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네. 각기 다른 세 명의 체질에 맞춘 보약을 지을 겁니다. 즉각적으로 체력 증진 등의 효과를 느낄 수 있게 하려면 좋은 약초를 아끼지 않고 써야죠.”
“우리 한 선생이 작정하고 만드는 보약이라면 어마어마하겠군?”
“하하, 아닙니다. 그저 체질에 맞춰 숨겨진 힘을 쓸 수 있게 도와주는 것뿐이죠.”
“체질이라니, 사상이나 팔 체질을 말하는 건가?”
최치우가 한의학적 질문을 던졌다.
그와 한지호의 관계는 단순히 약초를 파는 사장과 손님 사이가 아니다.
그렇기에 다소 민감한 질문도 편히 물어볼 수 있었다.
한지호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한국에서는 사상과 팔 체질이 주류더군요. 저는 오행에 기초해서 체질을 분류합니다.”
“오행?”
최치우는 베테랑 약초꾼 출신으로 한의학 지식도 웬만한 전문가 못지않다.
하지만 그런 최치우도 오행으로 체질을 나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한 것 같았다.
한지호는 야소녀 멤버들에게 해줬던 것처럼 간단히 설명을 했다.
“오행과 우리 몸의 장기가 관련이 있고, 어떤 기운을 강하게 타고났느냐에 따라 어느 장기가 더 튼튼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에 맞춰 사람의 특성과 장단점을 구분하는 체질 감별법입니다.”
“무척 흥미롭구만!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라 더더욱 그런 것 같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 선생 자네가 믿는 체질이니 어쩌면 사상이나 팔 체질보다 더 정확하겠군.”
“사실 60억 명의 사람을 체질로 나눠서 판단하는 게 100% 정확할 수는 없습니다. 인구가 60억이면 저마다 조금씩은 다르게 태어나니까요. 그렇기에 저는 한의사지만 한의학에서 말하는 체질을 맹신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확률인거죠. 확률적으로 체질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면 그에 어울리는 약과 치료법을 쓰는 게 의학적 태도일 테니까요.”
한지호의 말에 최치우는 무척 감명을 받은 듯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지호를 향해 굵은 엄지를 치켜 올렸다.
“과연 한 선생다운 말일세. 서양 의학이나 동양 의학이나 자신들의 의술만 진리라고 생각하며 맹신에 빠지면 크게 실수를 하는 법이지. 한계를 인정하고 확률로 접근하는 모습…… 특히 한의사들 중에 한 선생 같은 태도를 지닌 사람을 본 적이 없네. 의술도 의술이지만, 이런 태도가 한 선생을 진짜 명의로 만들어주는 것이야.”
“명의라니요, 아직 그런 말을 듣기엔 부족합니다.”
한지호는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명의(名醫)라는 호칭은 서양 의학과 한의학을 떠나 모든 의사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이다.
무엇보다 의술을 대하는 자신의 신념을 최치우가 이해하고 존중해 준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아, 그런데 하나 물어볼게 있네만…….”
그때 최치우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한지호는 야소녀 멤버들의 보약을 짓기 위한 약초 꾸러미를 손에 든 채 그를 쳐다봤다.
“말씀하세요.”
“거 약재상 거리의 다른 상인들이 그러더구만. 한 선생 자네가 엄청난 유명 인사가 됐다고. 그게 무슨 말인가? 내가 모르는 사이 TV에라도 나온 것인가?”
“아… 약재상 거리에도 소문이 났나보네요. 별 일은 아닌데.”
“진짜 방송이라도 탄 것이구만!”
“아닙니다. 인기 많은 연예인들의 모임에 참석한 게 인터넷에서 알려져서요. 오늘 구입한 약초들도 그 연예인들을 위한 보약을 짓는데 쓰일 겁니다.”
“오! 거 참 신기하구만. 전에 산삼도 인기 연예인을 치료하는데 썼다더니. 한 선생이 외모도 말쑥하고 빠지는 데가 없으니 연예계 쪽에서 일이 풀리는 모양일세.”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차차 지켜봐야죠.”
한지호는 유명세에 우쭐하지 않았다.
그의 차분한 대응을 확인한 최치우는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행여 한지호가 인기에 휩쓸려 교만해지면 따끔한 조언을 해주려던 찰나였다.
그러나 최치우가 염려하지 않아도 한지호는 중심을 잘 잡고 있었다.
“이런 말이 상스럽지만, 끝빨 나는 보약으로 연예인들의 마음을 확 사로잡아 버리게. 자네라면 충분히 그렇게 할 테지.”
“최 사장님이 구해주신 약초가 있는데 뭔들 못하겠습니까.”
“그런가? 커허허허허!”
한지호의 넉살에 최치우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명징약초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웃음이 그쳤고, 한지호는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청우단 재료는 제가 보낸 동생이 받으러 올지도 모릅니다.”
“알겠네. 그래도 자주 못 보면 서운하니 종종 들리게!”
“네. 당연히 그래야죠.”
험악한 인상의 털보 아저씨의 투정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한지호는 자주 오라는 최치우의 말을 가슴 깊이 담아두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약재상 거리의 상인들이 오늘따라 그를 더 많이 쳐다보는 것 같았다.
야소녀 모임에 참석한 훈남 한의사라는 헤드라인으로 기사가 도배된 여파가 경동시장 약재상 거리까지 미친 것이다.
그나마 경동시장 야시장은 덜한 편이었다.
인터넷 뉴스와 SNS 사용을 많이 하는 10대, 20대들은 노골적으로 한지호를 쳐다보는 경우가 많았다.
젊은 사람들이 주로 모이는 가로수길이나 홍대 등에선 연예인처럼 뜨거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한지호는 곧 사라질 관심이라 생각하면서도 새삼 연예인과 SNS, 그리고 인터넷 언론의 힘을 실감했다.
우우웅- 우우웅-
그때 또 주머니 속 스마트 폰이 울렸다.
한지호는 귀찮은 연락일 거라 지레 짐작하며 폰을 꺼냈다.
그러나 가볍게 넘기기 힘든 이름이 스마트 폰 화면에 떠올라 있었다.
- 김영찬 교수님
뜻밖의 인물이었다.
산삼을 구해달라는 부탁을 무시하며 한지호의 자존심을 짓밟았던 김영찬이 먼저 연락을 해온 것이다.
한지호는 인상을 구겼지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피할 이유가 없었다.
“여보세요.”
2장, 네임드(named) (2)
“07학번 한지호. 맞나?”
김영찬은 다짜고짜 한지호의 신분을 확인했다.
이미 알고 전화를 걸었으면서 일부러 기를 죽이기 위해 그러는 것 같았다.
“맞습니다, 김 교수님.”
“전에 내게 산삼을 문의했었지.”
“네.”
“그리고 이번에는 떠들썩하게 기사가 났더군. 우리 한의학과의 이름이 이렇게 대대적으로 언급된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그렇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소속 병원도 없이 지내는 걸로 아는데, 대체 어떻게 연예인들과 친해져 모임에 초청받은 건가? 듣자하니 쉽게 어울릴 수 있는 급수의 연예인들이 아니라던데.”
한지호는 기가 찼다.
그는 야소녀 모임에 참석한 게 알려진 이후 K대 한의학과를 대표하는 훈남 한의사로 뉴스 기사와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했다.
며칠 동안 세상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고, 그 소식이 김영찬의 귀에도 들어간 것 같았다.
하지만 김영찬은 산삼을 구해달라는 한지호의 부탁에 인격적 모독으로 답을 했던 사람이다.
그는 교수이면서 대학 시절 내내 한지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다.
그런 김영찬이 이제 와서 한지호에게 호기심을 보이는 것이다.
한지호가 일약 반짝 스타가 되면서 K대 한의학과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결과였다.
“제가 설명을 해드릴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전화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지호는 차갑게 대답했다.
너 따위가 어떻게 A급 연예인들과 어울려 유명해졌냐는 물음에 친절히 대답해줄 정도로 배알이 없지는 않았다.
김영찬은 한지호의 대답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이제껏 자신의 물음에 이런 태도를 보인 제자들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K대 한의학과의 실세이자 국내 한방의학계의 로열 패밀리 출신인 김영찬은 거만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이다.
전화기 너머에서 그의 분노가 느껴졌지만, 한지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겨우 이만큼 유명해졌다고 건방져진 건가? 07학번 한지호!”
“예전의 제가 아닙니다. 또 자꾸 거슬려서 그러는데 사람 이름 앞에 학번 붙여서 부르지 마십시오.”
“너……. 내가 앞으로 두고 보지.”
“얼마든지 두고 보십시오. 교수님이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더 큰 인물이 될 테니 말입니다. 학교의 명예를 드높이는 건 덤이겠지요.”
한지호는 다른 사람도 아닌 김영찬에게 어마어마한 거물이 되겠다고 선포했다.
그의 대담하고 당당한 말에 김영찬도 말문을 잃었다.
정말 예전의 한지호가 아닌 것이다.
한지호는 단순히 말만 앞세우는 게 아니라 깜짝 놀랄 유명세로 스스로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한지호는 김영찬에게 한 방을 날려주고 전화를 끊었다.
더 이상 그에게 굽실거릴 이유가 없다.
무례한 사람에게는 더 무례하게 대해주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한의학계의 로열 패밀리라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
이름을 알리며 쭉쭉 성장하는 중인 한지호는 김영찬의 뒷배경과 권력을 앞지를 자신이 있었다.
누구나 현실적인 계산을 떠나 절대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한지호에겐 김영찬이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학생을 제자가 아니라 돈줄로 여기고, 기분 따라 마음대로 업신여기는 김영찬은 어른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설령 그가 한지호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고 해도 상관없다.
어설프게 막아서면 한의학계의 로열 패밀리고 뭐고 천하제일의 의술로 다 박살 내버릴 작정이었다.
뛰어난 장수는 칼을 뽑아야 할 때 망설이지 않는다.
현명한 책사는 한 번 내린 결정을 두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불리해도 반드시 이겨야 하는 전투가 있다.
그럴 때 물러서면 한 번의 전투에서 지는 게 아니라 전부를 잃는 셈이다.
한지호는 김영찬과 척을 져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K대 한의학과의 실세이자 로열 패밀리의 일원인 김영찬이 얼마나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김영찬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물러서면 안 된다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김영찬은 뼛속까지 엘리트 의식으로 가득 찬 인간이다.
한지호가 아무리 명성을 얻고 잘 나가도 인정하고 도움을 줄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남자라면 포기할 수 없는 자존심이 있다.
그 자존심 깊숙한 곳을 여러 번 건드린 김영찬에게 이빨을 드러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한지호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낼 만큼 성장해 있었고, 예전처럼 학비를 벌기 바쁜 07학번이 아니라 언론에 두각을 나타낸 한의학계의 신성(新星)이다.
‘어설프게 날 방해하려 든다면 후회하게 될 겁니다, 김영찬 교수님.’
사소하지만 통쾌한 한 방을 먹인 한지호는 약초를 들고 신사동 오피스텔로 향했다.
10대와 20대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지은, 크리스탈, 김여정을 위한 보약을 지어야 한다.
그는 이미 평범한 사람들이 꿈꾸는 세계에 자연스레 녹아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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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체질에 맞는 재료로 보약을 만든 한지호는 한 명 한 명에게 약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크리스탈은 Fs의 해외 공연 일정이 빡빡해 도저히 시간을 맞춰 만나기 힘들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소속사에 들러 보약을 전해줬다.
그러고 보면 야소녀 모임에서 크리스탈을 직접 만난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이 됐다.
한국뿐 아니라 일본, 중국, 동남아, 나아가 유럽에서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Fs의 해외 투어 일정은 가히 살인적인 수준이다.
한지호가 만든 보약은 그런 스케줄을 소화하는 크리스탈에게 큰 힘이 될 것 같았다.
비록 얼굴을 보고 전해주진 못했지만 약값은 걱정되지 않았다.
크리스탈은 차갑고 도도한 걸로 유명하지만, 그만큼 구질구질하지 않고 쿨한 성격을 지녔다.
소속사를 통해 보약을 전달 받으면 크리스탈이 직접 연락을 해올 것 같았다.
한지호는 해외에 있는 크리스탈에게 스마트 폰 메시지를 보냈다.
야소녀 모임에서 개인 연락처를 교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크리스탈 씨, 보약은 회사 이사님께 전달했어요. 다음 주에 출국하면서 전해준다고 하십니다. 내가 만든 약이 해외 일정을 소화하는데 힘이 됐으면 합니다. 한지호. -
그녀가 곧바로 메시지를 확인하진 않았다.
하지만 급할 게 하나도 없다.
한지호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김여정에게 향했다.
곧 신작 드라마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할 예정인 김여정은 대본 리딩을 마치고 삼성동 부근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차를 몰고 삼성동에 도착한 한지호는 레스토랑 2층으로 올라갔다.
럭셔리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청담동, 늘 인파로 복잡한 강남역, 세련되고 젊은 느낌의 가로수 길에 비해 삼성동 인근은 별다른 특색이 없었다.
그저 잘 사는 강남 주민들의 주거지역인 것 같았지만, 곳곳에 맛집이 숨어있다.
김여정이 매니저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레스토랑도 맛집으로 명성이 높은 곳이다.
그래도 평일 오후여서 사람들로 북적이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