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얼마든지 지을 수 있습니다. 마침 산삼 잔뿌리가 남은 것도 있고.”
“그럼 저 한 선생님께 보약을 부탁드리고 싶어요. 곧 새로운 드라마에 여주인공으로 들어가는데 체력이 중요하거든요. 소속사에서 지어주는 약은 못 믿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간단히 진맥을 할까요?”
“좋아요!”
김여정이 소매를 걷고 팔을 내밀었다.
이지은과 크리스탈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둘을 지켜봤다.
한지호는 야소녀 모임에 나와 또 한 명의 새로운 연예인 고객을 얻게 된 셈이다.
그는 김여정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었다.
특별한 병이 있는 게 아니기에 체질을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여정 씨, 사상체질이라고 들어봤죠?”
“네. 전에 드라마도 나왔었잖아요, 태양인 이제마. 제가 거기 아역으로 출연했었어요!”
“신기한 인연이네요. 아무튼 사상체질에서는 사람을 태양, 태음, 소양, 소음 네 가지 체질로 분류합니다.”
“전 어디에 속하나요?”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요즘에는 사상체질뿐 아니라 팔(八) 체질 등 다양한 이론이 존재합니다. 저는 고대 중국의 의학에 뿌리를 둔 오행(五行)으로 체질을 감별하고 있습니다.”
“오행이요?”
“화, 수, 목, 금, 토. 다섯 가지 기운은 곧 심장, 신장, 간, 폐, 비장과 관련이 있습니다. 오행 중 어떤 기운이 강하느냐에 따라 심장이 발달한 사람, 간이 발달한 사람 등으로 체질을 나누는 거죠.”
“아……. 이렇게 들으니 이해가 쉽네요. 한 선생님은 말씀을 참 잘 하시는 거 같아요.”
김여정이 눈을 반짝거리며 한지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지은과 크리스탈도 생소한 오행체질 설명에 빠져들고 있었다.
오행체질은 새로운 이론이 아니다.
화타가 창안한 오금희에 뿌리를 둔 체질 감별법이다.
화타의 의술은 오금희에서 시작해 오금희로 끝난다.
오금희는 오행(五行)의 이치를 다섯 동물의 모습으로 풀어낸 무공이자 치료법이다.
전생을 각성하며 오금희를 익히기 시작한 한지호는 철저하게 오행에 기초하여 의술을 펼치고 있었다.
그 결과로 황만금, 김해수, 이지은 등 굵직한 거물들을 연달아 고쳤으니 화타와 규호의 의술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여정 씨는 오행 중에서 토기(土氣)가 강한 체질입니다. 비장이 많이 발달했다고 할 수 있죠. 이런 체질의 사람들은 웬만해선 잔병치레를 하지 않습니다. 면역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체력적으로는 약점을 보일 수 있는데, 간에 해당하는 목기(木氣)를 왕성하게 만드는 약을 쓰면 효과를 체감할 겁니다.”
“맞아요! 어렸을 때부터 감기도 잘 안 걸려서 보기랑 다르게 튼튼하다는 말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드라마 촬영만 시작하면 너무 힘들어서 골골거리고 그랬거든요.”
“잔병치레를 안 하는 것과 체력이 좋은 걸 동일 선상에 놓고 볼 수는 없죠.”
“진짜 신기하게 잘 맞추시네요. 그럼 한 선생님이 말하신 것처럼 저한테 맞는 약으로 지어주세요.”
“다음 주까지는 지어서 보내드리죠. 직접 만나도 좋고, 매니저를 보내시면 전달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직 새 작품 촬영 들어가기 전이니까 제가 직접 받으러 갈게요!”
“여정 씨가 편한 대로 하세요.”
한지호는 오행 체질에 대한 설명과 진맥으로 김여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미 이지은의 추천이 있었기에 기본적인 신뢰가 쌓여 있던 상황에서 결정타를 날린 것이다.
김여정이 신기해하며 보약을 부탁하자 크리스탈도 관심을 보였다.
그녀가 도도한 표정을 살짝 풀고 입을 열었다.
“제 체질도 봐 주실 수 있으세요?”
“나도요! 전에 체질 이야기는 안 해주셨잖아요.”
이지은도 덩달아 손을 들었다.
인기 연예인이지만 호기심 많은 20대 초반의 여자들이다.
게다가 그녀들은 고된 스케줄로 건강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놀라운 실력을 증명한 한의사는 그녀들에게 단비와도 같은 존재였다.
한지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 명씩 다 봐드릴게요. 먼저 손을 내민 크리스탈 씨부터.”
그가 자연스럽게 크리스탈의 팔을 잡았다.
예능 프로에 나와서도 출연자와 스킨십을 꺼리는 크리스탈이 맨살이 드러난 팔을 맡겼다.
진맥을 마친 김여정은 스마트 폰을 꺼내 인증샷을 찍고 있었다.
아마 오늘 모임 사진이 그녀들의 인스타그램에 올라갈지도 모른다.
한지호는 이제껏 아는 사람들만 아는 은밀한 명의였다.
청우단을 구매한 고객들 사이에 입소문으로 떠도는 한의사였고, 황만금과 김해수를 거치며 이제 막 명성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지은과 야소녀 멤버들 덕에 갑자기 유명인이 될지도 몰랐다.
수십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그녀들의 인스타그램에 인증샷이 올라가면 단번에 화제의 인물이 될 것이다.
“크리스탈 씨는 심장이 강한 체질입니다. 몸에 화기가 많은 체질. 겉보기엔 수기가 왕성한 체질로 보이는데 의외네요?”
한지호는 태연하게 크리스탈의 팔을 잡은 채 말을 계속했다.
탑 스타들 틈에 어우러진 모습이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가 연예인 못지않은 유명인이 될 날이 사뭇 가까워진 것 같았다.
2장, 네임드(named) (1)
한지호는 트래블 라이브러리에서 만난 야소녀 멤버들에게 각자 보약을 지어주기로 했다.
치료비는 물론이고, 약값 역시 비싸게 받는다고 장난스럽게 엄포를 놓았지만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이지은은 목을 낫게 해줬다고 한 회 행사비인 3천만 원을 입금시켰었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목돈을 쓸어 담는 야소녀 멤버들은 경제관념이 일반 사람들과 달랐다.
훨씬 자산이 많은 부자들보다 더 화끈하게 돈을 쓰는 것 같았다.
너무 어린 시절부터 큰 인기와 수입을 얻은 연예인들의 특성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한지호는 이지은과 크리스탈, 김여정을 위한 체질 맞춤 보약을 짓게 됐다.
나이는 어려도 VIP라 할 수 있는 세 명에게 비싼 약을 지어주게 됐다는 건 큰 수확이다.
하지만 야소녀 모임에 참석하면서 얻은 성과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김여정, 이지은, 크리스탈은 모임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올렸다.
- 오랜만에 모인 야소녀
- 한지호 선생님, 대박……!
- 야소녀, 트래블 라이브러리, 처음 온 남자 게스트.
짧은 글귀와 함께 올라간 사진은 늘 그렇듯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김여정은 트래블 라이브러리의 독특한 인테리어 사진을 찍어 올렸다.
이지은은 한지호가 크리스탈을 진맥하고 있는 옆모습을 올렸고, 크리스탈은 네 명이 전부 나온 사진을 선택했다.
각자 수십만 명의 팔로워를 가진 야소녀 멤버들의 사진은 엄청난 좋아요와 댓글을 받았고, 포털 사이트에 기사로도 다뤄졌다.
화제의 중심은 야소녀 모임에 처음으로 초대 받은 남자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발 빠른 연예부 기자들은 네티즌과 팬들의 호기심을 해소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다.
짧은 글귀, 그리고 진맥하는 옆모습으로 보아 한지호라는 이름의 한의사가 참석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셰퍼드 같은 연예부 기자들에겐 충분한 정보였다.
그들은 인스타그램에서 제공된 정보를 바탕으로 한지호의 기본적인 신상을 캐냈다.
K대 한의학과 출신의 20대 훈남 한의사가 야소녀 모임에 초대 받았다.
연예부 기자들이 딱 좋아할 내용이었다.
- 훈남 한의사와 함께한 야소녀 모임!
- 트래블 라이브러리 통째로 빌리는 야소녀의 클래스, 궁금증을 자아낸 훈남 한의사의 정체는?
- K대 대표 훈남 한의사, 야소녀를 진맥하다!
궁금증을 유발하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의 기사들이 포털 사이트를 장악했다.
훈남 한의사, 한지호.
이 두 개의 키워드가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올라갈 정도였다.
한지호는 졸지에 K대를 대표하는 훈남 한의사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금남(禁男)의 성역으로 알려진 야소녀 모임에 초대 받은 20대 훈남 한의사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크리스탈을 진맥하는 옆모습 사진만 봐도 오뚝한 콧날과 깔끔한 외모가 빛났다.
연이은 기사에서 한지호가 이지은의 꽉 잠긴 목을 고쳐주면서 인연을 맺었다는 내용이 공개됐다.
연예계에는 자고 일어나니 유명인이 됐다는 말이 떠돈다.
유명세와 인기는 하루 아침에 벼락처럼 떨어지는 법이다.
야소녀 모임 멤버들을 통해 세상에 이름을 알린 한지호도 하룻밤 사이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됐다.
이지은과 크리스탈, 김여정의 팬들은 한지호의 이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포털 뉴스와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했기에 ‘야소녀 모임에 참석한 훈남 한의사 한지호’는 하나의 키워드가 되어 대중들에게 각인 되었다.
물론 이런 관심은 며칠이 지나면 금방 사그라든다.
계속 언론에 노출되며 방송 출연을 하지 않는 한 이슈가 길게 이어지는 법은 없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로서 한지호는 상류층들에게 자신을 어필할 강력한 무기를 얻은 셈이다.
굳이 황만금 회장과 연예인 김해수, 이지은을 치료했다는 소개를 늘어놓지 않아도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들으면 ‘야소녀 모임의 훈남 한의사’를 떠올릴 것이다.
대기업들은 홍보를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광고를 제작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지호가 얻은 홍보 효과의 가치는 억 대의 치료비 이상이었다.
우웅- 우우웅-
테이블 위에 놓은 스마트 폰이 진동을 토해냈다.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하던 한지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또 전화야?”
이렇게 탄식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한 이후 쉬지 않고 전화와 메시지가 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연락 한 번 없던 대학 동기와 선후배들, 어떻게 번호를 알아냈는지 모를 연예부 기자들, 어쩌다 술자리에서 만났던 사람들까지.
평소에는 한지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관심도 없던 사람들이 귀찮게 연락을 해왔다.
청우단을 구매한 고객들의 축하 메시지는 반갑고 고마웠다.
마리아 수녀와 함께 살고 있는 유초아가 전화를 해온 것도 기뻤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운 시절에 그를 외면했던 사람들이 약간의 유명세를 얻자 기다렸다는 듯 연락을 하는 건 좋게 보기 힘들었다.
“역시 모르는 번호네.”
한지호는 스마트 폰에 뜬 번호를 확인하고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번호인 걸 보니 십중팔구 귀찮은 연락일 것 같았다.
이러한 열기도 다음 주면 잠잠해질 것이다.
갑작스레 얻은 인기와 유명세가 얼마나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도 잘 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듯이 감수해야 할 불편함도 늘어났다.
한지호는 폰을 테이블 위에 내버려둔 채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명징약초 최치우에게 부탁한 약초들을 받으러 가야 한다.
그에게 뜨거운 관심을 안겨준 야소녀 모임의 이지은, 크리스탈, 김여정을 위해 보약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금희에 뿌리를 둔 오행 체질 감별법으로 야소녀 멤버들을 놀라게 만든 한지호는 보약으로 확실한 효과를 느끼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깨끗하고 질 좋은 약초가 필요하다.
언제든 최상의 약초를 공급해주는 명징약초가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쏴아아아아아-
한지호는 뜨거운 물줄기를 맞으며 미소를 지었다.
귀찮은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유명세를 누리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홍보 효과를 떠나서 한동안 구름 위에 붕 뜬 기분이 들었었다.
연예인들이 인기의 맛에 중독되는 게 이해 됐다.
‘아, 이게 아닌데.’
그는 샤워를 하며 유명세와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내실을 다지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거듭 했다.
전생의 규호가 살았던 삼국시대와 현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규호의 기억을 얻었지만 29살의 한지호는 처음 경험하는 것 투성이인 청년이다.
그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며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때때로 시행착오를 겪을지라도 오늘보다 내일 더 높은 곳에 오를 거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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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삼만큼은 아니어도 꽤 비싼 놈들을 골라 가는구만.”
명징약초의 최치우가 약초를 챙겨주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그동안 한지호는 그리 비싸지 않은 약초들을 주로 구입했었다.
매달 2000알 가깝게 만드는 청우단의 재료도 특별한 약초는 아니다.
한지호는 깨끗한 약초를 원할 뿐, 비싼 약초에 집착하지 않았다.
쉽게 구할 수 있는 값싼 약초도 어떤 비율로 조합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효능을 낸다.
최치우는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한지호를 약초에 빠삭한 명의로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요구한 약초들은 달랐다.
평소와 달리 비싸기로 소문난 약초들을 구입해가는 한지호를 보며 최치우가 호기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녹용 분골이나 산삼을 사갔을 때처럼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겐가?”
“그런 건 아닙니다. 이번에는 말 그대로 보약을 지을 일이 생겨서요.”
“보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