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어떤 옷을 입었느냐가 외모 뿐 아니라 자신감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았다.
그는 명품관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지하 주차장에는 광이 반짝반짝 나는 검은색 아우디 A5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마니 정장을 입은 채 아우디를 몰고 20대 여자 연예인들의 모임에 참석하러 간다.
한지호 스스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 자연스러운 현실이 됐다.
예전 같았으면 꿈이 아니라 망상으로 여겼을 일이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건 한지호는 백미러로 자신의 얼굴을 살펴봤다.
살이 조금 빠진 걸 제외하면 공중보건의 시절과 달라진 게 별로 없다.
그러나 입는 옷과 타는 차, 만나는 사람은 완전히 달라졌다.
인생이 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제 시작이야, 시작.”
한지호는 백미러에 비친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을 했다.
지금 누리는 것들이 전부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여기서 만족하면 천하를 좌우하는 위치에 오르라고 절규했던 규호에게 미안해질 것 같다.
한지호는 머나먼 길의 출발점을 막 벗어났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갈수록 많은 것을 누리며 또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과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이다.
부우우웅-
그가 엑셀을 밟자 아우디 A5가 시원한 배기음을 토해내며 움직였다.
지하 주차장을 빠져 나온 한지호는 엑셀을 밟은 발에 힘을 줬다.
거침없이 질주하는 자동차처럼 그의 도전도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한지호가 인생의 엑셀에서 발을 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야소녀 모임 장소로 가는 길, 메가 시티(maga city) 서울의 풍경이 그를 비추고 있었다.
1장, 잘나가는 소녀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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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소녀의 모임 장소는 청담동의 트래블 라이브러리였다.
트래블 라이브러리는 국내 H 카드에서 운영하는 여행 전문 도서관이다.
삼청동의 디자인 라이브러리와 더불어 서울을 대표하는 전문 도서관으로 자리 잡았다.
규모는 작지만 아기자기한 인테리어가 여성들의 취향에 딱 맞고, 여행이라는 키워드도 보편적인 공감을 얻어 청담동의 명물로 떠올랐다.
대신 H 카드 회원만 입장할 수 있어서 트래블 라이브러리에 들어가기 위해 신용카드를 만드는 사람들이 생길 정도였다.
20대 여성들의 트렌드를 선도하는 야소녀 모임이 트래블 라이브러리에서 열린 건 놀랍지 않은 일이다.
H 카드는 마케팅을 위해 평일 저녁 시간을 비워줬다.
야소녀 멤버들이 트래블 라이브러리에서 모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엄청난 홍보 효과를 얻을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부우우웅-
한지호의 검은색 아우디 A5는 우렁찬 배기음을 내며 트래블 라이브러리 앞에 멈춰섰다.
강남 일대 어디를 가나 그렇듯 발렛 요원이 먼저 그를 맞이했다.
“오늘 트래블 라이브러리 운영 시간은 끝났습니다.”
발렛 요원이 정중하게 안내를 해줬다.
트래블 라이브러리를 통째로 빌린 야소녀 모임은 당연히 비공개로 진행된다.
발렛 요원은 한지호를 평범한 도서관 방문객으로 생각했다.
그러니 운영 시간이 끝났다고 안내를 하는 것이다.
한지호는 운전석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발렛 요원을 쳐다봤다.
“오늘 저녁에 이곳에서 야소녀 모임이 있죠? 모임 때문에 트래블 라이브러리를 빌렸다고 들었는데.”
“아니, 그걸 어떻게…….”
“그 모임에 초대를 받아서 온 겁니다. 안에 들어가서 확인해주세요.”
발렛 요원은 믿기 힘들다는 눈초리로 한지호를 바라봤다.
야소녀 모임에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젊은 남자가 초대를 받았다니, 선뜻 이해되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아우디를 타고 온 남자가 마냥 헛소리를 할 것 같진 않았다.
한지호의 차림새는 부유한 분위기가 흘러넘치는 청담동과 잘 어울렸다.
만약 그가 초라한 차림으로 뚜벅뚜벅 걸어 왔다면 발렛 요원은 대번에 무시를 했을 것이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속물 근성이 싫겠지만, 이 사회에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기준을 맞춰줄 필요도 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발렛 요원은 한지호를 놔두고 트래블 라이브러리 안으로 들어갔다.
한지호는 검은색 A5에 비스듬히 기대 여유롭게 발렛 요원을 기다렸다.
곧이어 발렛 요원이 밖으로 뛰어 나왔다.
확인을 위해 도서관 안으로 들어갈 때보다 훨씬 빠른 걸음걸이로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오늘 모임에 참석하시는 한지호 선생님, 맞으십니까?”
“맞습니다.”
“주차 도와드리겠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고맙습니다.”
한지호는 발렛 요원에게 기분 좋게 인사를 건넸다.
자신을 못 알아봤다고 화낼 일이 전혀 아니었다.
야소녀 모임에 낯선 남자가 초대 받았다고 하면 누구라도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지호는 발렛 요원이 자신의 A5를 몰고 가는 걸 확인하고 트래블 라이브러리로 들어섰다.
H 카드가 없지만 안에서 문을 열어줬다.
모임에 특별히 초대받은 한지호가 도착했다는 걸 직원들이 인지했기 때문이다.
“어서오세요, 트래블 라이브러리입니다.”
“모임 때문에 왔습니다.”
“네, 한지호 선생님이시죠? 위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아직 안 오셨어요.”
미리 고지를 받은 듯 유니폼을 입은 여자 직원이 사근사근한 말투로 대답했다.
한지호는 그녀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1층 벽면은 여행 서적이 꽂힌 책장으로 가득 차 있었고, 세계 각지의 엽서를 판매하는 공간과 작은 카페도 있었다.
하지만 트래블 라이브러리의 진면목은 2층부터 드러난다.
1.5층을 지나 2층에 다다르면 육각형 모양의 책장이 넓게 펼쳐져있다.
육각형 책장이 겹쳐진 2층은 기하학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겼고, 꽂혀있는 여행 서적의 종류도 다양했다.
이곳에서 여행 계획을 세우며 책을 읽고 사진을 찍는 게 20대 여성들 사이에서 최고의 트렌드로 떠올랐다.
한지호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인테리어에 심혈을 기울인 것 같았고, 육각형 모양의 책장들이 겹쳐진 형태는 아무리 봐도 신기했다.
“간단한 음료와 디저트가 준비되어 있는데 먼저 드릴까요?”
2층으로 안내를 한 여자 직원이 질문을 던졌다.
한지호는 고개를 저으며 중앙에 놓인 테이블에 앉았다.
“괜찮습니다. 다른 일행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죠.”
“네, 그럼 천천히 구경하고 계세요.”
고개를 숙인 여자 직원이 아래로 내려갔다.
한지호는 사방을 둘러보며 눈을 빛냈다.
흥미로운 인테리어를 살펴보고, 테마 별로 분류된 여행 서적들을 구경만 해도 시간이 훌쩍 지나갈 것 같았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1층에서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한지호의 예민한 감각은 아래층에서 울리는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왔다.”
그가 나직하게 혼잣말을 읊조렸다.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이 친구들과 함께 트래블 라이브러리 안으로 들어왔다.
한지호는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한 선생님, 먼저 오셨네요!”
2층으로 올라온 이지은이 소리 높여 인사를 했다.
그녀의 발랄함은 모든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힘이 있다.
한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입니다.”
“그쵸? 오늘도 목에 침을 맞진 않을까 겁이 나네요, 헤헤.”
이지은이 농담을 하며 환하게 웃었다.
한지호가 다짜고짜 목 좌우에 침을 꽂았던 사실을 언급한 것이다.
그 덕에 고음을 회복했으니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이 됐다.
한지호의 시선은 이지은 옆의 두 명에게로 향했다.
TV에서는 자주 봤지만 실제로는 처음 보는 여자 연예인 두 명이 나란히 서있었다.
그것도 보통 여자 연예인이 아니다.
떴다 하면 TV 채널을 점령하는 탑 클래스 20대 여자 연예인들이다.
이미 10년 넘게 활동하며 정점을 찍은 김해수와는 또 느낌이 달랐다.
이지은을 비롯해 야소녀 멤버인 Fs의 크리스탈과 여배우 김여정은 연예인으로서 정점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그녀들의 뜨거운 에너지와 인기는 연예계라는 거칠고 험한 바닥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한지호는 자신의 눈앞에 이지은, 크리스탈, 김여정이 서있다는 게 실감이 안 났다.
비현실적인 순간이 그의 일상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꿈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다.
이지은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친구들을 소개해줬다.
“이쪽은 Fs의 크리스탈이에요. 여긴 이번에 새 작품 들어가는 여정이구요. 아시죠, 한 선생님?”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한지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지은이 반대로 그를 소개했다.
“내가 말했던 한지호 선생님이셔.”
“일주일 안에 고음을 돌려줬다던?”
“그렇다니까.”
“말씀 많이 들었어요. 크리스탈이에요.”
도도한 이미지의 크리스탈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시크한 패션과 차가운 이미지로 무장한 그녀의 분위기는 무척 독특했다.
한지호는 뭇 남성들이 여신처럼 떠받드는 크리스탈과 악수를 나눴다.
“지은이가 말한 것처럼 진짜 훈남이시네요. 처음 뵙겠습니다. 김여정이에요.”
옆에 서있던 김여정은 이지은이나 크리스탈보다 조금 더 격식을 차렸다.
아이돌 가수와 여배우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청순한 여배우의 계보를 이었다고 평가받는 김여정의 부드러운 눈웃음이 보석처럼 빛났다.
한지호는 김여정과도 악수를 나누었다.
네 사람은 자연스레 2층 중앙의 넓은 테이블에 앉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다른 애들은 스케줄 때문에 못 와요. 오늘은 크리스탈이랑 여정이만 모였어요.”
이지은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세간에 알려진 야소녀 멤버는 여섯 명이다.
그러나 여기 모인 세 명으로도 트래블 라이브러리 2층이 꽉 차는 느낌이었다.
한지호는 상관없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지은 씨 덕분에 크리스탈 씨와 여정 씨를 한 자리에서 보게 됐네요. 다른 멤버분들도 오셨으면 떨려서 가만히 앉아있지 못 했을 겁니다.”
“에이-! 립 서비스죠? 하나도 안 떨고 계시면서.”
그의 농담 섞인 말에 이지은과 김여정이 활짝 웃었다.
크리스탈은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지만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그렇게 가벼운 대화로 첫 만남의 어색함이 깨지고 있었다.
이윽고 트래블 라이브러리 직원들이 각자의 기호에 맞게 커피와 디저트를 들고 올라왔다.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트래블 라이브러리를 통째로 빌려 한가롭게 커피 타임을 즐기는 건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홍보 효과가 엄청나기에 H 카드가 통 큰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인기 연예인들이 괜히 1% 상류층 대접을 받는 게 아니었다.
나이에 비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지만, 보통 부자들이 가지지 못한 명성과 인기로 특별한 부가가치를 창출해내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야소녀의 핵심 멤버들과 진짜 호사를 누리며 즐겁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소속사에서 지어준 보약을 먹었는데 별 효과가 없는 것 같다?”
“네. 촬영 일정이 워낙 강행군이라 그런 건지 몰라도 아무 효과를 못 느꼈어요.”
“그럼 약이 잘못 된 겁니다. 여정 씨 체질과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제대로 된 약은 반드시 복용 전후의 차이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지호는 이지은이 믿고 추천한 한의사로서 가벼운 상담을 해줬다.
김여정과 크리스탈이 평소 궁금했던 걸 물어보면 알아듣기 쉽게 대답해주는 것이다.
이지은이 그를 초대한 보람을 느끼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야소녀 멤버들에게 한지호라는 젊고 훈훈한 한의사가 일주일 안에 목 상태를 회복시켜줬다고 자랑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야소녀 멤버들 중에서 특히 김여정과 크리스탈이 한지호를 보고 싶어 했고, 그렇게 오늘 자리가 성사된 것이었다.
한지호로서도 나쁠 게 없었다.
야소녀 모임에 유일한 남자로 참석하는 건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살 일이다.
게다가 한창 잘 나가는 20대 여자 연예인들과 인연을 맺으면 두고두고 득이 될 터였다.
인맥이 곧 재산이다.
또 실리 계산을 떠나서 꽃처럼 상큼한 20대 여자 연예인 세 명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싫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한지호는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커피와 디저트, 그리고 미녀들과의 대화를 즐겼다.
“한 선생님, 치료 목적이 아니라 보약 같은 것도 지어 주시나요?”
한참 설명을 들은 김여정이 분홍빛 입술을 달싹였다.
한지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