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1장, 잘나가는 소녀들 (1)
조기운은 한지호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그는 한 번도 머리 쓰는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학창 시절에는 체육 특기생으로 운동에 전념했고, 방황을 시작하면서는 노가다 판을 전전하며 거친 인부들과 공사 밥을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칠 안에 청우단 고객 리스트를 줄줄 외웠고, 실제로 고객들을 만나서도 실수를 하지 않았다.
한지호가 몇 몇 고객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봤지만 다들 조기운의 예의 바른 태도와 깨끗한 인상에 높은 점수를 줬다.
이제껏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다양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걸 조기운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다.
단순히 청우단을 구입한 기존 고객들과 연락하며 추가 주문을 받는 일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기운의 역할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입소문을 통해 청우단을 찾는 새로운 사람들을 선별해서 만났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 같은 믿을만한 사람들에게만 추가로 판매를 하는 것이다.
한지호는 전적으로 그의 판단을 신뢰했다.
어차피 맡긴 일이라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끝까지 지켜보는 게 정답이다.
지난 시간 동안 가까이서 지켜본 조기운은 어떻게든 밥을 만들어낼 인재였다.
한지호는 신사동 오피스텔 거실에서 그의 보고를 받는 중이었다.
거실 옆 전면 유리창 너머로 강남의 야경이 아름답게 어른거렸다.
보고를 받는 자리지만 소파 앞 테이블에는 샴페인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딱딱하지 않고 편안한 분위기다.
하지만 보고를 하는 조기운도, 그의 이야기를 듣는 한지호도 진지한 표정이었다.
공적인 대화를 나눌 때는 둘 다 무섭도록 몰입을 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기존 고객들과 매끄럽게 연락을 하는 문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저를 통해서 청우단 판매가 이뤄진다는 걸 대부분 자연스럽게 인식하셨습니다.”
“고생했어.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첫 고객과 전화 통화를 하고, 직접 만날 때는 너무 긴장 됐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괜찮아졌습니다. 고객들도 다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 결 편해졌습니다, 형님.”
“맞아. 다들 잘 나가는 사람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계인이나 그런 건 아니니까. 다 똑같은 사람이지. 조심스럽고 공손한 태도를 유지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쫄거나 비굴해질 필요는 없어.”
“네. 명심하겠습니다.”
한지호는 싹싹하게 대답하는 조기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한 번도 건성으로 말을 흘려듣는 법이 없었다.
한지호가 하는 모든 말을 인생의 진리처럼 떠받들며 진지하게 마음에 새겼다.
그런 모습이 눈에 보이기에 믿음을 주고 예뻐할 수밖에 없는 동생이었다.
“가볍게 한 잔 하면서 계속 이야기하자.”
한지호가 샴페인 잔을 들어 조기운에게 건넸다.
술이라고는 깡소주밖에 모르던 조기운이지만, 한지호를 만난 이후 점점 입맛이 고급스러워지고 있었다.
한지호는 단순히 허세를 부리기 위해 샴페인이나 와인, 위스키를 마시는 게 아니었다.
상류층의 기호를 정확히 이해해야 그들과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더 높은 세계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이미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상류층이 되고 싶으면 그들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아야 하고, 1%와 어울리고 싶다면 1%의 취미를 이해해야 한다.
한지호는 조기운에게도 그런 기준을 요구하고 있었다.
조기운을 단순한 부하 직원이나 소모품으로 여긴다면 이럴 필요가 없다.
그를 훗날 함께 더 높은 세상으로 올라갈 파트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가르쳐 주려는 것이다.
“어때?”
“너무 달콤한데요, 형님.”
“소주에 비하면 달콤해서 술처럼 안 느껴지겠지. 하지만 미세하게 느껴지는 쓴 맛이 있을 거야.”
“네. 뒷맛이 씁쓸하네요.”
“그 뒷맛에 숨어있는 깊이를 느껴봐. 달콤함이 짙을수록 쓴맛의 여운도 더 깊을 테니까.”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나도 이제 막 여러 술에 눈을 뜨기 시작했으니 조급해 할 것 없어. 천천히 즐기다보면 알게 될 거야.”
한지호는 웃으며 샴페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달콤함이 입안을 감쌌고, 뒤 따라오는 쓴맛이 묘한 깊이를 더했다.
그가 마신 술은 한 병에 수십만 원, 클럽이나 바에서는 병 당 100만 원을 넘게 받고 파는 돔 페리뇽(Dom Perignon)이다.
돔 페리뇽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 마실 수 있는 삶.
불과 얼마 전까지는 상상도 못하던 일들이 이제는 일상이 됐다.
터억.
샴페인 잔을 내려놓은 한지호가 다시 일 이야기를 꺼냈다.
“기존 고객들 외에 새로운 고객들과의 접촉은 어때?”
“여의도를 중심으로 입소문이 퍼지는 속도가 빠른 것 같습니다. 새로 청우단 구매를 원하는 고객들이 많지만, 확실하게 소개를 받은 분들부터 접촉하고 있습니다.”
“아주 잘 하고 있네. 덕분에 내가 일이 줄어들어 시간이 많아졌어.”
“형님께서 한 달 판매량을 2000알 이하로 조절하라고 하셨으니까요. 시간이 지날수록 구매 대기자들이 많아지면 수량을 조절하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적절하게 컨트롤하겠습니다.”
“내가 괜히 걱정 할 필요가 없겠다. 청우단 관리는 이대로 너에게 일임해도 되겠어.”
“많이 부족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도 떨리고 설렙니다.”
보고를 마친 조기운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진심을 털어 놓았다.
한지호는 빈 잔에 샴페인을 따르며 그를 쳐다봤다.
두 손으로 잔을 받은 조기운이 말을 이어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일을 맡았고, 책임이란 걸 지게 됐습니다. 물론 그 전에 공사판에서 일했던 것도 소중한 경험이지만,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그때는 단순히 하루 벌어 먹고 살기 위한 일이었다면 지금은 미래를 위해 진짜 내 일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떨리고, 설레고…… 지호 형님께서 주신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조기운의 진심은 한지호를 뭉클하게 만들었다.
한지호는 10대 시절부터 대학 생활 내내 기회를 갈구했었다.
고아라는 환경 탓에 공정한 경쟁을 하기 힘들었고, 좋은 기회는 대부분 괜찮은 집안 출신의 동기들에게 돌아갔다.
그랬던 한지호가 누군가에게 기회를 주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 자체로 더 없이 뿌듯한 일이었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는 것 이상의 만족감이 느껴졌다.
한지호는 조기운의 두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난 이미 너에게 기회를 줬고, 넌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기회를 줄게. 기운이 넌 초심을 잃지 말고 지금처럼만 해. 그럼 나랑 같이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게 될 거다.”
“감사합니다, 지호 형님.”
조기운은 구구절절 많은 말 대신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고마움을 표현했다.
한지호는 그의 잔에 가볍게 건배를 하며 눈웃음을 지었다.
조자룡이라는 어마어마한 전생을 갖고 있는 조기운은 기대에 부응하며 청우단 관리를 확실하게 맡아줬다.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는 든든한 오른팔 조기운과 함께 세상을 휘저을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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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정말 잘 어울리세요!”
백화점 여직원이 감탄사를 쏟아냈다.
그녀의 호들갑이 100% 진심이 아니라는 건 누구라도 알 것이다.
손님에게 옷을 판매하기 위해 오버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깔끔한 차콜 그레이 색깔의 정장을 입고 나온 한지호를 바라보는 여직원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짙은 회색에 아주 희미한 파란색 체크가 들어간 정장은 영화 킹스맨에 나온 영국식 클래식 슈트 못지않게 멋있었다.
정장을 입은 한지호도 킹스맨의 콜린 퍼스에 뒤처지지 않는 핏을 자랑했다.
그는 정장 한 벌에 몇 백만 원이 넘는 알마니 매장에서 옷을 고르는 중이었다.
한지호가 옷에 신경을 쓰며 투자를 하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오늘 저녁 아주 중요한 모임에 초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가수 이지은의 고음을 일주일 안에 되찾아주고 신뢰를 얻은 그는 야소녀 모임에 초청 받았다.
야생 소녀들의 모임이라는 독특한 이름이 우스울 수 있지만 멤버들의 면면은 화려하기 짝이 없다.
여자 솔로 가수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이지은, 엄청난 극성 팬덤을 보유한 아이돌 그룹 Fs의 센터인 크리스탈, 최근 미니 시리즈 여주인공 자리를 꿰찬 신인 여배우 김여정 등 핫(hot)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20대 초반 여자 연예인들이 주축을 이룬 모임이다.
연예 프로그램이나 인터넷에서도 야소녀 모임은 화제의 중심이었다.
연예계에는 용띠 클럽부터 야채파 등 여러 사조직이 있는데, 최근에는 야소녀 멤버들의 인기가 독보적이다.
한지호는 모든 사람들이 선망하는 야소녀 모임에 청일점으로 참석하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팬들은 물론이고 연예계 관계자들도 깜짝 놀랄 게 분명했다.
“마음에 드네요. 이걸로 살게요.”
“정말 잘 선택하셨어요. 저희 옷을 이렇게 완벽하게 소화하신 분은 진짜 오랜만이에요.”
“그런가요? 고맙습니다.”
“립 서비스가 아니라 정말이에요. 타이랑 행커 칩은 서비스로 챙겨드릴게요.”
20대로 보이는 여직원은 한지호의 옷태가 진짜 마음에 든 눈치였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오금희를 수련하며 탄탄한 몸매를 갖게 된 한지호는 슈트 빨이 뭔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적당히 벌어진 어깨와 잔근육으로 다듬어진 몸은 핏하게 달라붙는 알마니 슈트를 패션 모델처럼 소화했다.
백화점 여직원의 호들갑이 과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재킷, 팬츠, 셔츠까지 한 벌 세트로 하셔서 450만 원 입니다. 카드로 결제하시겠어요?”
“네.”
“몇 개월 해드릴까요?”
“일시불로 부탁합니다.”
한지호는 450만 원이라는 가격에 놀라지 않았다.
매장에 들어오기 전부터 최고급 명품 정장의 가격대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었다.
이왕 투자하기로 작정했다면 돈을 아끼지 않는 게 낫다.
어설프게 돈을 아끼려들면 이도저도 아닌 결과를 얻을 확률이 높다.
그럴 바에는 확실하게 투자를 하고 돈을 쓴 만큼 가치를 누리는 게 현명한 태도다.
그는 450만 원을 일시불로 결제할 정도의 경제력은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청우단을 팔아서 한 달에 2천만 원 가까운 수익을 올린다.
거기에 더해 김해수와 이지은에게 받은 현금도 통장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매달 나가는 신사동 오피스텔의 살인적인 월세와 생활비, 조기운의 월급 등이 적지 않지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다.
한지호는 청우단 판매 수익으로 상류층에 걸맞은 생활을 하고, VIP들을 치료한 대가로 받게 되는 목돈은 저축한다는 계획을 세웠었다.
“결제 완료 됐습니다. 입고 계신 옷은 슈트 케이스에 포장해 드릴까요? 아니면 입고 가시겠어요?”
여직원이 두 손으로 신용카드를 돌려주며 물었다.
한지호는 몸에 딱 달라붙는 정장을 입은 상태 그대로 야소녀 모임에 참석할 생각이었다.
“입고 갈게요.”
“그럼 고객님께서 입고 오신 옷을 슈트 케이스와 함께 포장해드리겠습니다.”
“그럼 고맙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여직원은 내내 묘한 눈길로 한지호를 쳐다보다가 탈의실로 들어갔다.
한지호가 벗어 놓은 옷을 정리해 슈트 케이스와 같이 포장하기 위해서였다.
곧이어 여직원이 알마니 로고가 크게 새겨진 쇼핑백과 슈트 케이스를 들고 나왔다.
쇼핑백 안에는 한지호의 옷이 들어 있었다.
“옷이 마음에 드네요. 또 올게요.”
“감사합니다, 고객님!”
한지호는 웃으며 인사를 한 뒤 알마니 매장에서 나왔다.
그의 등 뒤로 여직원의 뜨거운 시선이 오래도록 머물렀다.
준수한 외모에 완벽한 비율을 가진 20대 남자가 450만 원 짜리 알마니 정장을 일시불로 결제했다.
누가 봐도 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매장 직원이 고객에게 먼저 대시를 할 수는 없다.
여직원은 아쉬운 눈길로 사라지는 한지호의 뒷모습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사실 한지호도 여직원의 눈빛에 담긴 감정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김해수와 밀회를 나누는 관계가 된 후 여자를 보는 눈이 트였다.
하지만 이제 곧 대한민국에서 제일 예쁘고 인기 많은 20대 초반의 여자 연예인들을 만나러 갈 예정이다.
그러니 다른 여자의 관심에 마음이 동할 리 없었다.
저벅저벅.
한지호는 방금 새로 산 알마니 정장을 입고 백화점 명품관을 가로질렀다.
오늘따라 걸음걸이가 더욱 당당해 보였다.