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했던 한지호는 다시 고민이 깊어졌다.
띵동-!
그때 스마트 폰 알람이 울렸다.
이지은과의 약속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려주는 알람이었다.
한지호는 자동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트렁크를 열고 보약 상자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해가 중천에 떠있을 때부터 움직였는데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밤바람이 맴도는 야외 주차장을 가로지른 한지호는 약속 장소 안으로 들어갔다.
한강 잠원 지구에서 조금 떨어진 외딴 카페가 이지은의 아지트였다.
애매한 위치, 주변 건물에 가려 한강이 보이지 않는 전망, 여러모로 악조건 덕에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카페다.
평일 늦은 시간 연예인이 조용히 시간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인 장소라는 뜻이다.
“어서 오세요.”
한지호가 들어서자 카페 주인이 인사를 했다.
수염을 멋지게 기른 중년 남성은 취미로 카페를 하는 사람 같았다.
손님이 별로 없어도 초조한 기색이 안 보였고, 방금 들어온 한지호에게 크게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부드럽지만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는 커피를 내리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한지호는 왜 이지은이 이 카페를 좋아하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남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 없이 편한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구석 자리에 앉은 한지호는 주문을 하지 않았다.
이지은이 도착하면 같이 주문을 할 생각이었다.
그가 주문을 하거나 말거나 카페 주인은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준비한 보약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한지호는 이지은을 기다렸다.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그녀는 약속 시간을 잘 지키는 편이었다.
일부 탑 스타들이 시간 약속을 가볍게 여긴다고 하는데 이지은은 달랐다.
국민 여동생이라 불리며 절정의 인기를 누리면서도 거만하지 않았고, 지킬 건 지키는 모습이었다.
어려서부터 연예계에서 생활한 탓인지 일찍 철이 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